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국의 작품세계
생명의 아름다움에 순응하는 거인적인 산의 설화
신항섭(미술평론가)
화가의 창의적인 사고는 의식을 지배한다. 그러기에 평생 그림에만 몰두할 수 있는 것이리라. 창작활동에만 전념할 수 있다는 것은 의식의 집중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그 집중된 의식은 창작, 즉 새로운 조형세계를 구축하는데 소비된다. 하지만 전인미답의 새로운 조형세계는 어디에도 있고 동시에 어디에도 없다. 마치 오리무중과 같다. 손에 잡힐 듯싶으면서도 쉽사리 잡히지 않는 일종의 허상과 같은 것이다. 의식에 나타나는 듯싶다가 사라지곤 하는 그 허상을 움켜쥐어 시각적인 이미지로 변환하는 것이 다름 아닌 신현국의 작업방식이다.
신현국은 1960년대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비구상작업으로 작가적인 입지를 다졌다. 1960년대라면 대학졸업 직후인데, 당시 한국화단에는 추상미술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던 때였다. 화가로서의 첫걸음을 시작하는 단계에서, 당시로서는 전위미술이라고 할 수 있는 비구상 세계에 뛰어들었다는 것은 진취적이고 창의적인 의식의 소유자가 아니고는 안 될 일이다. 비구상 작품으로만 10여회에 이르는 개인전 경력이 말해주듯이 실험적이며 창의적인 작가로서의 면모를 살피는데 어려움이 없다. 다시 말해 시대를 앞서 가는 작가로서의 의식세계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당시의 비구상 작업은 그 자신의 체험적인 삶과 깊은 연관성을 가진다. 시골에서 태어나 농업고등학교를 다녔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자연과 고향풍정은 예술가로서 성장할 수 있는 비옥한 정서적인 토양이었다. 바꾸어 말해 예술가적인 의식 및 감정은 다름 아닌 대자연에 뿌리를 두고 있다. 비록 구체적인 형상이 드러나지 않는 비구상작업일 경우에도 막연한 것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지 고향과 관련한 그 자신의 체험적인 삶과 연관성을 가진다.
가령 당시 작업 가운데 비록 구체적인 형태가 드러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마당이나 사립문 등 고향풍경을 연상시키는 이미지가 존재했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무의식의 세계 또는 우연적인 표현이 아니라, 내안에 존재하는 추억의 단편들이 비구상적인 이미지로 현현하는 식이었다. 그와 같은 비구상적인 이미지는 의식의 창에 비친 비현실적인 존재의 그림자인 것이다. 현실에 근거하면서도 그 실체를 명료하게 드러내지 않는 가운데 거기로부터 발원하는 불명확한 존재성이야말로 그의 비구상 세계가 추구하는 이상경이었다.
비록 형태는 보이지 않을지언정 그로부터는 서정적인 분위기 느껴질 정도였다. 구체적인 형상이 존재하지 않는 미묘한 시각적인 이미지는 서정시와 마주하고 있는 듯싶은 감정을 유도한다. 손에 잡힐 듯이 잡히지 않는 모호함이 지배하는 비구상의 세계는 그로부터 유추되는 어떤 종류의 상상도 수용하게 마련이다. 그의 미적 감수성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를 추측케 하는 부분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고향풍경이고, 고향의 정서이다.
이렇듯이 초기의 비구상 작업을 통해 익힌 조형감각은 구상으로 전환한 이후에도 작품세계 전반을 지배하게 된다. 계룡산 자락에 화실을 마련한 이후 그의 작품세계는 보다 현실적인 감각을 수용하게 된다. 머리에 치받치는 장중한 계룡산의 위용을 보면서 그 품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커다란 위안을 느끼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시골에서 태어나 성장하면서 자연에 대한 실질적인 체험 및 이해를 통해 그 정서를 온몸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를 토대로 양육된 그의 미적 감수성은 필시 그 언저리에 머물게 되어있다.
추상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는 상황에서도 거기에 기울지 않고 비구상적인 이미지로 일관할 수 있었던 것도 일상적으로 산과 마주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자연미라는 하나의 단어로 함축되는 고향풍경 및 그 정서야말로 그의 작품세계 전반을 관통하는 미의식의 뿌리인 셈이다. 그의 내면에 각인된 자연, 고향풍정, 고향의 정서는 어느 순간 어떤 상황에서도 미의식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다. 계룡산을 대상으로 하는 작품 전반에 흐르는 정서는 이에 연원한다.
