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정보
채우승 환멸(幻滅) 스페이스 깨 서울시 종로구 체부동 134
1부 보일 부(㕊) 2021. 12. 01 – 12. 15
2부 깃들일 서(栖) 2021. 12. 20 – 12. 31
3부 머무를 정(停) 2022. 01. 05 – 01. 19
회화와 조각, 평면과 부조, 입체와 공간 설치 등을 넘나들며 작업하는 채우승이 2021년 연말 스페이스 깨에서 ‘환멸(幻滅)’ 3부작의 개인전을 연다. 지난 30여 년 왕성하게 활동해온 채우승이 육십갑자를 마무리하는 시점에 여는 이 개인전은 작가가 그간 서울과 전주, 밀라노, 베이징, 타이난 등 여러 도시, 여러 장소에서,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만들고, 종이를 자르고 붙이며, 공간에 개입하고, 설치물로 협업하면서 펼친 자신의 조형 활동을 스스로 정리하여 반추하는 회고전의 성격을 띤다.
‘보일 부(㕊)’ 1부는 화려한 원색의 평면 회화 연작이다. 채우승의 작업에 자주 등장하는 커튼 자락 같은 화면 구성에 화려한 원색으로 채색하고 연필로 그러데이션의 음영을 가했다. 부처님의 가사(袈裟), 불단의 휘장, 여신의 드레이퍼리, 혹은 창문의 커튼을 닮은 이 화면에 채우승은 화려한 원색을 채색하여 ‘단청(丹靑)’이라 이름 붙였다. 색채로 형태를 드러내는 방법인데, 전통 사찰이나 왕궁의 단청은 이례적으로 화려한 원색을 사용하여 깨달은 자, 지체 높은 분을 모신 전각을 특별히 장엄하는 양식이다. 지존에게만 허락된 단청은 목조 건축의 표면 에 매끈하게 밀착되어 화려한 색채로서 그곳이 범상치 않은 곳임을 표시하지만, 커튼 자락 같은 채우승의 화면 위로 옮겨 오면서 가볍게 들추고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빈 공간으로 바뀐다. 채우승은 ‘단청’ 연작에서 전통 단청보다 화려하고 다채로운 원색을 사용하는데, 선명한 색채의 대비로 그림의 표면을 확인하는 동시에 그 위에 연필의 음영을 가하여 견고한 볼륨을 빈 공동(空洞)으로 바꾸고 가볍게 흩날리는 옷자락, 혹은 얕은 피부 밑의 유기적인 질감으로 역전시킨다. 또는 때에 따라 견고한 각면체가 부가된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채우승의 색채 탐구는 화면 위에 화려한 색으로 형(形)을 만들되, 그 색채가 왕궁이나 사찰의 단청에서 보는 것처럼 보이는 그대로가 아님을 연속적으로 반전되는 형태의 일루전으로 환기시킨다.
‘깃들일 서(栖)’ 2부는 빛과 그림자에 대한 탐구다. 일상 중에 매일 마주하는 빛과 그림자는 잠시 깃들어 있다가 사라지는 것으로 그리거나 만질 수 없는 것이다. 빛과 그림자는 쌍을 이루어 성립하는 것인데, 채우승은 그 빛과 그림자를 분리하여, 빛을 색으로 그리고 그림자를 형으로 만들고자 한다. 흔히 빛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그림자는 빛이 있어 존재하는데, 그림자를 떼어낸 빛을 포착하기 위해 채우승은 반투명 염색 한지를 사용했다. 두세 겹으로 중첩된 반투명의 염색 한지는 그림자가 있어 확인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닌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빛 그 자체로 형상화되고, 빛이 있어 드리워지는 부차적인 존재였던 그림자는 한지 위에 수지를 입힌 부조의 입체물로 형상화되었다. 빛을 그리고 그림자를 만지겠다는 작가의 생각은 염색 한지를 중첩시킨 콜라주와 수지를 입혀 3차원의 부피를 가진 한지의 입체물로 완성되어 작고 아담한 스페이스 깨의 전시 공간에 설치되어 서로를 반향하게 될 것이다.
