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드화된 사회와 탈코드화 된 자연을 매개하는 ‘바코드 산수화’
최광진(미술평론가)
동양에서 산수화는 원래 번잡한 속세에 얽매이지 않고 자연을 벗 삼아 군자의 심성을 기르는 인격 수양의 방편이었다. 동양인들은 자연을 살아 있는 생명체로 간주하고 조화롭고 변화무쌍한 자연을 따라 욕심과 집착을 비우고자 했다. 그래서 그처럼 생동하는 자연을 온몸으로 체득하고 산수화로 그려서 일상에서도 자연을 항상 느끼고자 했다. 이것은 인간을 자연보다 우월하게 생각하고 인간을 중심으로 표현한 서양의 풍경화와 상반된 특징이다.
오현영의 작품은 이러한 산수화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현대적 감성이 반영된 매우 독톡한 산수화다. 그 독특함은 산이나 바위, 흙 등을 표현하는 전통 산수화의 준법(皴法: texture stroke)을 바코드로 대체한 데서 기인한다. 상품을 굵기가 다른 수직 막대들의 조합으로 만들어 광학적으로 판독할 수 있도록 한 바코드는 이제 현대인의 삶과 떨어질 수 없는 문화가 되었다. 이러한 문화는 물건을 기계적으로 계량화하여 상품 관리의 편리함을 위해 만든 것이지만, 이로써 과거 시장에서 물건을 교환하거나 사고팔며 오갔던 인정마저 계량화된 듯하다.
오현영의 산수화는 각종 상품에 찍힌 바코드를 모으고 확대하여 캔버스에 실크스크린으로 찍은 것이다. 오직 숫자와 수직선만이 존재하는 바코드는 생동감 있고 변화무쌍한 자연을 표현하기에는 제약이 많은 조형 언어다. 게다가 캔버스에 바코드를 찍을 때 사용하는 실크스크린 기법 역시 회화적인 표현을 하기에 부적절할 수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부적절한 선택이 오현영 작품을 신선하고 현대적인 산수화로 만들고 있다. 수많은 바코드가 집적되어 그럴듯한 자연으로 만드는 작업 과정은 메마른 사막에 오아시스를 건설하는 것처럼, 절실하고 힘든 작업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녀는 모든 것이 양적으로 계량화되고 인정마저 코드화된 삭막한 현대 사회를 반영하고, 과거 아날로그 시대의 낭만을 꿈꾼다. 이것은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시대를 살면서 삭막하게 코드화되는 사회와 탈코드화된 자연을 매개하는 작업이다.
이번에 소개되는 근작들은 수년간 이어오는 바코드 기법을 회화적으로 더 자유롭게 구사함으로써 바코드 양식이 한층 무르익어 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대표작 <바코드 금강산만물초승경도>는 김규진의 <금강산만물초승경도>를 자신의 바코드 양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금강산의 산악미를 대표하는 만물상은 깎아지른 절벽과 하늘을 찌를 듯한 기암괴석의 바위들이 천태만상을 이루고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겸재 정선을 비롯하여 많은 진경산수 화가들이 이곳을 그렸고, 김규진은 1920년 회정당 벽화의 제작을 의뢰받고 만물상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8m가 넘는 대작으로 완성했다. 이 작품을 참조하여 1년 가까이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오현영의 작품은 실제 크기대로 가로가 8m나 되는 초대형 작품이다. 여기에는 만물상의 첩첩이 포개진 웅장한 봉우리들과 단풍든 가을의 울창한 숲이 특유의 바코드 기법으로 표현되어 있다. 원본에 있는 운무와 안개는 현대식 빌딩으로 변해 있고, 밑부분에 흐르는 온정천의 푸른 물도 모두 바코드로 이루어져 있다.
수천 년의 걸쳐 내려오는 산수화의 역사에서 자연을 이렇게 표현한 작가는 없었다. 바코드는 20세기 중반부터 시작되었고, 그것으로 자연을 표현한다는 건 상상조차 힘들기 때문이다. 오현영의 작품은 이처럼 보잘것없는 것을 미적인 대상으로 다룸으로써 우리의 상식을 깨는 쾌감이 있다. 이제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바코드 산수화는 디지털 시대에 인간마저 기계적으로 코드화되고 있는 현대 사회를 아름다운 산수화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해학적이다. 과거 신선이나 고상한 선비들의 수양 처였던 자연에 자본주의의 산물인 바코드와 동네 마트에서 계산한 영수증이 난무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러한 작품에서 우리는 4차 산업혁명으로 급변하는 현대 사회에서 잃어버린 중요한 무언가를 사유하게 된다.
오현영, 바코드산수, 202025, 8미터x2미터, 캔버스에 아크릴과 실크스크린
작가노트
나에게 바코드는 모든 가치가 기계화되고 코드화된 현대문명을 상징한다. 나의 그림은 그러한 환경 속에 알게 모르게 젖어 들며 각박해져 가는 나 자신과의 투쟁의 결과이고, 과거 자연과 어우러져 낭만적인 삶을 살았던 선조들에 대한 동경을 반영한 것이다. 과거 김홍도, 정선, 김규진이 그린 금강산을 바코드를 이용해서 재현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어느덧 내가 사는 빌딩숲처럼 되어 버린다. 나는 모든 가치가 자본화되고 도시화된 오늘날의 사회현실에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인간 본연의 낭만성을 현대적 감각으로 구현하고 싶다.
오현영, 바코드산수, 202015, 50호, 116×91, 캔버스에 아크릴과 실크스크린
오현영, 바코드산수, 202020, 50호, 116×91, 캔버스에 아크릴과 실크스크린
오현영, 바코드산수, 202021, 50호, 116×91, 캔버스에 아크릴과 실크스크린
오현영, 바코드산수, 202022, 50호, 116×91, 캔버스에 아크릴과 실크스크린
오현영, 바코드산수, 202023, 50호, 116×91, 캔버스에 아크릴과 실크스크린
오현영, 바코드산수, 202024, 50호, 116×91, 캔버스에 아크릴과 실크스크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