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설미 : 은폐된 잉태 Concealed Conception
전 시 명 : 박설미 사진전
'은폐된 잉태 Concealed Conception'
참여작가 : 박설미 Seolmi Park 朴雪美
전시기간 : 2022. 11. 16 – 11. 22
전시장소 : 갤러리 그림손(서울 종로구 인사동 10길 22)
관람시간 : 월 - 토 10:30 ~ 18: 30
일요일 12:00 ~ 18:30
전시문의 : 02-733-1045
■ 작가노트
은폐된 잉태<Concealed Conception>
생명의 온기는 응축된 생성의 에너지이자 모든 존재의 시작이다. 또한, 혼돈과 단절의 처절한 고통 속에서도 발아되는 삶의 역동이다. 자연의 경험으로 싹틔워진 온기는 즉각성의 밀도를 띤 아름다운 감정을 솟구치게 하며 내가 가장 인간다운 모습으로 살아 있음을 감지하게 한다. 어린아이의 손에 쥐어진 갓낳은 계란의 온기는 신비이며 관조로 상상된 세계의 위대함 앞에서 두 생명체의 존재 물음이 사라진 내밀한 결합으로 무한으로 향한다. 몸에 흐르는 기억은 삶의 지층이며 무의식의 수맥이 되어 세계를 상상 속에서 체험할 수 있게 한다.
현재적 기억은 감정과 감각의 동반이다.
AI의 변곡점을 넘어서 일상성에 Al와 함께 호흡하는 지금, 전 인류와의 네트워크 사이에서 오히려 고독해졌다. 고독과 소외에 휩싸여 외로운 군상 속에 내던저져 있음을 인식할 때 기억은 더욱 선명해진다. 평온의 가치와 의미를 잃고 편리를 쫒은 세계는 회색화 되어 불안으로 드러낸다. 불안은 피할 수 없는 고통으로써 인간실존의 본래성과 고유성을 찾아 삶을 통찰하게 한다.
메마른 감성, 굳어가는 심장을 본다.
인간의 편리를 위해 시작된 AI 기술은 급속히 진화한다. 인간과 Al가 공생한다는 이상 아래 AI는 인간의 복제물이 되어가고 있다. 인간의 욕망은 AI로 인한 인간의 육체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을 넘어 AI에 감각과 감정을 배양하려는 시도에 이르렀다. 이러한 시도는 인간의 영혼과 감정을 실제, 가상, 모의, 인조의 다중세계로 이끈다. 인간의 정체성과 존엄성은 물론 아무런 목적없이 무심히 운행하는 장엄하고 아름다운 자연 섭리까지 위협한다. AI에 대한 성과가 거듭될수록 인간은 환호하지만, 은폐에는 칠흑 속의 악몽이 도사리고 있다.
인간은 고유의 시각과 세계를 지닌 의식과 무의식의 존재이다.
인간은 예측 불가한 상황에서도 판단과 추론을 가능하게 하는 유연성이 있다. 삶, 감정의 흔적을 채우는 숭고한 미지의 여백이 있다. 그것은 인간이 사유, 고뇌, 깨달음으로 얻은 묵직한 눈물로 붓칠을 하더라도 죽음의 순간까지도 다 채울 수 없는 미완성의 성역이다. 인간은 AI에 의해 감각과 지각의 잠식으로 인간의 존엄과 신성한 영혼을 점령당하는 것은 아닐까?
오늘날
인간은 AI를 잉태하고
AI는 인간을 잉태하고 있다.
