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서문
한 화가의 증언
블라디슬라브 스체파노비치는 파이터다, 복싱 경기장에서나 캔버스 위에서나. 이 거구의 예술가가 맞서 싸우는 대상은 다른 무엇보다도 자신의 그림자다. 그림자는 땅 위에 두 발을 딛고 선 자에게 하늘의 빛이 드리울 때 생겨나는 것이다. 몸을 지닌 자를 두고 대지와 세계 사이의 팽팽한 긴장이 벌어지는 순간, 대지의 끝 모를 심연이 비로소 가시화되는 존재론적 사건이 바로 그림자인 셈이다.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로서 화가는 순간순간 자세를 바꾸어 가며 어렴풋한 실루엣으로 드러났다 잡히지 않은 채 끊임없이 움직이는 그림자와 결투를 벌인다. 그가 명민하게 포착하려는 것은 이 대결을 통해 진실이 드러나는 찰나이다. 마치 예언자 엘리야가 목숨의 위협을 무릅쓰고 신탁을 전하듯, 스체파노비치는 캔버스 위로 가히 폭발적인 에너지를 쏟아내며 이 시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진실을 거침없이 증언한다.
소프트웨어 기업의 알고리즘에 잠식된 정신, 세계화된 자본주의의 탐욕스러운 질주, 도처에 난무하는 폭력과 전쟁. 오늘날 우리 일상을 지배하는 이러한 거대 구조는 스체파노비치의 화폭에서 팝 아트의 에토스로 해체되고 재구성된다. 익숙한 대중매체 속 이미지들이 펼쳐지는 가운데, 전장(戰場)과 시장(市場)에 내몰린 아이들의 처연한 눈빛은 여전히 순수하고, 쓰레기 더미가 나뒹구는 뉴욕의 번화가에도 성모자(聖母子)는 강림한다.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 번영과 파멸 – 얼핏 거리가 멀어 보이는 것들이 실은 서로 얽혀 하나의 별자리를 구성하고 있다는 진실을 화가는 드러내 보인다. 예술작품은 땅과 하늘, 필멸의 존재와 불멸의 존재를 한 자리에 불러들여 세계를 생성하는 진리 사건이라고 하이데거는 규정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스체파노비치는 이러한 예술의 본성이야말로 인류 문명의 마지막 수단이라 여기며 기꺼이 전사가 되어 악마의 놀음에 일격을 가한다.
블라디슬라브 스체파노비치, 너 자신을 접속시켜라, 2019, 캔버스에 유채, 50x90cm
블라디슬라브 스체파노비치, 아담과 이브, 2020, 캔버스에 유채, 180x180cm
블라디슬라브 스체파노비치, 악마의 사슬, 2017, 캔버스에 유채, 210x360cm(두폭화)
블라디슬라브 스체파노비치, 예언자 엘리야(자화상), 2018, 캔버스에 유채, 120x100cm
블라디슬라브 스체파노비치, 줄리언 어산지, 2020, 캔버스에 유채, 180x180c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