‘머무를 정(停)’ 3부는 나무와 막대기, 그리고 그것의 재현과 일루전에 대한 이야기다. 2012년 청주 스페이스몸미술관의 제2관 전시장 중앙 기둥에 절묘하게 질러 놓아 공간을 팽팽하게 긴장시켰던 4개의 막대기는 생 나무의 가지를 꺾어 만든 것으로 채우승의 공간 설치와 평면 작업에 자주 등장한다. 나무였다가 막대가 되어 잠시 머물렀다 간 그것은 무엇인지를 묻는다. 나무는 막대가 되어 전시장의 공간을 새롭게 둘러보게 했으나, 그 막대까지 사라지면 남는 것은, 그림 위의 상(像)이 아닌가. 채우승은 화면 위의 색띠와 그것을 반향하는 흐릿한 연필 드로잉으로 머물다 사라진 막대와 그것의 일루전을 되뇌인다. 평면 상의 원색 대비로 확인한 형태는 종이 콜라주와 부조의 설치를 거쳐 입체와 공간 설치의 일루전으로 다시 돌아왔다. 선명한 채색으로 표면을 다짐하듯 확인하지만 음영의 그러데이션을 넣으면서 견고한 표면이 빈 공간으로 뒤바뀌기도 하고, 가촉적 실체를 갖지 않는 빛은 색의 중첩으로 가시화되며 그림자는 수지를 입힌 한지의 부조로 삼차원의 형태를 얻는다. 공간을 가로지르던 막대는 허상의 그림자를 드리운 직선의 일루전으로 화면 위에 부활한다.
보이는 것, 붙잡을 수 있는 것, 그릴 수 있는 것을 탐구하는 채우승의 부(㕊), 서(栖), 정(停) 3부작은 윤회의 고리처럼 맞물려 회전하는데, 오랫동안 여러 매체와 방법으로 평면과 공간을 탐구하면서 기존에 가지고 있던 기대나 생각이 깨지는 환멸(幻滅)을 경험한 작가 자신의 여정을 반추하는 것 같다. 동음이의의 언어유희로 우리의 개념과 통념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도 즐겼던 채우승의 이력을 돌이켜본다면, ‘환멸’의 또 다른 뜻으로 번뇌를 끊고 깨달음의 세계로 돌아간다는 ‘환멸(還滅)’이 있음을 지적할 수 있겠다. 오랜 채우승의 조형 여정이 환멸(幻滅)을 거쳐 환멸(還滅)로 가는 것은 아닌지.
2020년 임종은은 채우승에 대한 논평에서 그의 작업을 ‘문화적 혼성’과 ‘성속 일체’로 요약했다. 작가는 한국에서 조각을 전공하고 밀라노에 유학했던 경험과 한국의 전통적 정서가 강한 전주에서 생활하며 베이징, 타이난 등 해외 레지던시로 체험한 이국적 정서도 기묘하게 소화시켜내는 데 능하다. 불교와 무속의 제의적 요소가 돋보이는가 하면 고전적 형태와 인체미도 스스럼없이 만들어낸다. 구상적 형태를 공들여 매만지는가 하면 사정없이 절단하여 의외의 위치에 접합하는데, 돌연한 그 결합이 그다지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다. 성스러운 신상 혹은 깨달은 자의 서기 어린 옷자락이 연상되는가 하면 관능적인 자웅동체의 신체가 화사하게 등장하기도 한다. 불상이 있어야 할 자리는 비었고, 장대한 대좌만 덩그러니 보여주기도 한다. 살아있는 옷자락 같은 천이 벽을 타고 흐르면서 벽 뒤로 사라진 존재를 일깨우기도 하고, 긴 나뭇가지를 공간에 질러 놓아 방 전체를 새삼스럽게 돌아보게 한다. 평면에 염색한 한지를 겹쳐 놓아 얕은 콜라주 부조를 만들기도 하고, 입체의 옷자락을 평면에 옮겨 선명한 색채로 메워 나가면서 입체와 평면의 경계를 두 번 세 번 뒤집기도 한다. 있음으로 없음이 환기되고, 빈 옷자락으로 사라진 몸체가 암시되며, 성스러움으로 지극히 속된 관능성을 불러일으킨다. 관음(觀音) 보살이 관음(觀淫)을 유발하고, 영성과 육감이 혼음(混音)하며, 깨달은 자의 성스러운 몸이 관능미 넘치는 육감의 몸과 일체를 이룬다. 기하학적 각면체는 제단에 진설한 제물이면서 유희의 놀이 도구 같기도 하다.
꼬리를 물고 연속적으로 전개되는 채우승의 작업은 사물과 공간, 이쪽과 저쪽, 성과 속, 있음과 없음, 평범한 일상과 제의적 초월이 미묘하게 중첩되는 순간을 포착하는데, 한편으로 더없이 맑고 투명한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불온하게 도발적이기도 하다. 회화와 종이, 부조, 조각, 설치로 문화적 혼성을 감행하는 채우승의 작업은 여러 경계 ‘사이’를 유연하게 또는 허허롭게 넘나들며 제3의 혼성 공간을 펼쳐 놓는데, 무엇보다 작가는 예쁘게 그리고, 곱게 잘라 붙이고, 매끈하게 다듬어 놓는 고운 손길의 감각적 쾌락으로 그것을 실현시킨다.
권영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