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기간 : 2023. 4. 28(Fri) ~ 6.2(Fri)
전시문의 : T. 02-3443-7475
E. info@gallerylvs.org
평면 숲 위의 격자점을 지나는 길
조은정 미술평론가, 고려대학교 디자인조형학부 초빙교수
지난 전시까지 김성국의 화면은 나무, 물, 꽃, 그림자 그리고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화면 가득 이미지들로 북적였다. 꽃 한 송이, 나뭇잎 하나에 이르기까지 그 이미지들은 모두 연원을 지닌 것이었다. 그들이 온 곳은 미술사라는 기나긴 인류의 역사와 다를 바 없는 데이터의 저장고였다. 그런데 이번 전시 글을 위해 작가의 작업실을 방문한 날 목도한 것은 복도에까지 나와 있던 커다란 캔버스들이었고 낯설다고밖에 할 수 없는, 생경한 것들이었다.
이를테면 이들은 이런 모습이었다. 근사한 초원에 사람들이 햇볕을 쬐고 있는데 컷 만화의 주인공 스누피가 지나가고 있었다. 멋진 수풀을 뒤로 하고 애니메이션의 추억과 현재를 모두 누비는 전형성을 지닌 미소녀가 머리카락을 날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화면 안의 꽃이며 풀들이 얼마나 많은 품을 들여가며 묘사를 한 결과인지 알고 있는 입장에서는 김성국의 신작들을 보고 당황했다고 해도 그리 비난받을 일은 아닐 것이다. 이내 그가 회화의 의미를 되새기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아챘고 그리고 흥미진진함으로 무장한 탐구열이 벋어 올랐음은 물론이다.
숲속에 길을 내려면 나무를 베어야 한다. 상당히 낭만적인 사업이지만 시작은 아주 단순하고 밋밋한 평면에서 시작하기 마련이다. 설계도면 속의 숲은 평면이다. 나무를 베어야만 길을 만들 수 있으므로 도면 안에서 나무는 격자점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길은 평면의 격자점을 이어서 형성된 공간이지만, 평면에서 격자점은 제거되어야만 공간이 될 수 있다. 길이라는 공간은 평면의 설계도면 안에서는 숲의 상처이고 나무, 풀과 같은 것들의 죽음을 통해 형성된다. 삶, 여정의 상징인 길은 숲의 입장에서는 삭제, 분단, 경계가 된다. 그의 가득 찬 이미지의 공간이었던 숲은 그렇게 죽어버린 나무, 풀들을 통해 길을 갖게 된 것이다. 의미의 공간을 열게 되는 그 길은 도면에의 표현방식인 제거된 격자점, 즉 평평한 이미지들로 나타난다.
이른바 근사한 ‘정식 회화’의 화면에 균열을 내는 B급의 이미지와 단순하지만 강렬한 존재감을 갖는 만화의 주인공들이 버젓이 그의 화면에는 공존하고 있다. 가상, 환각을 기반으로 공간으로 끌어들이는 이미지들로 구성되기 마련인 작품으로써 회화는 이들 만화 주인공으로 인해 회화의 시작 지점인 평면으로 환원된다. 김성국의 화면은 평평한 이미지의 등장을 통해 화면의 물질적 평평함을 보여줌으로써 관객의 감각을 회화의 평면성으로 초대하는 것이다. 평면 안 가상의 세계로 관객을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평면 위에 머물게 함으로써 그의 작품은 캔버스를 닮은 모니터 안 애니메이션이나 증강현실, 가상의 게임 등과 또한 차별화된다.
무엇이 예술 작품인가 혹은 좋은 예술인가라는 문제는 사회의 변화와 연관이 있다. 가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까지 경솔한 영국인들을 수없이 보아왔지만, 대중의 얼굴에 물감 한 통을 끼얹은 대가로 200기니를 요구하는 거만한 사람은 처음 본다.”라고 했던 러스킨(John Ruskin,1819-1900)은 휘슬러(James Abbott McNeill Whistler, 1834-1903)가 1877년 <검은색과 황금색의 녹턴:떨어지는 불꽃>을 전시했을 때, 자본주의에 매몰되어 성실히 그리지 않은 작품이라고 판단했다. 작품의 의미와 완결성 그리고 노동이 작품과 그렇지 않은 것을 가르는 기준으로 작동했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날 완결성이나 노동은 예술작품의 판단 기준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사회에서조차 근대에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회화 작품과 작품이 아닌 것을 구별하고자 하는 욕망이 건재한 것은 회화의 아우라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성국의 화면이 주는 기이함(eccentricity)은 근대 예술작품에 대한 논의를 불러일으킨 세기의 재판에서 휘슬러 측 증인이 주장한 “원본성(originality)”이라 칭한 것과 같은 종류의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한 복제되는 명화의 이미지를 차용하거나 원용한 화면에서 회화 밖의 것들에서 온 이미지들은 그의 회화 작품에 원본성을 제공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방식은 평면을 매체로 한 회화가 존재하는 두 방식, 환각적인 재현성과 평면성의 충돌을 통해서이다. 더불어 광선의 방향, 원근법이라는 틀도 그의 화면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화면에는 자기복제를 거부한 기시감 넘치는 이미지들이 그득하지만, 영상시대의 변화한 문화지형으로써 회화가 펼쳐지는 공간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은 일견 고전적으로 보이지만 어떠한 방식으로든 동시대성이 담겨 있는데, 사물이 상품성으로 표현되는 것도 그러한 예이다. 아무렇게 걸려 있는 의복, 신발 같은 것들이 그것들로 유행하는 상표를 드러냄으로써 동시대성과 함께 자본주의 시대상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또한 마스크를 쓴 인물이 나타남으로써 팬데믹의 시간성을 담고 있다. 