여기에다 한 가지 더 덧붙인다면 사색과 사유라는 방식으로 나타나는 경험철학이다. 그 자신이 보고 느끼는 실체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통해 자연을 관찰하고 응시하며 관조하는 방식으로 미의식의 깊이와 외연을 넓히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의식의 심화과정을 거치면서 그는 작품에 보이는 것 그 이상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계룡산을 대상으로 하는 일련의 작품들 대다수는 구체적인 형상을 포기한다. 이처럼 형체를 명확히 구분하기 어려운 모호한 표현으로 일관할 수 있었던 것은 내면적인 공간 확장에 더 큰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작품의 전체상으로는 산이라는 거대한 존재를 감지하기 어렵지 않다. 부분을 생략하면서 전체를 하나의 관점으로 통일하는 표현방식이다. 산이 내포하고 있는 무수한 존재, 그 물상을 압축하고 함축하여 산이라는 통합된 존재에 귀속시키는 것이다. 그 실체가 보이지 않을 뿐 산을 형성하고 있는 수많은 생명체는 거기에 엄연히 존재한다. 그 생명체들이 산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형상 속에 은닉되는 셈이다.
그러기에 그의 작품에 대한 이해 및 공감은 시각적인 접근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어느 면에서 시각적인 이해로는 단지 모호한 산의 이미지만을 볼 수 있을 뿐, 산의 이미지에 귀속된 생명체의 존재를 간과하기 십상이다. 그의 작업은 눈에 보이는 실체에 대한 검증이나 찬미가 아니다. 그가 일상적으로 보고 느끼는 산에 대한 미적 감흥조차도 절제되거나 안으로 응축시킬 따름이다. 그가 제시하는 흐릿하거나 명확치 않은 산의 이미지에서는 시각적인 즐거움을 얻기가 쉽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높은 미적 안목에 의해서나 심미안으로 접근할 경우 모호한 이미지를 통해 탐미적인 즐거움과 만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지극히 절제된 색채이미지로 일관한 작업이 있는가 하면, 원색적인 색채이미지를 거침없이 구사하는 작업도 있다. 절제된 색채이미지를 특징으로 하는 작업은 시각적인 즐거움을 반감시킨다. 가령 무채색 계열의 색채이미지가 전체를 장악하는 가운데 여타 유채색이 밑으로 가라앉는 형국의 작품이 이에 해당한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후반에 이르는 기간에 제작된 대작 대다수는 이와 같은 색채이미지 기법을 공유한다.
이 시기에는 거의 단색조에 가까운 작품도 있는데 이는 초기 비구상 작업과의 혈연적인 관계를 드러낸다. 무채색으로 일관했던 초기 비구상 작업에 대한 반추인지, 아니면 무의식적인 흐름의 결과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절제된 색채이미지는 감정의 침잠에 따른 표현이라고 설명될 수 있을 뿐이다. 단색에 가까운 색채이미지는 의식적으로 억제되는 감정의 증표일 수 있다. 지적인 제어에 순응하는 감정이 마치 안개처럼 부유하는 절제된 색채이미지로 현현하는 것인지 모른다.
구체적인 형태는 물론이려니와 색채조차 억제되는 상황은 심화되는 사색, 미의식의 침잠, 감정의 절제를 유추할 수 있다. 이는 자신의 사상 및 철학에 대한 확고한 신념의 결과일 수 있다. 회화가 시각예술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할 때 그 의도가 더욱 명료하게 드러난다. 시각적인 이해의 단초를 제공하는데 인색하다는 것은 거꾸로 자신의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누군가를 확신한다는 사실에 다름 아니다. 바꾸어 말해 눈에 보이는 이미지를 포기하는 대신에 그 자신의 회화적인 사상 및 철학을 응축시킴으로써 감상자의 시선이 내면으로 향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리라.
