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센터 예술의 시간은 2022년 12월 10일(토)부터 2023년 1월 28일(토)까지 김유정 개인전 《유희랜드》를 개최한다. 전시 《유희랜드》는 포스트 팬데믹 도시의 환영과 그것을 흉내 내는 대체물로써 놀이공원을 상정한다. 그리고 이국적 정취만으로도 만족하는 집단적 유희가 어떻게 우리 안에 자리했는지 들여다본다.
꿈과 사랑, 모험이 가득한 신비의 나라, 유희랜드는 현대사회의 단순화된 축소판이면서 동시에 놀이 욕구를 충족시키는 판타지를 제공하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은 현대인의 또 다른 판타지가 실현된다. 랜드의 출구를 빠져나오는 순간, 마법이 풀린 현실을 마주하는 현대인들은 스마트폰을 통해 가상현실, 온라인 게임, SNS에서 같은 방식의 유희를 즐긴다.
김유정은 전시장으로 들어온 놀이공원의 파편들을 2016년부터 천착해 온 틸란드시아 식물설치를 매개로 아트센터 예술의 시간 전관에 재구성한다. 또한 이식된 식물을 새겨 넣은 프레스코1)작업, 댑싸리2)를 그린 아크릴 작업을 통해 거대한 식물계의 이동과 정착의 결과로써 테라포밍3)을 상상하게 한다. 뿌리 없이 생명을 유지하며 증식해가는 틸란드시아가 뒤덮은 유희랜드에서 포스트 팬데믹의 한 장면을 캡처하고 사유하기를 제안하며, ‘유희하는 인간’의 현주소를 질문한다.
도시의 환영 속, 즐거운 비명
대관람차4)는 높은 건물이 없던 18세기 무렵, 유럽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올라 아래를 관망할 수 있는 장치였다. 신분사회를 경험했던 이들에게 대관람차는 새로운 만족을 경험하게 했다. 회전목마는 추억을 소환하고 과거의 어렴풋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놀이공원의 상징으로 역할한다. 온갖 신화와 상징이 마구잡이로 섞인 목마와 오르골 음악의 반복적 회전은 놀이공원의 환영 안으로 초대하기에 충분하다. 놀이를 위한 기계 장치는 약 3분 정도 반복적으로 움직인다. 탑승 시간이 길어지면 따분해지거나 무서워진다. 사람들은 스스로 정신을 분산시키고, 유희를 위한 조작에 몸을 맡긴다. 기계 탑승에 동의한 이들이 같은 장치에 묶여 위험을 감수하고 나면, 기계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놀이기구 안에 묶여 내지르는 비명은 가히 즐거운 비명이다. 현대 도시의 환영5)이 투영된 놀이공원은 현실세계를 벗어난 듯 보이지만, 실은 현실세계를 그대로 흉내 낸다. 인간 사회의 축소판으로써 단순화된 놀이들은 대개 현실에서는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상황을 기대하고 소망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뽑기, 다트게임 같은 놀이는 복권이나 로또에 당첨될 확률이 매우 희박함에도 계속해서 시도하는 심리를 닮았다. 불안하고 아슬아슬한 현실을 유희의 방식으로 외면할 수 있도록 만든 이 교묘한 게임에서 인간은 늘 아쉽게 탈락한다. 하지만, 놀이공원에서 만큼은 ‘꽝 없음’의 뽑기로 위안을 받는다.
호모루덴스의 진화
팬데믹 기간 중 우리가 경험한 수많은 봉쇄령이 공공영역을 폐쇄시켰을 때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그들이 향한 곳은 도심 속의 공원이었다. 사람들은 최대한 떨어져서 걷거나, 소규모의 안전한 지인들과의 만남을 유지했다. 공원에 모인 이들은 배달 음식을 시켜먹고, 산책을 즐겼다. 팬데믹 기간 중 오히려 공공영역이 팽창해 보이는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유희하는 인간은 고립의 상태에 머무르거나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를 연결의 장으로 데리고 나갔다. 연대하는 방식 역시 유희를 통해 찾아나갔다. 팬데믹 기간, 호모루덴스6)는 여가와 소비, 놀이에 대한 욕구에 안전과 건강이라는 키워드를 장착하고 진화한 것이다.
