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2022-07-14 ~ 2022-07-24
오예진
무료
041-852-6038
‘탈’지구인 오예진의 ‘우주’혁명기
- 《돌보는 감정》 출품작을 중심으로
우리원(대전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지구인 오예진
“안녕하세요. 우주와 탈을 그리는 27살 작가 오예진입니다”
무더위 때문에, 코로나 때문에, 책상 위에 쌓인 업무들과 그 밖에 또 다른 몇몇 일들 때문에 한 시간 남짓 거리에 사는 작가에게 서면인터뷰를 요청했다. 자정 즈음에 도착한 이메일을 열어보니 오예진은 스스로를 ‘27살 작가’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N잡 시대’ 흐름에 따라 작업실 겸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알고 있지만 생경한 표현이다. 삼십대 후반인 나는 안정된 삶을 보장 받을 수 있는 하나의 직업/직장을 목표로 살고 있다. 오예진과 나는 다른 지구에 살고 있는 것일까? 지구에 사는 대부분의 우리는 꿈을 위해 사는 것이 어렵다. 우주여행만큼이나 아득한 것이다. 담배 종이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 더 이상 작가정신이 아닌 시대에 창작이란 끝이 보이지 않는 미지의 세계와 끊임없이 조우하며 반성과 물음을 반복하는 수행과도 같다. 지구인 오예진은 그 수행을 계속하기 위해서 여러 개의 탈을 번갈아 쓰며 탐험한다. 그가 주로 영감을 얻는다는 SF소설 속 주인공처럼 말이다.
탈과 우주
이번 전시에서 오예진은 기존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확장, 변이된 방식의 작품들을 선보인다. ‘탈’과 ‘우주’는 작가의 오랜 소재이자 메타포인데 각각 동시대인의 초상이자 보호막, 모든 생명체가 공존하는 이상적 공간을 의미한다. 탈(mask)은 미술사에서 종종 다뤄지는 소재이며 문화에 따라 구체적 형태와 소재, 사회관계가 방대하다. 토테미즘(totemism)에서 출발하여 주술적, 제례적 의미를 갖기도 하고 장신구나 예술품 등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사회적 역할에 따라 모습과 태도를 달리하는 현대인의 인격(persona)을 비유하는 표현으로 쓰이기도 한다. 할로윈(halloween)이나 유럽의 가면무도회 문화에서 엿볼 수 있듯 이는 본래의 모습이 아닌 다른 것으로의 변신 혹은 그렇게 되고자 하는 욕망의 상징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것은 오예진은 한국의 ‘탈’ 이미지를 차용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탈은 해학과 소탈함을 가지고 있다. 마당놀이나 전통 악극에 쓰이는 탈은 서민의 삶과 애환을 드러내며 그들의 목소리이자 위안이 되어준다. 이는 작가가 궁극적으로 이야기 하고자 하는 내러티브(narrative)와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기회를 잃고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삶을 살아가는 현 시대의 사람들은 각자의 감정을 되돌아보는 동시에 그러한 감정을 돌볼 시간이 필요합니다”
신작 <극히 괴로워도 헤엄쳐 나올 길은 있으므로>는 작품의 제목 그대로 어떠한 시련이 닥치더라도 극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짙은 초록과 파랑, 검정색으로 채워진 화면 위를 부유하는 사람들은 탈 외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있다. 마치 인간의 힘으로는 대적할 수 없는 거대한 자연의 소용돌이를 마주한 듯 하지만 그들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것은 역경이나 시련보다는 자유이다. 태초의 인간처럼 나체로 유영하는 세 명의 사람, 가장 앞 쪽에서 손을 뻗고 있는 인물과 하단의 분홍빛 연기는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otti)의 <아담의 창조>를 떠올리게 한다. 조물주에게서 생명을 부여받는 찰나의 순간처럼, 화면은 희망으로 채워져 있다. 세 사람은 모두 같은 분홍색 탈을 쓰고 있는데 이것은 각자의 보호 장치라는 작가의 의도가 숨어 있다. 