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하늘의 별이 되어
안녕하세요.
예화랑 김방은입니다.
2023년 4월 예화랑 45주년 기념 전시 ‘밤하늘의 별이 되어’는 예화랑의 뿌리를 찾아가는 전시입니다.
예화랑은 1978년 설립되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으나 이번 전시에 나오시는 작가분들은 예화랑을 천일화랑의 뒤를 이어 하고 있는 화랑이라 기억하고 계십니다. 천일화랑에 관한 자료는 제가 이번 전시 도록에 쓴 글에 자세히 나오니 한번 읽어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번 전시에 나오는 작가분들은 : 오지호 구본웅 남관 임군홍 이인성 김환기 윤중식 최영림 김향안 유영국 손응성 장욱진 이준 임직순 이대원 홍종명 문신 권옥연 정규 천경자 변종하 (생년월일 순, 21분) 이십니다.
이번 전시회의 21분은 미술계에서는 동양화가 주류였던 시기 이 땅에 서양화가 유입된 초기 시절에 서양화를 받아들이면서도 우리의 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독자적인 예술로 승화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일생을 사셨던 분들이십니다. 일제 식민지 시대를 거쳐 해방과 6.25전쟁이라는 한국의 파란만장한 근현대사 속에서 오늘의 대한민국 미술을 반석 위에 올려준 미술 문화 건국의 주역들을 모시는 전시입니다. 지금은 모두 세상을 떠나 이 자리에 함께 하시지는 못하지만 연락이 닿는 유족분들과 함께 이분들을 기리며 이분들을 기억하고 이분들의 아름다운 작품들을 보면서 많은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전시회를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당시를 살았던 분들의 예술에 대한 진정성, 순수함과 열정을 느끼며 새삼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었고 작가에 대한 존경심, 예술에 대한 경외감을 다시 한번 새길 수 있었습니다.
힘들었지만 아름다웠던 시기를 돌아보며 지금처럼 좋아진 세상을 보지 못하고 가신 분들의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비록 지금 모습은 볼 수 없지만 ‘밤하늘의 별이 되어’ 우리와 함께 계신 분들을 말이지요.
오지호, 북구의 봄, 44x59cm, oil on canvas, 1981
오지호 (1905~1982)
1919년 3.1 운동 직후 나라를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강경한 성품과 남다른 민족의식이 전 생애에 걸쳐 있었던 작가. 1921년 한국의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으로부터 미술을 배우고, 1928년 서양화가 단체인 녹향회를 결성하여 전시를 열어 활동하던 중 일제의 탄압으로 중단되는 사태를 맞기도 했었다. 6.25전쟁 때에는 인민군을 피해 산중 생활을 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적도 있는 고난 했던 우리의 역사를 피부로 느꼈던 작가이다.
1938년 한국 최초의 컬러 화집<오지호 김주경 2인화집>을 <순수회화론>과 함께 발표하면서 장안의 화제가 되었는데, 당시는 일본 화단에서조차 원색 화집을 낸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고, 조선 회화의 우수함을 과시하려는 의도도 있었던 것이었다.
오지호의 회화는 한국의 자연, 한국의 정신세계를 담고자 하는 것이었고, 인상주의 화론은 밝고 맑은 한국의 자연을 그리기 위해서 가장 좋은 회화적 수단이라고 믿었다. 오지호는 “자연이 나고 내가 곧 자연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자신과 자연을 결부시켜 그림에 몰두하고 있었다. 한국의 풍광을 토대로 민족 회화를 창조하기 위해 매진한 오지호는 구상화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이론을 겸비한 화가였다.
오지호 가옥 : 생전 화실로 사용하면서 살았던 공간은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6호가 되었다.
구본웅 (1906~1953)
1930년대 전반기 청년작가 시기에 전위적인 예술세계로 동료 화가들과 문인들 사이에서 “서울의 로트렉”이란 칭송을 받았다. 그도 로트렉과 비슷하게 유아 때의 병이 원인이 되어 비운의 곱사등으로 평생을 살아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척추 장애 때문에 인버네스(유럽식 망토)는 구본웅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고, 덥수룩한 머리와 창백한 얼굴, 수염이 뻗친 이상과 꼽추인데다가 땅에 끌리는 인버네스를 입은 구본웅이 함께 거리를 거닐면 곡마단이 온 줄 알고 아이들이 뒤를 따랐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파리 중심의 전위 미술이던 야수파와 입체파 표현파, 초현실파 등의 방법을 과감하게 수용함으로써 한국 모더니즘 미술의 기수가 되었다.