팬데믹은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이자 취약한 생명인지 깨닫게 해주었다. 타자와 공간을 공유하기 거부하고(또는 거부되고), 타자의 숨을 공포스럽게 여겼던 지난 3년의 시간은 우리를 연결하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보게 했다. 비대면으로만 연결되는 경험이 우리에게 새로운 연결과 순환의 가능성을 열어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인간이 본래 어떠한 연결을 바라고 있었는가에 대한 의문은 더욱 커졌다. 인간은 스스로 독립적인 존재인 것을 장담해왔지만, 공기 중 부딪히는 타인의 수많은 요소들과 내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간과해왔다. 우리의 연결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욱 활발하게 끊이지 않고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연결은 전시장 안에서 오브제 사이를 뒤덮는 틸란드시아와 같이 리드미컬하게 움직인다.
식물이 그곳에 있다.
유희랜드를 뒤덮은 틸란드시아7)가 한국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먼지 먹는 식물’이라는 효용적 가치가 알려지면서 부터다. 이른바 플랜테리어8)가 유행하면서 식물은 인간의 공간 안에서 자기만의 역할을 수행할 때에만 그 효용가치와 소비재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았다. 손이 많이 가지 않아야 하며, 햇빛 없이 실내조명만으로도 잘 자라야 하고, 병충해에 강하고, 공기정화 기능까지 장착하고 나서야 식물은 인간 곁에 존재할 수 있다. 심신안정과 인테리어 효과의 명목 아래 식물은 아파트 베란다마다 뿌리를 내리고 증식해 나갔다. 인간의 거주공간을 숙주삼아 기생하며 증식하듯 집마다 바다를 건너온 식물들이 이식됐다. 인간과 공생을 시작한 식물은 인간이 바라보는 방식에 따라 이미지화되어갔다.
자본적 식민주의와 제국주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미지의 세계에 존재하는 생명을 우리가 사는 지역의 동물원, 식물원에서 경험했고, 관람하며 소비했다. 이국적 정취를 자아내는 대상으로 소비되는 이미지들, 예를 들어 야자수 같은 열대식물의 이미지는 무한 복제, 소비되고 있다. 이미지는 장소와 감각을 순식간에 전이시키는 힘이 있다. 격리기간 동안 우리는 많은 이미지를 폭발적으로 소비하며 팬데믹의 종말을 기다렸고, 거대한 식물군이 이식된 서울 근교의 대형 식물카페로 이동하여 격리된 상황에서 해방감을 즐겼다. 이 경험에서 우리의 유희하는 대상은 식물 자체가 아닌 식물들 사이에 있는 ‘나’로 옮겨졌다. 이국적 배경 안에 있는 나를 즐기는 것, 현 시대의 유희하는 인간은 대상을 소비하는 나를 관상하고, 그 이미지 속으로 주저 없이 들어간다.
과거였으나 현재이고, 현재였으나 미래인 장면
김유정이 집중하는 식물은 원래의 자리에서 이식되어 새로운 곳에 정착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식된 식물을 프레스코로 그리는 것은 인간을 둘러싼 아이러니를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기능한다. 날카롭고 뾰족한 조각도로 긁어낸 식물들은 하나같이 인공적인 공간에 존재한다. 그곳은 대부분 플랜테리어의 현장이고, 인간이 조성한 유희의 공간이다. 작가의 리드미컬한 연결은 자연물의 인공적 배치를 담은 화면 뿐 아니라 오브제와 식물 설치작품의 회화적 표현에서도 드러난다. 거대한 질서와 리듬 가운데 오브제를 배치하고, 틸란드시아를 덮는 과정은 각기 다른 이질적 개념을 연결하는 과정으로 확장한다. 이것은 생명과 죽음, 자연과 인공 같은 개념을 시각화함과 동시에 관람자로 하여금 식물을 배경으로 위안을 얻었던 기억을 소환한다. 유희랜드 안의 오브제들은 인공의 풍경으로 박제되었으나, 틸란드시아는 이 모든 것에 생명을 부여함으로써 자신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다. 이전 김유정의 설치작품에 사용한 틸란드시아가 돌봄과 치유로 기능했다면, 유희랜드에서의 틸란드시아는 이주하는 오브제들을 매개하는 역할을 한다. 이 개념은 우리가 겪어온 펜데믹 경험과 연관이 있다. 유희랜드에서 틸란드시아는 ‘프리 팬데믹-팬데믹-포스트 팬데믹’의 시간성과 관계없이 작동하며, 연대기적 흐름을 깨고 눈앞에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추억을 소환하는 곳, 유희의 본능이 살아나는 곳, 도시의 환영이 모여드는 곳, 이곳 유희랜드에서 우리가 포착하게 될 한 장면은 과거였으나 현재이고, 현재였으나 미래의 장면이다. 김유정이 펼쳐낸 《유희랜드》에서 현 시대의 환영과 당신의 경험이 오버랩 되는 한 장면을 발견 할 수 있기를 바란다.
