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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선주 : Dearest Yoric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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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선주 개인전

'친애하는 요릭에게 Dearest Yoricke'


2022. 7. 20 - 7. 31

KT&G 상상마당 춘천

아트갤러리 1, 2


이 전시는 강원도, 강원문화재단의 후원과 KT&G 상상마당 춘천의 협력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친애하는 요릭, 올바른 삶이란 없는 것 같아. 그저 삶이란, 하필 내게 주어진 조건들을 나만의 방식으로 겪어내고 저물어가는 것 뿐. 그런데 여기서 ‘나만의 방식’이 중요해. 그 누구의 것이 아닌, 나로서의 것 말야.' 


- 2장 새벽의 서신(lettre de l’aube) 중 일부 발췌.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처한 지옥이 있다. 그것은 물리적일 수도 있고 정신적일 수도 있으며 구차하리만큼 치졸한 현실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 나는 우리가 처한 조건과 상황들을 통례적 방식이 아니라 각자의 방식으로 해결해 나갈 때 비로소 ‘나다운 창조적 서사’가 시작된다고 보았다. 때문에 나는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방식으로, 가장 좋아하는 방법으로 내 자신을 구원하는 작업을 시도했다. 


생명의 유한성, 유한의 슬픔이라는 테마 아래 기획한 이번 전시는 죽음[요릭]과의 서신을 통해 밝혀지는 ‘삶이라는 진리’에 관한 이야기다. 전시는 문학적 상상력 속에서 오브제와 회화작품의 병치로 연출되며, 1장 밤의 서신(lettre de la nuit)과 2장 새벽의 서신(lettre de l’aube)으로 나뉘어 각각 아트갤러리 1과 아트갤러리 2에서 진행된다.


요릭은 셰익스피어의 작품 <햄릿> 등장하는 죽은 광대의 이름이다. 나는죽음 의인화하여요릭이란 이름을 붙이고 죽음과 서간문을 주고받는 형식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편지의 형식은 글이 되기도 하고, 음악과 , 때론 우연히 발견하게 자연의 파편이 되기도 한다. 또한 다양한 매체로 표현한 작품들의 제목과 기표를 통해 숨겨진 내용을 연상하고, 해석할 있는 단서를 제공하기도 한다. 요릭과 대화를 나누는 화자는오필리어 라는 욕조에 사는, 바깥 세계와 분명하게 구분된 자신만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는 세상이라는 물위에서 삶에 대한 사색과 미지에 대한 상상을 통해 유한한 인생의 구원과 감추어진 진리의 신비를 발견해가는 여정을 보여준다. ■ 한선주



한선주_오필리어의 죽음 The death of Ophilia_ 

Acrylic and pastel on Korean paper_194x130cm_2022 


요릭과 오필리어, 삶을 정화하는 죽음 (고충환, 미술평론) 

● 미슈테카의 노래. 고도를 기다리며. 친애하는 요릭에게. 먼지로 쓴 시. 작가가 제안하는 이야기 4부작이다. 죽음에 대한 알레고리다. 삶에 대한 알레고리라고 해도 좋다. 삶과 죽음의 관계에 대한 알레고리라고 해도 좋다. 죽음이 열어 놓은 삶, 그러므로 죽음으로 거듭난 삶의 알레고리라고 해도 좋다. 삶이 죽음이고 죽음이 삶일 것이므로. 삶 속에 죽음이 있고 죽음 속에 삶이 있을 것이므로. 매 순간 삶을 살면서 죽음을 생각하는, 시시각각 삶 속에 죽음을 맞아들이는, 그렇게 삶과 죽음이 하나로 직조된 것이 삶일 것이므로. ●  삶을 정화하는 죽음에 대해서는 프로이트 이전에 낭만주의가 먼저다. 특히 밤을 찬미하고 죽음을 예찬한 노발리스가 원천이다. 처음으로 여성 저승사자가 등장하는, 죽음이 저토록 감미롭다면 기꺼이 죽을 수도 있겠다 싶은, 지상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을 내세에 기약하는, 묘지와 폐허에 매료된, 유한에서 무한을 본 낭만주의에서 삶은 다만 죽음과 죽음 이후에 대한 상징으로서만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낭만주의의 누이인 상징주의와 라파엘전파(존 에버렛 밀레이의 오필리어의 죽음)에서 죽음을 향한 낭만주의의 연모가 그 진정한 실현을 얻는다. 하나같이 문학적인, 문학적인 서사가 강한, 문학과 미술이 자매라고 해도 좋을 시기며 형식들이다. 그리고 여기에 삶보다 예술이 먼저인, 예술이 삶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예술을 모방하는 예술지상주의와 그 추종자인 댄디즘(오스카 와일드와 보들레르)이 가세하면서 죽음이 그 미학적 의미를 덧입는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시, 최초 작가가 제안한 주제로 돌아가 보자. 작가는 상실을 슬퍼한다(미슈테카의 노래). 그리고 누군가가 상실에 빠진 자기를 건져주기를, 혹은 상실이 가만히 떠나가 주기를 기다리지만, 상실은 그대로 있다(고도를 기다리며). 그리고 마침내 상실과 화해하고, 상실을 자신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인다(친애하는 요릭에게). 그리고 종래에는 주검의 재를 바람에 실려 보내듯 상실을 시로 승화시켜 떠나보낸다(먼지로 쓴 시). 어느 날 상실이 자기를 찾아왔고, 머물다가, 가버린 이야기, 그러므로 상실의 연대긴가. 상실을 아파하고, 상실과 친해지고, 마침내 상실을 떠나보낸 이야기, 그러므로 통과의례 혹은 성장 서사(모든 이야기가 유래한 이야기, 이야기들의 이야기, 그러므로 원형적 이야기)인가. 옴니버스, 그러므로 상실을 주제로 한, 서로 별개이면서 하나로 연결된 4개의 단편인가. 여기서 상실은 무슨 의미인가. 작가는 무엇을 상실했고, 왜 슬퍼하는가. 


