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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섭: 토폴로지컬 플레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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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제목 : 홍명섭 개인전_토폴로지컬 플레인(topological plane)
전시작품 : ‘토폴로지컬 평면작품’ 23점

전시장소 : UM갤러리
           서울특별시 강남구 압구정로12길 25, 3층
           Tel : 02) 515-3970 

전시기간 : 2020년 4월 9일 - 5월 9일
전시오픈 : 2020년 4월 9일 오후 5시

공동기획 : UM갤러리 백동재 실장 & 독립큐레이터 류병학


토폴로지컬한 작업에 대한 반성

왜 내 작업세계는 의사/토폴로지로 통섭되고 있는가? 나는 평소 길눈이 무척 어둡다. 이를테면, 운전하고 어디를 가다가도 그 길을 다시 반대편에서 오게 될 때, 거의 생소하게 느끼기 시작하다가 마침내 길을 혼돈하고 마는 사람이다. 지형지물 감각이 매우 떨어지는 사람으로 토폴로지에 관심이 있다는 것이 모순되고 전혀 이상한 것일까. 아니, 오히려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기에 토폴로지컬한 여러 현상들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는지 모른다.

외할머니 무릎을 배고 지낼 시절 즈음에 목격한 것으로, 할머니가 동절기 버선에 솜을 붙여 넣을 때, 솜을 대고 바느질하여 넣은 버선 면을 뒤집으면 누빈 솜은 전혀 다른 쪽 면에, 그것도 마술을 부리듯이 반대 편에 잘도 자리잡든 ‘신기한’ 내 최초의 위상적 추억이 자라서 굴렁쇠 마술에까지 어어진다. 그리고 경복궁 근정전 뜨락에서 만난 바닥돌의 배치들, 얼핏 보아 전혀 질서 잡히지 않은 비정형의 돌들의 모양과 거기에 따른 배치의 연쇄들이 몹시 신기했다. 마치 잉카의 석벽들의 이음새의 연쇄가 또 다른 구조로 그렇듯이.

나는 무슨 일이든 체계를 세우지 않고 즉흥적으로 해내려고 덤비기 때문에 마누라가 보기에 나라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같은 일을 해도 무척이나 어렵고 갑절 힘들게 해결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본다. 한 동네에서 뭔가를 사러 나가도, 나는 질서 있게 코스를 잡아서 순서 있는 구매로 시간과 노고를 더는 것이 아니라, 여기 갔다가 저기 갔다가 하는, 비경제적으로 시간을 허비하는 타입이다. 도무지 조직적 사고가 결여된 사람이라고 집에서 항상 비판을 받는다. 이런 기질과 사고방식이야말로 바로 토폴로지컬한 사고가 결여 된 것이라고 본다.

토폴로지컬 한 사고와 의식의 문제는 우리 일상에 이렇게 가까이 파고들어 있다. 흔히 대학에서 시간표를 짜는 경우에도, 개인의 스케줄 관리에도, 즉, 약속을 배치하는 판단에도 적용이 되어 누군가는 아주 순조로운 흐름 속에 일을 이끌게 되지만, 누군가는 나처럼 여러 번 오고 가며 시간을 낭비할 뿐만 아니라 몇 갑절 노고를 무릅쓰며 힘들게 이행해야 한다. 

우리 신체 자체도 토폴로지컬한 구조를 띄고 있다. 입과 항문을 연결하는 통로도 사실은 몸 밖의 현상이다. 그래서 음식물 섭취와 배변이 가능한 것이다. 임산부의 자궁조차 몸 밖의 현상인 것이다. 그래서 잉태와 자연분만이 가능한 것이다. 마치 ‘클라인 병’처럼, 주둥이가 몸 안으로 엮이는 형국이 우리의 인체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토폴로지란, 이를테면 컴퓨터나 도시 지하철처럼 복잡한 기능들을 제어하고 계획하고 설계하는 ‘조직 설계’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현대적 위상학 일뿐 아니라, 한 집단의 재정청책에서부터 작금에 겪고 있는 집단 감염에 대처하는 방역정책에까지 긴밀하게 적용 되어야 하는, 그렇게 우리의 일상 삶에 개입하여 사고와 판단을 좌우하는 ‘사유학’이기도 한 것이다.