1927년 조선 미술전에 조각부로 석고 조소 “얼굴 습작”이 특선을 받았을 만큼 조소 실력도 뛰어났으나 스승인 김복진이 1928년 봄, 공산당 사건 때 핵심당원으로 체포되어 복역하게 되면서 조소 작업도 중단되었다. 그는 동경에서 미술과 미학을 공부하며 미술비평과 미술론 집필활동도 활발히 하였다. 이러한 그의 활동은 조선의 현대미술 선구자 위치를 뚜렷하게 구현하게 되었다. 그가 활동했던“목일회”의 회칭이 일본을 다스린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지 않냐는 트집으로 회칭을 “목시회”변경하는 일도 있었다.
구본웅은 한국의 옛 문화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애착으로 1934년 서울 소공동에 “우고당”이라는 상호의 골동품 가게를 내고 고미술 연구를 하였고, 불교에도 심취하였던 그의 회화는 “동양적 표현주의”로 이해되었다. 옛 그림의 산수화 형식을 유화로 수렴하려고 한 건강하고 뚜렷한 독자성을 추구하던 구본웅이 1953년 연초에 죽음을 맞게 된 것은 참으로 애통한 일이었다.
남관, 옛뜰, oil on canvas, 64x80cm, 1985
남관 (1911~1990)
남관은 흔히 문자추상 작업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이 작업을 완성해 가는 그가 창안한 데콜라주 기법은 그의 예술세계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물감이 아닌 종이, 천, 얇은 철판 등을 캔버스 위에 접착제로 붙이는 것을 콜라주라 한다면 데콜라주는 반대의 프로세스로, 붙인 이물질을 떼어내는 작업이다. 남관은 6.25 전쟁이 남긴 상처가 그대로 남아있던 1954년 미도파화랑에서 도불전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12월 프랑스 유학을 감행하였다. 이때만 해도 서울을 떠나 일본 요코하마에서 배를 타고 한 달에 걸려 파리에 도착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68년까지 14년간의 프랑스 생활이 시작되었다. 힘든 생활이 시작되었다. 몽파르나스의 반지하 셋집은 습기가 늘 흥건했고, 벽돌을 바닥에 놓고 그 위에 캔버스를 세워야만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극한의 상황이었지만 목숨 걸고 커피 한잔의 시간도 아까워 사람을 만나는 것도 피해가며 그림을 그렸다.
작업실의 축축한 물기가 캔버스 위의 붙여진 종이들을 퉁퉁 불렸고 그 종이를 다시 한 겹 한 겹 벗겨내며 먼 과거로, 아득한 원형의 세계로 돌아간 듯한 미묘한 신비감을 불러일으키는 작업을 완성시켜나갔다. 남관의 문자추상작업들은 고대의 상형문자와 같고 조선의 예술가들이 작품을 마치고 자기의 분신 같은 낙관을 찍듯 마치 무슨 암호나 코드와 같이 느껴진다.
1966년 프랑스 망통 현대 비엔날레에서의 망통시 1등 상은 작가 개인에게는 식민지 시대 청년 일본 유학시절을 거쳐 한국전쟁, 50,60년대의 처절한 고생의 프랑스 유학시절에 대한 보상이기도 하였지만, 해방 이후 대한민국 국가에는 커다란 큰 영광을 안겨준 대단한 사건이었다.
남관은 일찍이 60년대에 국제적인 무대에서 성공한 작가였던 것이다.
