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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전된 시간들, 여과된 감정들
“마음이란게 한잔의 유리컵 안에 담겨진 흙탕물 같았다. 휘휘 저어대면 그렇게 탁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가만히 기다리며 가라앉히면 맑은 물이 올라오듯이, 마음은 차분해졌다. 평온하든, 휘몰아치든, 물끄러미 들여다보다 침전된 감정들을 그려내었다. 이미 쌓여진 감정들을 담기도 했지만, 여전히 휘몰아치는 중에 작업이 진행되면서 점차 침전되어지기도 했다. 휘저었다 가라앉혔다를 반복하는 미련한 시간들은 흔적도 없이 흘러갈 것 같았지만, 희미한 잔상 속에도 한 줄기 빛은 새어 나오고 쌓여진 꿈들은 보잘 것 없는 그림이 되었다.”
침전된 시간들과 여과된 감정들을 무수히 선을 그어 완성하는 작업과정은, 삶의 순간들의 기록인 동시에 치유의 시간이다. 한지 위에 붓으로 세밀한 먹선을 그어나가다 보면, 가지가 되고 나무가 되고 숲이 되어, 서로 연결되어 관계를 이루고 있다. 흰 종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스케치 없이 무수한 선들을 그려가면서 마음의 모양은 그림으로 남겨진다.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 보고 도닥여가며 그리다보면 마음은 조금씩 비워지고, 작품에는 셀 수 없는 시간들과 헤아릴 수 없는 감정들이 스며든다.
작품 속 패턴들은 나무는 하나의 존재를, 나무가 숲을 이루는 형상은 공존과 조화를 상징하여 만들어졌다. 오랜 시간에 걸쳐 패턴들은 점차 단순화되었고, 나무의 형상 보다는 감정의 본질을 중요시하면서 보다 추상적인 표현이 가능해졌다. 패턴을 쌓고 겹치면서 차분하고 고요한 분위기를 만들기도 하고, 혹은 부유하게 하여 운동감 있는 형상으로도 표현하면서 감각적인 구성들을 시도하고 있다. 한지에 먹이라는 재료를 바탕으로 개념적이고 추상적인 작품들을 시도하고 있으며, 한지의 질감과 은은한 담묵, 세밀한 먹선을 어우러지게하여 명상적이고 수행적이면서 서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자 하였다.
보고 듣고 느낀 지극히 개인적인 삶의 순간들을 기록하듯 그린 작업들은, 각 그림마다 이야기가 담겨 있고, 한편의 연주곡을 쓰듯이 시를 쓰듯이 완성되었다. 세심히 관찰하고 시어를 발견하고, 표현하고 변주하고 가다듬으며 절제된 표현들은 한편의 추상화가 되었다. 감각의 기억들을 담아낸 그림들이 보는 이들에게 무엇으로 연상되든 작은 공감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 부족함 투성이지만 진심 어린 작업들이 나를 치유해주듯이, 작은 울림으로 전해져 작품을 마주하는 잠시 동안이 짧은 산책과 같은 휴식이 되고, 치유의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래본다. 그림 가운데 소명이 있기를…
“맑고 가는 선들을 수없이 그어가며 헤아릴 수 없는 시간들을 보낸다. 마음의 결을 느끼며 그려낸다. 순간을 기록이라도 하듯이 들여다보고 생각해보고 호흡한다. 빛나지 않았던 순간이 있을까. 쌓이고 차오르고 부서지고 빛난다.“
_ 구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