나는 젊어서부터 이런 ‘고무판 기하학’에 매료되는 모순을 누리고, 내 작업에 끌어들이고 반영하며 살았다. 그러나, 칼을 만드는 사람이 칼을 잘 쓰는 것과 그리 관계가 없듯이, 피아노 조율사가 연주를 잘 하는 사람이 아니 듯, 토폴로지로 사유하는 작업을 하는 작가가 토폴로지컬할 사유에 능하리란 보장은 전혀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아니, 도리어 나는 위에서 고백하였듯이 토폴로지컬할 사유에 재능이 없는 사람에 가깝기에 더욱 기를 쓰고 그런 조작의 소중함에 지금껏 각별히 매달려 왔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나란 작가란, 토폴로지컬한 면에서 ‘검객’이나 ‘연주자’는 못될 것 같다. 다만, 작업을 통해서 ‘언어 시스템을 거치지 않는’ 토폴로지컬한 상상과 사유를 대뇌에 직접적 자극으로 호소해 보려는 욕망이 있는 것 같다.

- 홍명섭의 ‘작가노트’


토폴로지(topology)?

‘토폴로지(topology)는 그리스어의 ’위치‘를 뜻하는 토포스(topos)와 ’학문‘을 뜻하는 로고스(logos)를 접목시킨 단어이다. 우리는 ’토폴로지‘를 ’위상(位相)‘ ’위상수학(位相數學)‘ ’위상기하학(位相幾何學)‘ 그리고 ’공간배치‘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위상‘은 흔히 어떤 사물이 다른 사물과의 관계 속에서 가지는 위치나 상태를 뜻한다. 따라서 ’위상수학‘은 위상공간에서 도형의 길이 및 크기와 같은 양적 관계와 상관없이 도형 간 위치를 바꾸거나 연결할 때 휘거나 늘리거나 축소하는 연속적인 변형과정에서 변하지 않는 성질을 밝힌다. 그리고 위상수학은 자르거나 붙이는 변형 과정 속에서 얼마나 다른 도형이 있는가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위상기하학‘은 도형이나 공간이 가진 여러 가지 성질 가운데 특히 연속적으로 도형을 변형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성질을 연구하는 기하학이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유클리드기하학에서는 형태를 변형시키지 않고, 단지 평행이동, 대칭이동, 회전이동 등에 의해서 겹쳐지는 두 도형을 같은 도형으로 인식한다. 그리고 이러한 두 도형의 관계를 ‘합동(合同)’으로 일컫는다. 하지만 위상수학에서는 위상적 불변성을 공유하는 도형들을 구부리고, 늘이고, 줄이는 것과 같은 변형을 통해 같은 형태로 만들 수 있을 때 같은 도형들로 생각한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보자. 종이 위에 삼각형과 원이 그려져 있다. 유클리드기하학에서는 이 둘은 완전히 별개의 도형이다. 그러나 위상기하학에서는 같은 종류의 도형으로 간주된다. 왜냐하면 삼각형을 차츰 부풀려 변형해 가면 마침내 원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상기하학에서 원, 삼각형, 사각형, 오각형, 육각형, 팔각형 등은 모두 같은 도형인 셈이다. 마찬가지로 위상기하학에서 각기둥, 각뿔, 원기둥, 원뿔, 구 등도 모두 같은 도형이 된다. 이를테면 위상기하학에서 선분의 길이나 각도, 넓이, 부피 등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이다. 


토폴로지컬 플레인(topological plane)?


홍명섭_토폴로지컬 플레인(topological plane)_UM갤러리 전시광경. 2020

홍명섭의 ‘토폴로지컬 플레인(topological plane)’은 일종의 ‘토폴로지컬 드로잉(topological drawing)’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왜냐하면 그것은 종이에 연필 가루(흑연)로 작업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의 ‘토폴로지컬 드로잉’은 종이에 마치 정밀묘사하듯 사각형(들)로 접혀진 종이를 표현해 놓은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종이에 접혀진 종이를 ‘재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재(實在)' 종이에 접혀진 종이의 '실제(實際)'를 표현한 것이다. 그의 ‘토폴로지컬 플레인’ 작업과정은 다음과 같다.

1) 그는 종이를 접는다.
2) 그는 접은 종이를 편다.
3) 그는 접혀진 종이 주름 위에 연필 가루(흑연)를 묻혀 연필이나 솜으로 문지른다. 
4) 그는 접혀진 자국이 있는 종이를 다림질해서 평평하게 만든다. 

따라서 홍명섭은 자신의 작업을 ‘위상적 평면(topological plane)’으로 명명한 것이다. 그것은 접혀진 종이를 ‘재현’한 것은 아니지만 ‘실제’(접혀진 종이)로 나타난다. 따라서 우리는 ‘실재’의 종이에 ‘실재’하지 않는 접혀진 종이를 ‘실제’하는 것으로 느끼게 된다. 말하자면 그의 ‘위상적 평면’에서는 평평한 종이와 접혀진 종이를 같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그의 ‘토폴로지컬 플레인’은 우리에게 허망(虛妄)을 떠난 열반의 깨달음을 촉구하는 것이 아닌가. 