박설미
박설미_은폐된 잉태 26_Pigment Print_172x115cm_2022
박설미_은폐된 잉태 05_Pigment Print_172x115cm_2022
박설미_은폐된 잉태 07_Pigment Print_172x115cm_2022
■ 전시평론
불분명한 생성적 사진
박영택 (경기대교수, 미술평론)
1. 어둡고 침침한 화면에는 희미한 빛 그리고 희박한 색채들이 안개처럼 자욱하다. 뭉개진 색채의 더미 같기도 하고 대상이 지워진 모종의 흔적을 애매하게, 조바심 나게 안기는 사진이다. 그래서 일반적인 사진이 지닌 명료한 지시성이나 재현성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도 유심히 들여다보면 검은 덩어리, 유선형의 흔적이 어렴풋하게 화면의 어느 면을 채우고 있거나 그것들이 기우뚱거리면서 돌아다니는 듯한 착시가 인다. 이른바 둥근 달걀을 촬영한 사진임을 사후적으로 깨닫게 된다. 작가는 이 사진이 닭이 알을 낳으면 보이지 않는 깊숙한 둥지의 내부로 손을 밀어 넣어, 손의 감각만으로 더듬거리면서 따스한 알을 꺼내던 어린 시절의 흥미로운 경험, 기억의 소환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그 유년의 기억이 상당히 강렬하게 작가의 무의식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완벽한 형태를 지닌 둥근 알, 생명체의 따뜻한 온기, 둥근 알을 조심스레 움켜쥐던 촉각적 경험 등이 오래 살아남아 여전히 작가의 어느 기억과 심성의 자리를 만들어 놓았던 모양이다. 우리는 유년의 경험과 기억으로 형성된 존재들이라 여전히 과거에 의해 자리 매김 된 현재를 사는 이들이다.
작가는 어린 시절 친구의 집에 놀러 가서 달걀을 둥지에서 꺼내던 추억을 되살려 이를 작업했다. 그러니 이 사진은 사실 무엇인가를 재현하기 무척 곤란한 작업이다. 유년의 기억을 이미지로 사진으로 보여준다는 것이 가능할까? 이때 사진은 그런 흔적으로만 어렴풋하게 문질러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달걀을 손에 잡았을 때의 원초적인 감각, 가장 민감하고 깨지기 쉬운 생명의 벽인 달걀 껍질에 대한 조심스러움과 공포심, 닭으로부터 알/새끼를 훔친다는 죄의식 등 여러 혼재된 감정이 얼룩진 기억이자 경험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 복합적이고 불분명한 것을 사각형의 프레임 안에 명확한 대상으로 고정시키는 일반적인 사진으로는 분명 부족했다고 여겼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좀더 자유로운 표현법을 찾는 한편 중첩된 감정과 생각의 타래를 겹쳐놓기에 다중노출 촬영이 효과적이고 손쉬운 방법론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 둥근 알의 형태에는 무엇보다도 시각적인 밀도가 있다. 단단하고 둥글고 매끄럽고 무색인 달걀은 물체성을 최대한으로 살린 조각의 기원이 된다. 둥근 구체에 가까울수록 보다 물체성이 강해지며 시각적으로 단순명료한 것 역시 물체성이 그만큼 강하게 인지된다. 불가침입적으로 불투명성을 띠어야 하고 촉각성이 강하고 검거나 희거나 무채색일수록 물체성이 높아지는 편이라고 한다. 달걀이 그렇고 달항아리가 그렇다. 아마도 작가에게는 이 알이 주는 시각적인 밀도 높은 형태미가 원초적인 미감으로 자리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알이 지닌 이 형태의 완벽함과 밀도는 깨지기도 쉬워서 매우 역설적인 편이다. 양면성을 지닌 알의 순수한 모순이다. 그와 동시에 알은 생명의 기원이다. 이 신비함은 사실 모든 자연현상에 적용되겠지만 작가의 경우 달걀을 손에 쥔 체험으로 인해 그 경이로움은 오랫동안 이어지고 있다고 본다.
작업 과정을 살펴보면 우선 작가는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흔적을 구하기 위해 달걀 대신 오리알을 사용하거나 혹은 플라스틱 모형에 점토를 덧붙이고 채색을 입히는 등의 처리를 통해 둥근 알의 형태를 만든다. 여기에는 회화적이며 조각적인 행위가 구현되고 있다. 그리고 이를 대략 오전 12시 전후의 시간대의 자연광에서 촬영하면서 빛의 파장을 섬세하게 담아내고자 했다. 배경으로는 부드럽고 온화한 분위기를 차분하게 자아내며 흡수성이 강한 한지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전체적으로 흐릿하고 모호한 사진 안에서 구분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이러한 흔적은 또한 앞에서 언급한 의도의 불가피한 결과물이다. 동시에 달걀에 대한 작가의 추억은 생명에 대한 인식으로도 파생되어 나간다.
