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열 개인전
전시장소 : 후미술관(강원도 원주시 문막읍 비야동길 10-12)
전시기간 : 2020. 8. 15(토) - 2020. 8. 21(금)
관람시간 : 오전 11:00 - 오후 05:00
별도의 오픈 행사는 없습니다.
관람하시는 분은 마스크 꼭 착용하시기 바랍니다.
산수몽 45X53 장지에 아크릴채색 2020
혼종과 잡종의 생태계, <산수몽(山水夢)>연작
하여경 평론
<조선의 그림을 훔치다>는 주제로 오랫동안 작업해 온 작가 이재열의 이번 전시 주제는 <산수몽(山水夢)>이다. 기성 작품을 약간 비틀거나 구도 혹은 구성을 차용하던 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모습이다. 차용된 이미지들이 그들의 고향을 떠나 서로 뒤섞이고, 난무하는 것은 작품의 수순으로 볼 때, 자연스러워 보인다. 아닌게 아니라 이번에 만나는 작품들은 지난 전시에서 확인된 ‘혼종(Hybridism)과 잡종’으로서의 성격이 더욱 강력하게 드러나 있다.
어째서 그러한가.
눈이 시릴 정도의 대비적 색감은, 언뜻 장터에서 소비되던 ‘혁필화(革筆畵)’나 화투장을 연상시키고 때로는 어전을 장식하던 일월도를 연상하게도 한다. 선명하게 처리된 외곽선과 우스꽝스런 표정들은 이번에도 일러스트레이션과 애니메이션 원화, 전통적 회화 사이의 경계선을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린다. 아크릴 물감이 갖는 재료적 특성도 거기에 한 몫을 한다.
예컨대 ‘관폭도’라는 원제의 작품을 보자. 폭포를 바라보는 인물상은 전통 수묵 회화에서 주로 다루어지던 화제(畵題)로서 ‘관폭도(觀瀑圖)’라고 불렀다. 흘러내리는 폭포와 그것을 지그시 바라보는 도사나 노인을 한 화면에 담았던 이런 류의 그림들은, 미묘하게 번지는 먹의 농담(濃淡)과 길고 힘찬 필선의 기세를 조형적으로 과시할 수 있었던 소재일 뿐 아니라 실제로 더운 여름의 열기를 식히는 실용적인 목적을 담고 있기도 하였다.
그뿐 아니라 흐르는 물이 상징하는, 순리에 어긋나지 않음, 인생무상 등의 이데올로기적 상징성까지 담고 있었으므로 여름날 선비의 방 한 쪽 벽을 장식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던 형식과 내용일 터였다. 그러나 이재열의 <관폭도>는 같은 제목의 그림이지만, 전혀 다른 시각적 체험을 안겨준다. 이 그림을 보고 시원하다거나 인생무상을 떠올리는 것은 쉽지 않으며, 차용된 소재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고 보기 어렵다. 작품의 시각적 뼈대가 될 만한 틀을 빌려왔다는 점에서 지난 작업들과 연장선상에 놓을 수는 있겠으나, 이번에 전시된 그림은 차용된 전통회화의 틀 안에 더 이상 머물지 않는다.
김홍도의 관동팔경도 중 하나인 <명경대도(明鏡臺도)>를 기원으로 한 그림도 다르지 않다. 이제는 북한땅에 속하는 금강산 경승지를 그린 김홍도의 동일 제목의 작품에서, 주변의 모든 배경을 생략해버리고 화면 한 가운데 불룩하게 솟은 화강암 바위가 지닌 형상만 따왔다. 옷을 갖춰 입음으로써 ‘인간’임을 확연하게 드러낸 존재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형상들에 둘러싸인 채, 풍경을 바라보거나, 숲길을 거닐거나 옛 그림 속 인물들처럼 배를 타고 노를 젓지만 움직임과 생명력이 상실된 채 대단히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느낌을 준다. 실제 ‘명경대’의 풍경과도, 김홍도의 ‘명경대도’와도 아무런 논리적 연관을 갖지 않은 채로 불쑥 제시된 자연적 배경은 전혀 ‘자연스럽지’ 않으며, 자연을 가장한 인공물, 다시 말하자면, 환상의 산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당연하게도 화면 속 인간들은 이 환상으로 구성된 생태계 속에서 주인이 될 수 없다. 전통 수묵 산수화에서 깨알 같이 표현되던 인간들의 형상이 그러했듯이, 이 새로운 생태계 속의 인간들도 제 몫으로 할당된 ‘있으나 마나한’ 비중을 묵묵히 감내하며, 지배자의 위치를 넘보지 않는다.
