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2021-04-01 ~ 2021-04-14
정일영
무료
02-379-4648
정일영 작가의 작품 안에서 풍경은 구체적인 형태나 형상보다는 굵은 붓질과 짧은 터치로 이루어진 화면의 움직임이 두드러지게 보여집니다. 그의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움직임과 흔들림은 선을 긋지 않고, 점을 찍는 듯 보이는 굵은 붓질의 반복에서 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선이 없이 붓질로 그리려는 것은 대상의 표면에 매물되지 않으려는 작가의 의도입니다. 작가는 대상의 이런 살아있음을 표현하기 위해 실제 대상보다 채도를 한 단계 올려서 사용하기도 합니다. 채도가 올라간 작품은 전체적으로 밝아지며, 화면 속 붓질의 흔적들은 생명력을 주장하며 일렁입니다. 하여 그의 작품 속의 대상들은 모두 균등하고 동일한 활력을 지니게 됩니다.
정일영 작가는 가장 전통적인 주제 중 하나인 ‘풍경’을 다루지만 그 ‘풍경’을 그대로 재현하지는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회화 속 색면으로 이루어진 붓질을 보고 인상파와 떠올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시시각각 변하는 빛과 시간을 기록함으로써 눈에 보이는 세계의 객관적인 재현을 도모’했다는 인상파에 대한 미술사의 정의를 상기한다면, 작가는 정반대의 접근을 취합니다. 빛과 같은 변화에 대한 관심보다 자신의 눈에 보이는 형태를 끊임없이 거부하면서 그 대상의 내면으로 들어가고자 애쓰기 때문에 객관적인 재현을 도모하는 인상파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작가에게 있어 그리려는 대상과 풍경을 한참씩 들여다보는 행위는 ‘보다’라기보다 ‘생각하다’라는 동사와 더 밀접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평범하지 않은 풍경>
몇 년 동안 일본 돗토리현의 이와미 마을에서, 철암역 옹벽에서, 그리고 여러 차례 단체전을 통해 정일영의 풍경화를 접한 적이 있다. 강렬한 원색으로 구성된 특유의 붓질은 주변(의 작품이나 환경)과 때로는 어우러졌지만, 종종 대적하기도 했다. 우연히도 그의 작업은 ‘길항拮抗’이라는 관점으로 먼저 인식되었던 것인데, 왜냐하면 나는 정일영의 작품을 총체적으로, 그러니까 한 곳에 모인 여러 작품들을 만날 기회를 번번이 놓쳐왔기 때문이었다. 개인전에 관한 글을 의뢰받고는 얼마간 머뭇거렸고, 양평 서후리의 작업실을 찾던 날엔 조금은 긴장했던 이유가 그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날, 작업실 한쪽 벽면에 가로 세로로 배치된 크고 작은 캔버스 앞에 서 있었던 행위를 한 단어로 옮겨 본다면 감상보다는 체험이 어울릴 법하다. 그렇다면 이 말은 작가 스스로 여러 번 언급한 생태신학적 관심, 혹은 ‘종교적 풍경화’의 시도가 성공했다는 의미일까? 답변을 잠시 유보하면서 먼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작업의 최종목표일 수 있는 영적인 느낌에 ‘이르는’ 과정에 대해서다.
작업실에서의 첫 느낌은 움직인다, 라는 것이었다. 움직임은 꽤 오래 지속되었으며 화면 속에는 분명 산도 나무도 집도 있었지만 그 형태들이 눈에 들어오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구체적인 형태나 형상보다 무수한 흔들림이 먼저였기 때문이다. 움직임과 흔들림은 선을 긋지 않고, 얼핏 점을 찍는 듯 보이는 굵은 붓질의 반복에서 연유한다. 붓질에서 그리려는 대상물의 표면에 매몰되지 않으려는 작가의 의도를 눈치 챘다면 그 의도란 선을 그어 형태가 결정되어 버리면 대상 속의 살아있음, 즉 움직임의 변화를 놓칠 수도 있다는 우려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이와 관련하여 정일영은 실제 대상보다 채도를 한 단계 올려서 쓴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여기에는 조형적인 고려보다 화면 속에 ‘살아있음’을 포착하고 싶은 심리적인 동기가 우선한다. 예컨대 노란색이 더 들어감으로써 그림은 전체적으로 밝아지며, 화면 속 붓질의 흔적들은 각각 자신의 생명력을 주장한다. 한편 붓의 흔적은 자신들이 가진 힘 때문에 서로 밖으로 밀어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그 결과 화면은 일렁이듯 움직인다. 