임군홍, 정물, 16.4x36.5cm, oil on canvas
임군홍 (1912~1950 월북 ~ 1979)
대한민국의 파란만장한 근대사를 고스란히 온몸에 떠 앉고 작업 활동을 했던 작가가 임군홍 이상의 작가가 또 있을까? 임군홍은 1930,40년대 서울, 신징, 베이징, 한커우에서 산업미술과 순수예술의 창작활동을 누구보다도 활발히 하였으나 1948년 교통부의 신년 달력에 세계적인 무용수 최승희 사진을 실었다는 이유로 검거되어 수개월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이러한 당시의 상황이 1950년 9.28 서울 수복 때 임군홍은 가족을 남에 놔둔 채 일단 몸을 피해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월북을 하게 된다. 이것이 영원히 가족과 이별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르는 일이었을 것이다. 1950년대 이후에는 평양, 개성, 함경북도 일대를 떠돌며 작업을 하다 68세에 세상을 떠나게 되는 그의 일생은 개인이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크고 무거운 시대의 아픔인 것이다.
50년에 북으로 간 이후 우리에게는 잊혀진 화가였지만, 천만다행히 유족에 의해 70년 넘게 고스란히 보관된 그의 30,40년대 작품들은 보물처럼 남아 우리에게 그 시대의 아픔과 함께 임군홍의 작품세계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그는 아카데믹한 정규 수업을 받지는 않았으나 끈기 있는 독학과 전시활동을 통해 많은 드로잉과 스케치, 종이 위의 유화 작업을 꾸준히 해나갔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인물화, 풍경화, 정물화의 장르별로 다양하게 제작되었고, 화풍
또한 인상주의 양식, 야수파적인 실험적인 작품까지 아우르며 많은 완성된 유화 작품들이 유족을 통해 보이고 있다.
이인성 (1912~1950)
한국의 서양화가 도입되면서 양화계가 형성되고, 화가와 학생들이 유화나 수채화를 공개적으로 전시하면서 확실한 정착기를 보게 된 1930년대에 혜성같이 등장한 이가 이인성이었다.
1929년 17세에 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부에서 무난히 첫 입선을 하고, 1931년에는 일약 특선에 뽑혔다. 당시 화가이자 평론가였던 정규는 “이인성이 완성한 수채화의 독특한 수법은 아직도 (1957년 현재) 우리나라 화단의 가장 높은 금자탑이다.”라고 단언한 글을 쓴 적도 있다. <한국 양화의 선구자들>중에서 월간 <신태양> 1957. 이인성의 수채화는 투명과 불투명의 기법을 자유로이 넘나들었고, 그 세련성과 작품의 무게가 유화에 뒤지지 않았고, 수채화로서는 흔하지 않게 최대한의 대작을 많이 그렸다.
1912년 대구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미술을 공부하기 어려운 환경이었으나 우연히 서동진이라는 훌륭한 스승을 만나게 되어, 대구 유지들의 도움으로 1932년 일본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이인성은 도쿄에서 훨훨 날아 일본 최고의 관전 “제국미술전람회”에 바로 입선을 하게 되고, 1935년 수채화전이 열렸을 때는 일본인 화가들을 모두 제치고 당당히 최고상을 받았다. “조선의 천재소년”으로 알려지면서 이인성은 조선의 자존심과 긍지를 안겨주었다. 이렇게 조선의 자랑이었던 천재 이인성에게 1950년 11월 큰 불행이 찾아온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이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때, 술에 취한 이인성과 시비가 붙은 치안대원이 이인성에게 총을 쏘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너무나 어이없는 그의 죽음에 후에 소설가 최인호 (이번 전시에 참여하는 손응성은 최인호의 외삼촌이다.)는 글을 남겼다. . 한국일보 1974년 6월 5일 <젊은이 세계> 그의 글 중에 일부 ; “누가 천재를 쏘았는가? 예술가는, 천재의 예술가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는 신에게서 태어날 뿐이다. 왜 신에게서 태어난 그를 죽여야만 하는가.”
김환기 (1913~1974)
이번 전시에는 김환기 작품과 예술적 동지이자 삶의 반려자인 김향안 (본명 변동림)의 그림이 함께 전시된다.
두 사람은 1944년 고희동의 주례로 결혼하여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을 함께 겪고, 파리와 뉴욕에서 동고동락하며 예술 창작에 몰입하였다. 김환기는 타고난 예술적 기질과 지칠 줄 모르는 도전정신으로 추상미술의 최정상에 선 20세기의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작가이다. 우리 산천과 달 구름 등 자연의 모습과 백자, 골동 민예품 등 민족정서를 일깨우는 화재를 선택해 서양화의 재료와 기법을 사용해 서정적이고 추상적인 화면을 완성시켜 나갔다. 1930년대에는 일본에서의 교육과정과 한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전시활동을 하였고, 1946~49년 서울대 미술대 교수, 1952년에는 홍대 미술대 교수를 하면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1956년 44세의 나이에 파리로 떠나 3년 동안 프랑스에서 창작생활을 이어나갔다.