‘토폴로지컬 서페이스(topological surface)’

홍명섭의 ‘토폴로지컬 플레인’은 1978년 대전문화원 화랑에서 열린 첫 개인전인 <면벽전(面壁展)>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당시 그는 제작비가 거의 들지 않은 종이로 작업한 일종의 ‘열린 집합(open set)’의 작품을 전시했다. 그것은 사각형 종이의 모서리 부분들만 찢어 벽면에 부착한 작품이다. 홍명섭은 그 작품에 대해 “지금까지 따불로가 은폐하여 왔던 벽면을 양성화시키고 싶었다”면서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홍명섭_de·veloping_hard board 80x80cm. 1978

“내가 마주한 벽은 내 시야를 차단하는 소극적 벽면이 아니고 현실로 탈바꿈할 중요한 시각현장이다. 나의 감각과 지각을 하나로 열어 놓을 근원적 느낌을 통하여 절대적 지금과 여기뿐인 현장형식이 개진하는 시각대화(visual meditation)를 찾아 마주 바라다보고 있다.”




홍명섭_square operation_paper, pannel, vinyl tape_60x60cm each. 1979

홍명섭은 1979년 그로리치 화랑에서 두 번째 개인전 <(前, 現, 變)身>을 개최한다. 당시 그는 또다시 제작비가 거의 들지 않은 비닐 테이프(vinyl tape)로 작업한 또 다른 ‘열린 집합’의 작품을 전시했다. 그것은 비닐 테이프로 가로X세로의 크기(60X60cm)가 같은 일종의 ‘프레임’을 8개 만들어 4개의 사각 액자와 4개의 사각 받침대에 설치한 작품이다. 4개의 사각 액자 안에 설치된 4개의 ‘테이프-프레임’은 각기 다른 부분들을 부착시켜 각기 다른 형태를 드러낸다. 마찬가지로 4개의 사각 받침대에 설치된 ‘테이프-프레임’들은 사각 받침대의 모서리에 각기 부분들을 걸치게 함으로써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홍명섭은 이 작업을 ‘사각 변주(square operation)’로 작명했다. 그의 ‘사각변주’는 동일한 8개의 ‘비닐 테이프-프레임’으로 각기 다른 형태로 표현한 작품이다. 하지만 그의 ‘사각변주’는 각기 다른 형태로 나타난 작품들을 위상적 관점에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 점에 관해 그는 ‘사각 변주’ 작업노트에 다음과 같이 언급해 놓았다. 

“굳은 것으로 상정되는 도형만으로 변환할 수 있는 유클리드적 형태사고의 논리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경직된 공간의식과 시각사고에, 마치 찰고무판과도 같은 탄성적 위상공간적 사고야말로 역동적 상상의 공간에 풍부한 명상적 회로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우리네 사찰경내나 고궁 또는 산성의 석벽에서 무심코 발견하게 되는, 얼핏 무질서하기만 한 듯한 비정형의 바닥돌 덩어리들의 이음새 구조야말로 실은, 굳어져 있는 기하 도형의 공간구조를 넘어서 끊임없이 변조하는 탄력 있는 비정형의 부드러운 질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



홍명섭_topological surface_folding paper black lead 45x45cm. 1979

홍명섭은 같은 해(1979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제7회 앙데팡당(Independants)전에 초대되어 또 다른 ‘사각 변주’ 작품 3점을 출품했다. 당시 그가 출품한 작품은 ‘토폴로지컬 서페이스(topological surface)’이다. 그런데 그의 ‘토폴로지컬 서페이스’가 바로 다름아닌 ‘토폴로지컬 플레인’ 작품과 같은 방식으로 제작된 작품이란 점이다. 따라서 그의 ‘토폴로지컬 플레인’은 40년 만에 ‘부활’한 셈이다. 

그런데 홍명섭은 자신의 “작업에서 연대기적 순서란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에게 “새로운 작업과 옛 작업이라는 구분이 무색하고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 점을 즐겨 쓰는 용어들 중에 ‘메타(meta)’를 사례로 들은 그의 텍스트(on the meta;pattern)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on the meta;pattern

meta의 뜻은 다층적이다. 우선, 시간적 변화(change, 易)의 의미와 공간적으로 앞을 가리키는(before, 前) 위상과 뒤(after, 後)라는 방향성과 또는 그것과 반대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는 (beyond, 超) 의미작용을 포함한다. 