마스크를 착용한 인물의 모습 그대로를 배경 안에 배치함으로써 공유한 인고의 시간을, 그리고 유명인이 착용하던 마스크를 누구나 착용함으로 인해 유명인에게마저 허락된 익명성과 동시에 일상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림에 그려진 것은 그려져서 의미를 드러내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건장하고 잘 다듬어진 근육과 매끈하고 단단한 피부를 지닌 남성이 그려진 <Trickster>시리즈에서도 정성을 다해 표현되는 인물의 의미를 찾는 것은 무의미하다. 제목이 드러내는 것처럼 그 인물의 내부에 있는 것을 외부인은 결코 알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Forest>에서도 마찬가지로 헤르메스가 금화의 인물상처럼 중앙에 버티고 있지만, 섬유예술가 캐서린 웨스트팔(Katherine Westphal, 1919-2018)의 이름과 그녀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도안화한 인물, 실을 상징하는 선과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표면적인 오마주라고만 해석하기에 헤르메스는 석연찮은 존재임이 분명하다. 심지어 보스턴 셀틱의 농구선수 Jayson Christopher Tatum을 나타낸 <Tatum>마저 그가 신은 나이키 신발과 밟고 있는 식물들이 명품로고를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이 또한 의미를 표출한 화면이라 보기는 어렵다. 그런데 <일하러 가는 길>은 제시카 왓슨(Jessica Watson, 1993-)이라는 이름을 적어두었다. 홀로 210일 동안 항해를 한 최연소자인 여성을 상징하는 바다를 상징하는 다양한 물건들 속에서, 게다가 그것이 아기를 위한 모빌 모습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어린 사람이라는 의미 외에, 새끼를 부양하기 위해 고독하게 작업하는 가장들의 일부인 작가의 투영이 아니라고 할 근거도 없을 것이다. <롱기누스의 숲을 위한 연습>은 롱기누스의 창, 숭고론을 편 철학자 롱기누스의 어느 쪽인지 상상케 함으로써 관람자를 중의성 안에서 서성이게 만든다.
무지개다리를 놓아 새로 건설한 발할라 성으로 들어가는 것이 마지막 장면인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겐의 반지>를 상기시키는 제목인 <니벨룽겐의 다리>는 연못, 황금, 아름다운 여인, 보상 등과 같은 것을 넘어 이상향에 이르는 과정을 순간에 압축한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명화의 구성 방식을 차용하여 서사화함으로써 의미를 생산하던 작가의 제작 방식은 이 작품에서는 상황이 아니라 감정의 코드를 유추케 한다. 화사한 꽃의 계절에 무지개 모양 다리를 건너는 웨딩드레스의 여인, 계절적으로 달라 보이지만 그 장소가 분명한 곳의 중간에 서서 사유하는 검은 옷을 입은 우산 쓴 여인은 나무, 하늘, 명작의 부분에서 발견하는 호화로운 모든 장치들을 젖히고 인간, 그에게 관심을 가져가게 하는 것이다.
<The Study of P.K.> 시리즈에서는 대상의 형태, 물질감을 나타내는 방식에 대한 탐구를 보여준다. 타자의 작품에서 나타난 그리기 방식을 자신의 화면에서 재현의 방법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결코 기존의 가치를 승인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김성국은 타인의 작품을 보고 그 화면에서 극히 회화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한 부분을 자신의 화면에서 전체로 보이게 한다. 타인의 작품을 모본으로 한 대상의 재현이 아니라 ‘그리기’라는 내용의 형태로써 원본성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의 관심사가 회화의 본질성에서 벗어난 적은 없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번 전시를 통해 보다 확연히 그는 그리는 문제에 대해 천착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의 회화는 명료한 형태에도 불구하고, 세세히 그려내는 노동과 성의 없는 만화 베끼기, 고급한 회화와 저급한 만화, 우상의 기록과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타인의 삶과 작가 자신의 생활 등이 결코 하나로 귀결되지 못하는 의미의 모호함을 지니고 있다. 사실 작가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너무나 다양해서 무엇을 작품이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가당치 않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현대 사회에서 여전히 관람자의 독해 안에서 작품의 가치를 판단하는 근대적인 시각은 비판되어 마땅할 것이다. 그의 주요 관심사는 화가로서 그림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 즉 회화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로 결부된 듯이 보이고, 이야말로 원대한 야망의 실현 과정이라 할 것이다. 자연과 인간, 회화와 만화, 그림과 물질이 경계가 없는 공간을 구사하는 그의 화면은 수평적이고 다핵적인 텔레커뮤니케이션의 사회를 반영하고 있고, 이야말로 초현대의 동시대성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