1959년 김환기가 파리를 떠나면서 몽파르나스 뒤 어두운 창고 같은 남관의 화실을 찾아 “자네는 파리에서 뼈를 묻게”라고 한말은 후에 남관의 글을 통해 알려졌다. 그 이후 김환기는 파리에서 한국으로 돌아와 작업 생활을 하다가 1963년 뉴욕으로 떠나고 1974년 생을 마칠 때까지 뉴욕에서 머물면서 전면 점화를 탄생시키면서 추상회화의 대표적인 화가가 된다.
1974년 김환기가 뉴욕에서 타계한 소식을 접한 남관은 “김환기 형의 영전에 ” (동아일보 1974)에서 김환기의 죽음에 대한 애통한 마음을 전하면서 “서울에 주저앉아 있는 게 형에게 부끄럽다”라는 심정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20세기 최고의 두 추상회화가의 예술세계가 얼마나 치열했고 진지했는지를 알려주는 대목이다.
윤중식 (1913~2012)
윤중식은 학창 시절 꿈이 연극배우, 연출가, 지휘자였다고 할 정도로 예술적이 감정과 적성이 타고났다. 어려서부터 사랑과 평화의 마음을 간직하게 되었던 윤중식의 성장 배경은 그의 회화세계에서 선명하게 연결된다. 그는 석양빛 찬란한 자연미의 정취, 비둘기가 나타나는 평화 염원의 시각이 내포된 서정적인 풍경미를 추구한 작가이다. 1931년 2학년인 그는 서울의 미술가 등용문이던 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부에 출품하여 입선, 그다음 해와 다음다음 해에도 연속 입선하였다. 중학교를 졸업하며 화가의 꿈을 확정한 윤중식은 도쿄의 데이코쿠 미술학교 서양학과로 유학을 떠나 1940년 졸업하고 돌아온다. 1953년 6.25 전쟁 정전 직후 윤중식은 제2회 국전 서양화부에 출품한 <가을풍경>이 특선에 오르며 작가적 위상을 다진다. 그 후 몇 번 입상을 거듭한 그는 1959년 제8회전부터 추천작가 위치에 오른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그의 작품은 더욱 자유로운 변용으로 이어진다. 다분히 도식적인 단순화, 그러면서 자연미의 본질을 풍부하고 밀도 짙은 색채로 표현감정이 두드러지게 조화되는 형태로 추구되어 간다.
윤중식은 국립현대미술관의 기획전시를 비롯한 여러 비중 큰 초대전에 거의 빠짐없이 참가했다. 그때마다 그의 화면들은 선명하게 개성적이며 표현감성이 풍부하게 빚어진 전형적 작풍을 부각시켰다.
최영림 (1916~1985)
최영림은 전설을 테마로 하는 작품 활동을 벌였던 전설의 작가이다. 전설은 옛날이야기의 한 종류이며 어떤 시대, 어느 민족에게도 전승되고 있는 인간적 염원의 반영으로 나타난다. 전설은 사람들을 같은 방향으로 인도하고 삶의 뜻을 바르게 잡아주는 말벗의 역할을 한다 볼 수 있다. 최영림은 이렇듯 지난날의 말벗이 은밀하게 들려주던 전설의 맥락을 회화의 어법으로 번안하여 현실의 우리들에게 들려주던 말벗으로서의 화가이다. 말벗으로서 최영림의 그림은 정령신앙적인 모티브가 농후하게 응용되고 있다. 그의 소지가 모래나 흙가루 같은 마티에르로 되어있어 더욱 그렇다.