“생명의 온기는 응축된 생성의 에너지이자 모든 존재의 시작이다. 또한, 혼돈과 단절의 처절한 고통 속에서도 발아되는 삶의 역동이다. 자연의 경험으로 싹틔워진 온기는 즉각성의 밀도를 띤 아름다운 감정을 솟구치게 하며 내가 가장 인간다운 모습으로 살아 있음을 감지하게 한다.”(작가노트)
닭이나 오리 혹은 모든 새의 자궁으로부터 나온 알은 깨어져야 하는 것으로 운명지어졌다. 그래야 하나의 생명체가 가능하며 그것이 존재한다. 작가는 어린 시절 손에 쥐어진 갓 낳은 달걀의 온기가 자신에게는 신비로운 체험이었으며 이는 생명체가 지닌 존재의 의미가 급속하게사라지고 생태계의 위협과 인공지능, 유전자조작과 생명 복제 시대로 치닫는 오늘날 인간의 욕망에 대한 반성과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의미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었음을 상기시킨다. 그런 여러 생각들이 지금의 작업을 태동시킨 원인이 된 셈이다.
3. 작가는 불분명하지만 분명히 감성으로 느끼는, 형태 없는 그 무엇을 재현대상으로 삼았다. 물론 그 매개는 알이다. 그렇다고 알 자체를 보여주는 일은 결코 아니다. 달걀로 인해 전해진 온기와 생명의 신비, 그리고 그로인해 번지는 여러 상념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명확하게대상화할 수 없는 감성적 대상을 특정한 매체를 통해 재현하는 것이 예술이고 사진일 수 있다. 여기서 사진은 희박한 과거의 기억과 그 기억 속에 또렷이 남은 감각의 상처, 무의식적이고 직감적인 작가의 감성에 의해 포착된 내재적 존재를 문제 삼는다. 사진은 그 미묘한 작가의 감성적 톤을 떠내는 작업이 된다. 사진적 방법을 이용하는 창작행위를 통해 그것을 실행하는 일이 작업이 되는 것이다. 그 결과 사진은 어떤 조짐이나 기미, 흔적을 지닌 징후로서의 사진이 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사진은 불안한 경계로 나뉘고 흔들리며 중첩된 흔적들로 자욱하다. 약간의 차이를 지닌 색들이 불길한 어둠을 가르고 출몰한다. 검은 덩어리를 연상시키는 물체가 설핏 등장하거나 시야를 가로막거나 모서리에 걸쳐있거나 진동하는 듯하다. 통상 사진이 대상을 고정시키는 데 반해 이 사진은 유동적이고 암시적인 모종의 기운으로 채워져있다. 작가가 경험한 신비스러운 느낌의 재현을 위한 모호한 실루엣이고 빛이고 색채이자 덩어리이다. 따라서 관객이 볼 때 이 사진은 알 수 없는 난해한 자취이자 수수께끼일 뿐이다. 여기서 사진은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 자리한다. 작가가 사용하는 다중노출 기법 역시 하나이자 모두인, 하나이기도 하고 여럿이기도 한 이미지를 한 자리에 중첩 시킨 것이자 동시에 이질적인 시간과 공간이 한 화면에 지층처럼 포개진 흔적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작가의 사진은 과거와 현재, 기억과 상상, 부재와 현존, 보이는 영역과 비가시적 영역이 공존하는 표면이 부유하고 있는 상태를 보여주는 사진, 이른바 생성적인 사진이다.
박설미_은폐된 잉태 10_Pigment Print_172X115cm_2022
박설미_은폐된 잉태 15_Pigment Print_172x115cm_2022
박설미_은폐된 잉태 25_Pigment Print_172x115cm_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