그러나 여기서 아주 흥미로운 사실은 공간적인 <전/후, 위/아래>라는 위상이 시간적 차원에서 볼 때는 뒤집혀 져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10년 전’이라는 말에서 보듯 <앞, 前>의 의미는 과거의 시간, 즉 뒤의 시간으로 변하고, ‘10년 후’라는 말에서 쓰여지는 <뒤, 後>라는 위상은 시간 속에서 미래라는 앞의 세월을 가리키는 것으로 뒤바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meta의 시간과 공간은 전도되거나 역류하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그것은 meta-morphosis(변태)의 단계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meta의 공간적 위상만을 염두해 둔 개념으로 발전시킨 서구의 철학적 진리는 항상 절대 공간 속에서만 진리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 심취해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진리’는 살아있는 진리로 실현되는 것 같지가 않다. 살아있는 진리의 작동은 시간, 즉 체험의 여러 속도들과 반영-이탈의 단계 속에서 어떻게든 변하고 미끄러지고 뒤집혀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금세기 여러 분야의 새로운 사고 유형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었던 소설가 보르헤스는 <카프카와 그 선구자들>이라는 짤막한 에세이 속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카프카적 특질들은 이미 카프카가 나오기 전의 선구적 테스트들에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카프카의 작품이 없었더라면 그것을 인지할 수 없었을 것이니, 나아가서 차라리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란 점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카프카 덕택에 그 선구자들을 상당히 다른 방법으로 세련되게 읽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작가들은 각자의 선구자들을 다른 방법으로 ‘창조’해낸다. 그 작업은 우리의 미래를 변화시키게 되는 것처럼 우리의 과거 개념까지 변화시킨다. 

과거가 미래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미래가 과거를 변화시킨다. 이렇게 ‘창조적’ 시간은 얼마든지 거꾸로 흐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볼 때, 문화적 시간의 흐름도 간혹 역류하면서 창조적 과거나 타문화의 선구적 단계를 ‘창조’ 하는 시간을 살려낸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meta의 시간과 공간의 가역성들이 동시적으로 열려 있어야 한다고 본다. 따라서 내가 곧잘 사용해온 <meta-form/meta-mind>나 <meta-sculpture>라는 말들은, 가령 조각이라면 조각의 단계라는 개념의 공간적이고 시간적인 반전, 전도, 변태와 같은 흐름과 역류를 생명적 주기(생태, 생리) 속에서 더불어 파악하고 체험된다는 점을 내포한다고 할 수 있다.

- 홍명섭의 ‘작가노트’




홍명섭, 상식을 뒤집는 아티스트

홍명섭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한 장의 종이를 생전 처음 보듯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우리 앞에 놓여있는 백지는 그에게 단순한 백지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백지는 다양한 ‘얼굴’로 열려져 있는 신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백지에서 펼쳐지는 새로운 세계를 본다. 아니다! 그는 보는 것이 아니라 ‘창조’한다. 그렇다! 외할머니의 마술 같은 버선 만들기를 보았던 소년 홍명섭은 청년 홍명섭이 되어서 평평한 평면에 ‘위상적 평면’을 만들어낸다. 

홍명섭은 지나가는 사람을 봐도 처음 보듯 대한다. 왜냐하면 그에게 인간은 신비스럽게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음식물을 소화하고 흡수하는 소화기관을 인체 내부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의 소화기관은 내부이면서 동시에 외부로 연결된다는 점이다. 우리가 입을 통해 먹는 음식물은 식도와 위 그리고 장을 거쳐 항문으로 배출된다. 따라서 우리의 소화기관은 하나의 기다란 파이프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겠다. 

안이 곧 밖이라는 것을 생각해 낸 사람으로 흔히 독일의 수학자 뫼비우스(August Ferdinand Mobius)를 든다. 1858년 뫼비우스는 속이 인체의 ‘빈 원기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안과 밖이 뒤바뀌는 일명 ‘뫼바우스 띠(Mobius strip)’를 고안한다. 1980년 홍명섭은 ‘뫼비우스 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양한 ‘파이프 변주(pipe operation)’ 작업을 한다. 물론 그의 ‘파이프 변주’는 ‘위상적 조각(topological sculpture)’을 뜻한다. 

홍명섭은 일상생활에서 흔히 만나는 사물들을 보고도 놀란다. 왜냐하면 그에게 모든 사물은 처음 보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돌과 꽃에 귀 기울인다. 이를테면 그는 마치 돌과 꽃이 말을 하고 있는데 그가 듣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만약 우리가 ‘위상적 사운드’ 관점에서 돌과 꽃의 말에 귀 기울인다면, 돌과 꽃의 말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홍명섭의 ‘토폴로지컬 플레인’은 우리에게 우리의 상식을 뒤집으라고 속삭인다. 그는 우리에게 우리의 상상력을 풍요롭게 확장시키는 ‘토폴로지컬 사유(topological thought)’를 제안한다. 왜냐하면 ‘토폴로지컬 사유’는 우리의 일상을 생소하고 신비한 세계로 안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의 모든 작품들은 바로 ‘토폴로지컬 사유’를 관통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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