그의 미술은 19세와 20세가 되던 해에 주목받게 된다. 고등학교 시절 평양박물관의 학예원인 일본인 오노 다타아키의 지도로 목판화를 배우게 되는데, 스승의 권유로 일본판화협회전에 출품한 게 입선이 되었다. 이 일은 최영림에겐 크나큰 사건이었고, 사회적 사실로서의 미술의 각성이기도 했다. 그는 후일 오노의 소개로 일본으로 건너가 무나카타 시코로부터 목판화 기법의 지도를 받게 되며, 이때의 경험이 최영림 미술의 생애를 결정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김향안 (1916~2004)
김향안은 시인 이상과 함께 했고, 수화 김환기의 아내로 기억되지만 그들과 함께 하는 모든 순간 스스로도 그림을 그리고 수필을 씀으로써 자신의 미의식을 발전시키며 본인만의 예술세계를 펼쳤다. 그녀는 한국적인 정체성을 기반으로 하여 해외에서 활동하는 김환기의 예술 토양이 되어주었으며 그의 작품을 가장 한국적이자 세계적인 작품으로 만드는데 일조한다.
뉴욕의 화실에 들어오는 햇살이 아까워 그림을 그렸다는 김향안은 청명한 하늘의 빛과 같은 환한 색조의 섬세한 변주를 보여준다. 추상적으로 부드럽게 표현된 풍경은 보는 이들에게 많은 것을 떠올리게 만들며, 그녀만의 따뜻한 시선으로 펼쳐진 독창적인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그림은 사람하고 같은 공기를 마시고 먼지를 쏘이며 생명체처럼 살아갈 때 비로소 광채를 발휘한다.'라고 믿은 그녀는 김환기 사후에 국내 최초 사설 기념관인 환기미술관을 1992년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에 개관하였다.
"가로되 아름다움을 공감할 줄 아는 사이에는 나누어 즐겨야 한다. 그의 작품에서 나도 공감할 수 있는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을 때 황홀하다."
유영국 (1916~2002)
유영국은 한국 근대미술의 전위에 서서 추상미술의 영역을 개척했던 선구자이다. 특히, 한국의 자연을 아름다운 색채와 대담한 추상 형태로 빚어낸 최고의 조형감각을 지닌 화가이다. 1935년 도쿄 문화학원에서 미술공부를 시작했으며, 비교적 자유로운 화풍을 자랑했던 문화학원에서 그는 당시 도쿄에서도 가장 전위적인 미술운동이었던 ‘추상’을 처음부터 시도했다.
유영국의 작품에서 점, 선, 면, 형, 색 등 기본적인 조형요소가 주체가 되어 등장한다. 이들은 서로 긴장하며 대결하기도 하고, 모정의 균형감각을 유지하기도 함으로써, 그 자체로 강렬한 에너지를 발산하다. 형태를 단순화하고, 절묘한 색채의 조화를 추구하되, 마티에르를 최대한 살리는 방식을 탐구했다. 형태는 비정형적인 것에서부터 점차 기하학적인 형태로 단순화했고 삼원색을 기반으로 하되 유영국의 특유의 보라, 초록 등 다양한 변주가 구사된다. 이로써 유영국의 작품은 회화적 아름다움이 다다를 수 있는 최고의 경지에 도달해간다.
손응성 (1916~1979)
우리의 양화사에서 손응성이 차지하는 명확한 예술적 성향과 비중은 철저한 내밀성의 표현 형태로 귀착한 독자풍의 사실주의 실현으로 정평돼 있다. 손응성의 독특한 사실주의 작업의 성립은 1950년대 중반부터 한국적인 미의식에 바탕을 둔 치밀한 시각과 정감으로 집안의 해묵은 기물 혹은 골동가게에서 입수한 옛 도자기, 토기 등을 소재삼은 정물화와 고궁의 역사적 분위기를 주제삼은 풍경화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 수법은 세밀한 묘사로써 손응성의 집요한 사실주의 정신을 발현시킨 것이다.
손응성은 타고난 외곬 화가였다. 어려서부터 그림 이외에는 아무 흥미가 없었다. 학교 공부도 싫기만 해서 배재중학교 2학년 때 자퇴 후 곧바로 일본으로 미술학교 유학을 떠나 화가의 길을 택했다. 그 뒤 화가 생활을 시종 외곬의 사실주의 집착으로 일관하였다.