비구상작업은 그 어떤 형상을 유추할 수 있는 실마리조차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순수추상이라고 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이다. 그럼에도 비구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작품의 명제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순수추상은 어떤 특정의 대상이나 소재 그리고 자연현상과 같은 실재하거나 시각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사실과는 다른 무의식이나 감정의 표출이라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물론 추상작업의 경우에도 실상을 근거로 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수추상은 그 어떤 형상으로도 역추적할 수 없다. 애초에 형상에 대한 명확한 인식의 열망이 없는 까닭이다. 반면에 비구상은 실재라는 어떤 사실이나 존재에 대한 인식이나 성찰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반에 이르는 동안에 제작된 일련의 ‘빛이 있는 자연’이라는 명제의 작품은 계룡산을 중심으로 한 자연에 대한 인상을 표현하고 있다. 이 기간에 제작된 작품은 시각적인 이해로는 비구상이라기보다는 순수추상에 근접한다. 그런데도 비구상으로 분류하는 이유는 자연에 대한 인상이라는 보다 구체적인 인식을 기초로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로써 짐작할 수 있듯이 그의 작품세계는 언제나 실재하는 실상에 대한 이해 및 인식에 근거한다. 그러기에 그 어떤 형상을 읽을 수 없는 작품에서도 비구상으로서의 향기가 풍기는 것이 아닐까.
그의 작품 가운데 ‘해돋이’ ‘적송’ ‘꽃’ 등 일련의 명제를 가진 작품들은 구체적인 대상 및 소재를 적시한다. 실재하는 물상이나 자연현상을 대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작품은 당연히 형태가 드러난다. 헌데도 그 형태를 표현하는데 지극히 소극적이다. 거칠고 힘차며 둔중하게 던져지는 붓의 움직임 가운데 한 부분으로서 슬며시 형태를 드러내고 있을 따름이다. 작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는 형태에 대한 의지가 전혀 없는 듯싶다가 작업을 마무리하는 순간에 한 두 번의 붓질로 형상을 던져놓는다.
이를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그의 작업방식은 언제나 심상의 흐름과 그 흐름에 격하게 반응하는 붓질로 시종한다. 형태에 대한 의지가 약하다고 해서 무의식이나 감정의 표출, 또는 우연적인 표현에 의탁하는 추상적인 표현방식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작업은 실제에 근거하여 그로부터 발단하는 심상의 표현을 중시한다. 비구상작업 자체가 이와 같은 심적인 과정을 통해 전개된다. 따라서 작업하는 순간에는 형태에 대한 의지가 미약할지라도 최종적으로는 심상이 지시하는 이미지로 마무리되는 것이다.
‘빛이 있는 자연’과 ‘산의 울림’ ‘빛이 있는 자연의 소리’라는 명제를 가진 일련의 작품들은 모두 심상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이라는 현실적인 인식의 대상을 통해 이루어지는 까닭이기에 그렇다. 여기에서 ‘산의 울림’ 연작은 산이라는 대상을 구체적으로 명시한다. ‘울림’이라는 단어가 암시하고 있듯이 산의 외형이 아니라 거대한 생명체로서의 산이 들려주는 소리, 즉 내적인 언어를 표현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다. 뿐만 아니라 ‘빛이 있는 자연의 소리’ 역시 빛을 통해 깨어나는 생명의 기운을 표현하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빛은 세상의 모든 생명체의 존재를 밝혀준다. 빛으로부터 생명이 시원하고 빛에 의해 세상이 어둠으로부터 깨어난다는 진리를 작품의 사상 및 철학적인 근간으로 삼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렇듯이 그가 구상작업에서조차 형태를 드러내는데 인색한 것은 보이는 사실의 재현과는 다른 길을 가고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보고 있는 자연풍경 또는 산의 모습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온갖 생명체를 품안에 안고 있는 생명의 숲으로서의 거대한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산을 대상으로 하는 작품은 어쩌면 거인과 같은 존재성을 의식하도록 하려는지 모른다. 시각 및 감정을 압박하는 거대한 존재로서의 거인은 불가침이다. 그러나 그 거인에게도 소인을 품에 안는 따스한 혈류가 있다.
그가 거인적인 이미지의 산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생명체를 보듬는 생명의 기운이야말로 아름다움의 진면목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제시하는 아름다움이란 바로 생의 기운이다. 산 속에 깃들인 생의 기운을 격렬히 표현함으로써 미의 본질에 직입하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생명체의 터전으로서의 산의 이미지를 거인과 같은 결코 허물 수 없는 거대한 존재감으로 귀결시킴으로써 심미적인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그 자신의 작품세계를 완결시키고자 한다. 그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