● 작가는 극 중 햄릿처럼 요릭, 그러므로 죽음이 가져다준 상실을 슬퍼한다. 상실을 슬퍼하는 것도 같고, 외관상 보기에 상실에서 빠져나온 연후에도 슬픔이 여전한 것도 같다. 상실로 우울해하는 것도 같고, 상실을 시로 승화시킨(그러므로 떠나보낸) 연후에도 여전히 상실을 애도하는 것도 같다. 우울도 슬픔이고, 애도도 슬픔이다. 슬픔도 슬픔이고, 시로 승화된 슬픔, 그러므로 떠나보낸 슬픔도 슬픔이다. 아마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슬픔이 주는 정화, 비극을 통한 정화)와도, 그리고 밀란 쿤데라의 비극(현대인의 삶이 비극적인 것은 현대인이 비극을 상실했다는 것에 있다)과도 무관하지 않은 지경이고 감정일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슬픔에서 빠져나온 연후에도 여전히 슬픔(작가의 표현대로라면 맑은 슬픔) 속에 있었다. 



한선주_밝은 밤 The bright night_Coloured on Korean paper_130x193cm_2021



문학적인 서사가 강한 작업인 만큼 작가의 그림에는 이런저런 상징들이 등장한다. 그중 전형적인 그리고 결정적인 경우로 치자면 종이로 만든 집(먼지로 쓴 시), 그리고 해골과 욕조(친애하는 요릭에게)가 주목된다. ● 그렇게 작가는 죽음을 호출하는데, 요릭을 호출하고 오필리어를 호출한다. 두 죽음의 상징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인데, 실제 그림에서 요릭은 해골로, 그리고 오필리어는 욕조로 대체된다. 여기서 욕조는 종이집처럼 또 다른 자기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죽은 자기? 죽음을 쳐다보는 자기? 그런데, 왜 욕조인가. 주지하다시피 욕조는 가장 사적인 공간이며 장소고 사물이다. 그리고 욕조는, 더욱이 작가의 그림에서처럼 물 위에 떠가는 욕조는 마치 요람을 흔드는 바람처럼 유년의 추억을 떠올리게 했을 것이다. 그렇게 또 다른 사물주어 혹은 사물 인격체로 나타난 욕조, 그러므로 자기 분신이 강을 건너는 일련의 풍경화를 그려놓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삶이라는 강일 것이다. 그리고 건너편에 또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죽음이라는 강일 것이다. 그렇게 나룻배와 함께 이미 강물에 몸을 실은 한 사람이 뭍에 서 있는 다른 한 사람에게 안녕 인사를 고한다. 내가 나에게 인사를 고한다. 삶이 죽음에게, 죽음이 삶에게 인사를 건넨다. 


예술에 대한 정의가 분분하지만, 그중 결정적인 경우로 치자면 예술은 이야기의 기술일 수 있다. 삶을 이야기하고, 죽음을 이야기하고, 재생을 이야기하고, 환생을 이야기하는 기술이다. 그 이야기들의 와중에서 통과의례가 나오고, 정화의식이 유래하며, 거듭나기가 파생된다. 그 경우와 세목은 다 다르지만, 결국 존재에 대한 이야기, 그러므로 존재론적 서사라는 원천으로 모인다. 존재론적 서사? 이데올로기와 함께 전형적인 거대 담론이다. 

혹자는 거대 담론의 시대는 갔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시대착오적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삶을 이야기하지 않는 삶이, 죽음을 사유하지 않는 삶이, 재생과 환생이 없는 삶이, 원형과 자기를 모르는 삶이 가능한가. 최소한 유의미한가. 그런 없이도 가능하고 유의미한 삶도 있겠지만, 그런 것으로 인해 삶은 비로소 가능하고 유의미해진다는 점도 거부할 없는 현실이다. 그렇게 상실과 죽음, 그리고 자기 구원을 주제로 작가의 그림은, 그러므로 기획은 사사로운, 너무나 사사로운 미시 서사의 시대에 오히려 울림이 크게 다가온다. ■고충환(미술평론)



한선주_The way life goes_Gouache and acrylic on Korean paper_1052x130cm_2022_부분 



한선주_The way life goes_Gouache and acrylic on Korean paper_1052x130cm_2022 




한선주_친애하는 요릭에게 Dearest Yoricke_Acrylic on canvas_363x227cm_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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