주목할 점은 화면 속에 그려진 대상이 산이건, 집이건 돌이건 붓질 하나 하나는 모두 균등하고 동일한 활력을 지닌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제껏 단체전 속에서 다른 그림들과 나란히 놓임으로써 발생했다고 느꼈던 부딪힘과 길항은 실은 그림 내부에서 이미 준비되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정일영은 미술의 역사에서도 가장 전통적인 주제 중 하나인 ‘풍경’을 다루지만 재현의 문제에서는 멀찍이 떨어져 있다. 그는 작품이 그려진 저마다의 장소-이를테면 ‘집 앞의 겨울나무’, ‘여름에 그린 이웃집’ 등-에 대해 성실하게 설명해주었고 방금 전까지도 그곳에서 작업했는지 앞마당에는 이젤이 서 있었다. 이젤이 상징하는 사생의 전통과 그의 회화 속 유동하는 붓질(색점, 색면)을 통해 많은 이들은 인상파를 떠올릴 법도 하다. 그러나 ‘시시각각 변하는 빛과 시간을 기록함으로써 눈에 보이는 세계의 객관적인 재현을 도모’했다는 인상파에 대한 미술사의 정의를 상기한다면, 정일영은 정반대의 접근을 취한다. 빛과 같은 변화에 대한 관심보다 자신의 눈에 보이는 형태를 끊임없이 거부하면서 그 대상의 내면으로 들어가고자 애쓰기 때문이다. 정일영에게 그리려는 대상과 풍경을 한참씩 들여다보는 일은 그래서 ‘보다’라기보다 ‘생각하다’라는 동사와 더 밀접해 보인다.
인간과 사물도 모두 신성을 지니고 있다는 생태신학의 관심 속에서 풍경화를 그려온 작가는 분자도 생각을 한다는 현대물리학의 이론에 매료된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몇 년간 전시 제목으로 “생각하는 숲”을 택하기도 했으며, “풍경 속”을 알고 싶어 “나무에게 말을 걸”기도 했다. 자연의 대상을 구성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분자, 혹은 생명력을 찾기 위해 애쓰며 더듬어갔던 일관된 과정. 정일영이 그린 일련의 풍경화를 이렇게 파악할 수 있다면 이제 그 일관성을 풍경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이전의 작업으로까지 소급해 보면 어떨까. 이는 자칫 ‘평범한 풍경’으로 보일 수 있는 그림을 또 다른 방식으로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예컨대 두 번째 개인전(2003)에서 그는 “자신의 의식 속에 있는 심리적 공간”을 대상으로 삼았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불안과 긴장, 흥분, 갈등이 형상이 아니라 현상”으로서 뒤섞인 공간이다. 근작에서 작가가 산이나 나무를 바라보듯, 구체적인 형상이 없는 그런 공간을 바라보았던 셈이다. (전시 타이틀이 <응시>였던 점 역시 기억해둘만 하다). 심상과 풍경, 혹은 심상풍경. 따로 떨어져도, 짝을 이뤄도 무리 없는 두 대상은 정일영의 작업에서 추상과 구상이라는 형식을 통해 시차를 두고 전개되어 왔다. 하지만 과거의 추상 작업에서 현재의 풍경화로 이어지는 고리는 일렁이는 붓질에 있다. 추상이란 작가가 선, 면, 질감 등으로 자신의 조형 언어를 정립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본다면 붓질 하나하나는 작가의 사고가 추상화되어 중첩된 흔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요동치는 원색을 쏟아내어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우리에게 형태를 찾아내기를 재촉하듯 보였던 그의 풍경화에서는 정작 산과 바위, 나무의 모습은 중요하지 않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서후리의 평범한 풍경이 평범해지지 않는 순간은 그렇게 찾아온다.
그는 자신의 결과물을 두고 “눈으로 볼 수 없는 그 무엇이 과연 있는지”, 때로 자신뿐만 아니라 “남마저 속이는 것은 아닐지”라고 솔직하게 반문했다. 작업실에 들어갔을 때 처음 느꼈던 움직임은 일차적으로는 요동치는 색과 붓질이라는 순수한 시각 현상이 가져온 결과였다. 하지만 결국은 회화 속의 생각하는 분자, 그리고 작가는 항상 벅차고 힘들다고 했지만 끊임없는 질문으로 인해 더욱 강력하게 뒷받침되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는 것은 결국 움직이거나 흔들리는 것이기에.
정일영
Jeong il yeong
2020. 10.27 (Tue) ~ 11.8(Sun)
학력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서울대학교 대학원 서양화전공 수료
개인전 16회
2020 풍경의 깊이, 세종갤러리 서울
2018 보이지 않는 것, 길담서원 서울
2017 풍경의 감성, 봉산문화회관 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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