이처럼 기원을 짐작할 수 있는 도상들을 제외하고 나면,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생명체들이 남는다. 이를테면, 귀가 셋인 형상, 날개 달린 물고기, 머리가 잘린 네 발 동물, 고래와 해파리를 연상시키는 ‘그것’들은, 유아들이 보는 그림책에나 등장할 법한 유치함과 기괴함을 동시에 지녔으며, 나무 뒤, 물 속, 하늘 위, 구름 위 등 화면 속 어디에나 존재한다. 인간들보다 훨씬 숫자도 많고 다양하며 생동감과 표정도 훨씬 역동적이다. 화면 속 생태계의 진정한 주인공은 ‘그것’들이다. ‘요정’도, ‘생령’도, ‘만화적 캐릭터’도 아니며 ‘신’도 아닐 이 형상들에게 마땅한 이름을 붙일 수가 없다. 모두 다 해당되거나 어느 것도 아닌 것 같기 때문이다. 어디서 왔을지 분명히 알 수 없는, 그러나 작가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생성되는 ‘그것’들이 폭발적으로 에너지를 키워 화면을 장악했고, 인간은 오히려 자그마한 오브제처럼 구석에 존재할 뿐이다. 상상에서 ‘환상’으로의 경계 혹은, 그 너머의 세계. 이번 작품이 시공간적 배경으로 삼고 있는 곳은 바로 그곳이다.
산수몽 91X73 장지에 아크릴 채색 2020
‘그곳’도 비현실적이며, ‘그것’들은 더욱 비현실적이다.
이쯤되면 자연스럽게 그가 표현하고자 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묻게 된다. 전통의 무늬옷을 살짝 걸쳤을 뿐, 그 실질적 정체는 작가 내면의 상상적 풍경화라 이를 법한 이번 <산수몽> 연작은, 약 500년 전 네델란드 화가였던 ‘히에로니무스 보쉬’(1450~1516)의 작품들과 그 시각적 체험의 질적 면에서 더 가깝게 느껴진다. 물론, 중세사람 답게 분명한 도덕적 메시지와 신념을 지니고서 인간, 동물, 식물들을 강박적으로 세밀하게 묘사한 보쉬의 작품은, 그의 의식이 표방했을 상징적 질서와는 너무도 다른, 표현적이고 초현실적인 시각적 체험을 안겨줌으로써, 무의식을 발명해 낸 근대성과 묘하게 연결되고 있다.
이번 <산수몽>에 등장하는 소재와 표현들 또한, 그 자체로 하나의 생태계를 연상케 할 뿐 아니라, 제시된 도상들이 갖는 양식적 특징과는 달리, 강박적이고 무의식적인 에너지를 강렬하게 전달한다. 형식과 내용의 어긋남, 표방하고 있는 언어적 질서와 느껴지는 화면 속 충동의 어긋남. 전통과 키치, 문인화와 장인정신, 동양과 서양....<산수몽>에는 이런 식의 충돌과 모순이 여러 갈래로 담겨 있다. 바로 이런 대목들이 이번 전시작품들을 보며 ‘혼종과 잡종’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이번 작품에 드리운 더러 마술적이고, 때로 분열적이고, 종종 강박적으로 느껴지는 이 에너지 혹은, 충동이, 어떤 조형적 분절과 통합의 과정을 거쳐 어디로 나아갈지 아직까진 아무도 모를 것이다.
산수몽 91X73 장지에 아크릴채색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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