/ 주시영 (아트센터 예술의 시간 디렉터)
1) 회반죽 벽에 그려진 벽화기법을 말한다.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를 프레스코의 황금기로 보며, 지오토, 마사치오, 미켈란젤로 등이 프레스코 기법을 사용하여 명작을 남겼다.
2) 유럽 및 아시아가 원산지인 식물로 높이 1m 정도로 곧게 자라고 뜰에서 재배하던 것이 들로 퍼져서 세력을 키우는 경우가 많다. 식물체는 마른 다음 빗자루로 만들기도 하고, 약용으로 쓰이기도 한다.
3)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을 개조하여 인간의 생존이 가능할 수 있도록 지구화하는 과정을 일컫는다. 지구를 뜻하는 테라(terra)와 행성을 뜻하는 포밍(forming)이 합쳐진 단어로 천문학자 칼 세이건(Carl Edward Sagan)이 1961년 금성의 테라포밍을 제안하면서 등장한 개념이다.
4) 바퀴 모양의 둘레에 두 명이나 세 명이 앉을 수 있는 작은 공간을 여러 개 만들어, 먼 곳을 바라볼 수 있게 한 회전식 놀이기구
5) 판타스마고리아(Phantasmagoria): 17세기 유럽에서 광학이 발전하면서 환등기가 등장했고, 18세기에는 거울이 발달하면서 프로젝터로 발전했다. 빛을 반투명 그림에 통과시켜 이미지를 투사하는 용도로 사용했던 환등기는 ‘환영’이라는 뜻의 판타스Phantas에서 출발한다. 마술사들은 전 유럽을 돌아다니며 환등기를 이용해 유령이나 공포스러운 이야기를 보여주는 쇼를 선보였다. 이러한 유래로 발터 벤야민은 현대 도시의 모습을 판타스마고리아(Phantasmagoria)에 비유하여 자본주의 체제 아래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비판하기도 했다. 욕망은 환영으로 도시를 가득 채우고, 인간은 다시 도시에 매료되는 아이러니가 반복된다. 벤야민에게 이러한 도시는 유희의 출처이자 동시에 혐오감과 절망의 원천이었다.
6) 네덜란드 문화인류학자 하위징아Huizinga(1872-1945)가 『호모 루덴스(Homo Ludens: 유희에서의 문화의 기원)』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제안한 개념이다. 인간 본질의 중요한 특성을 놀이하는 인간, 유희하는 인간으로 파악하였다.
7) 틸란드시아(Tillandsia cyanea): 김유정이 그의 작품에 주로 사용하는 틸란드시아는 스페니시모스라는 수염틸란드시아로 분류된다. 이 식물은 본래 아메리카 대륙 중남부의 사막이 원산지다. 뿌리가 퇴화된 공기식물, 기생식물이며 주로 비, 이슬, 먼지, 낙엽, 곤충 유래 물질 등에서 영양분과 수분을 흡수한다.
8) 플랜테리어(Planterior): 식물(plant)와 인테리어(interior)의 합성어. 식물로 실내를 꾸밈으로써 공기정화 효과와 심리적 안정효과를 얻고자 하는 인테리어 방법의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