그는 시련의 상황 속에서 방패와 같은 탈을 쓰고 서로에게 연대하며 함께 역경을 헤쳐 나갈 것을 이야기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탈의 기능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주술적 기능으로 풍년을 기원하거나 퇴마, 제례의식 등에 사용되었다. <물러가라>와 <에헤라디야>에서 이러한 탈의 기능에서 비롯된 작가의 재치와 작업 기조를 엿볼 수 있다. 고양이 눈이 그려진 탈을 쓴 한 사람이 우주에서 탈춤을 추고 있다. 사실 고양이의 눈은 그 우주의 축소판이고 춤을 추는 사람도 의상 탓인지 기형적으로 긴 팔이 외계인의 그것처럼 느껴진다. 이 초현실적인 이미지는 부정을 쫓아내고 부적처럼 제액초복(除厄招福)의 염원을 기원한다. <에헤라디야>는 전작보다 동적이며 보다 긍정적이고 밝은 에너지로 가득하다. 마당놀이를 보는 것처럼 신명나고 토속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붉은 탈의 좌측과 우측 얼굴이 다른 것이 흥미롭다. 이는 사회적 구성원으로서 가져야하는 인격을 상징한다. 이마의 파란 원은 지난하게 반복되는 일상을 의미한다. 그리고 ‘에헤라디야!’ 신나는 춤사위로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 누구나 어깨에 지고 있는 ‘삶’이라는 귀(鬼)를 퇴마한다.
오예진이 이상으로 삼는 세계, 즉 우주의 모습은 <시선으로부터>와 <꾸밀래>에서 엿볼 수 있다. <시선으로부터>는 누구나 한번은 경험했을 법한 경험에서 기인한 것이다. 소셜네트워크(SNS) 일상이 된 지금, 마치 ‘나 빼고 모두가 행복한 건가’라는 의뭉스러운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나의 일상이 나의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고 있을 사람들(심지어 한 번도 만나 본 적도 없는!)을 위한 일상으로 치장된 SNS처럼 과시는 곧 결핍임을 꼬집는다. <꾸밀래> 또한 동일한 맥락의 작품으로 의도 된 기괴함으로 인간의 욕망과 좌절을 은유한다. 고양이 눈을 하고 마스크 위로 립스틱을 그리는 아이러니한 모습은 과도한 소비나 집착적인 미(美)적 추구로 분출하려는 그릇된 욕망을 시사한다. 즉 나의 삶을 소중하게 여길 때 얻는 행복이야 말로 비로소 가치 있음을 역설하고, 그것이 실현되는 우주가 우리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곳임을 이야기 한다.
혁명 기록
인간이 문명을 이룩한 이래 건설된 많은 것 중 종교와 예술은 오직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둘은 많은 부분에서 그 맥락을 같이 한다. 특히 육체적, 정신적 안위를 기원한다는 것이 그렇다. 탈에는 그러한 인간의 욕망과 생각이 함축적으로 담겨 있다. 2020년 세계적인 팬데믹 발발 이후 우리는 매일 탈을 쓸고 집을 나선다. 코로나19 이후 너무나 많은 것이 달라진 일상이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크게 변한 것은 ‘나와 타인’에 대한 인식이 아닐까. 나 혼자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 할 때 안전하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작가의 작업노트를 빌리자면 ‘우주’는 지구상의 모든 존재가 공존하는 세계이며 ‘탈’은 보호 장치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도피처나 위장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나를 괴롭게 하는 것에서 나를 보호하고 지켜내는 방패이자 그것이 오롯이 존중받으며 스스로의 행복을 추구하는 세계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연대하고, 서로를 위해야 한다. 마치 지난 2년간 우리가 지켜온 거리와 마스크처럼.
“예술과 사회관계는 사회의 잘못된 점, 잘하고 있는 점, 역사, 문화 등을 관통해서 과거, 현재, 미래에 이르기까지 예술이 창조해낸 독창적이고, 아름다운 지구 사회의 특별한 기록물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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