손응성의 철두철미한 사실주의 수법은 구미에서 시작되어 국내에 파급됐던 하이퍼리얼리즘의 미학논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내면이다. 그는 전통적 사실주의 맥락에서 정감적인 요소를 농밀하게 내재시키는 방법을 취했다. 그 점은 외래의 하이퍼리얼리즘이 자기의 주관적 표현감정을 일절 배제한 중성적 묘사형식으로 현실세계를 극명하게 묘사할 뿐인 태도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성향이다.
장욱진, Untitled, 26x19.5cm, marker on paper, 1979
장욱진 (1917~1990)
장욱진은 소년시절부터 학생미전에서 빛나는 수상을 하는 등 천부적인 예술적인 소질을 발휘하였다. 1943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후배 양성과 조국의 빈곤한 문화예술 발전을 위한 터전을 개척하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
한국 근현대미술사에서 독보적 회화 세계를 펼친 작가로 꼽히며 장욱진의 작품에 등장하는 소재들은 무엇보다 화가 자신의 생활과 경험에서 우러나온다.단순히 바라보는 정경으로서의 향토적 풍경이 아니라 작가 자신이 몸과 마음으로 체험하고 느낀 정서가 응축되어 있다.
작가에게 자연은 늘 영감의 원천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집과 이틀리에 주변을 산책하며 하루를 시작한 그는 자연에서 전쟁으로 떠난 고향과 어린 시절에 관한 향수를 느꼈다. 그의 그림 속 푸르른 생명력을 간직한 풍경은 자연과 벗하며 살기 원한 화가의 또 다른 초상이자 원초적 이상향이다.
장욱진의 작품은 마치 초등학생이 그린 것처럼 단순하지만 그 속에 소박한 아름다움으로 조화로운 화면구성과 동양 철학 사상을 담고 있다. “나는 심플하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화가 장욱진은 평생을 자연 속에서 심플한 삶을 살면서 그림을 통해 동화적이고 이상적인 내면세계를 표현하였다.
이준 (1919~2021)
한국 현대미술의 태동기를 함께 한 1세대 미술가로 그는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 등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를 경험한 전후세대로, 수십 년간 교단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미술가이자 교육자로서 한평생을 보냈다.
이준은 초기 일본 태평양미술학교에서 수학하고 귀국한 초기에는 야수파적 화풍을 구사하며 구상작업을 하였으나 1957년 ‘창작미술협회’에 참가하면서 비구상 작업으로 전환하게 된다. 이후 김환기, 유영국 등과 더불어 비구상 회화를 개척해 구상 회화가 이끌던 한국 화단의 지평을 넓혔다. 1950년대부터 본인의 독자적인 기하학적 추상 화풍을 구축하고, 1970년대부터 정교한 색 분할과 색 띠가 나타나는 본격적인 기하 추상을 선보였다. 그는 기하학적 추상만 그린 것이 아니라 한때는 붓도 나이프도 쓰지 않은 맨손으로 그린 ‘핑거 페인트’로 <피에로>를 선보여 화제를 일으키기도 했으며, 기교를 억제하기 위해 대담한 면을 롤러기법으로 구사해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준의 작품은 자연에서 영감을 받되 그것을 자신의 직관으로 새롭게 해석하여 기하학적 패턴으로 표현한다. 수많은 색면들이 서로 중복되고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조화와 리듬감이 담긴 그의 추상은 삶을 향한 애정 어린 심상이 담겨있다는 평을 받는다. 특히 고향 남해의 자연 풍광은 원, 삼각, 사각 등의 순수 조형요소로서 이준의 기하학적 추상에 자연스럽게 녹아 들었다. 그는 “남해의 햇살이 비추는 바다의 빛깔과 아름다운 섬의 풍경이 항상 마음 속 깊이 자리잡고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래서인지 빛은 그의 추상에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아 다채로운 빛의 스펙트럼으로 표현되어 화면에 생동감을 부여하고 따뜻한 감각을 부여한다.
임직순, 화실의 한때, oil on canvas, 112x145.5cm,1986
임직순 (1921~1996)
‘꽃과 여인의 작가’로 불리는 임직순은 특유의 색채가 인상적인 작가이다. 임직순은 빛의 대비와 색채의 변조를 통한 유기적인 조화를 이루면서도 형식적으로 안정된 구도를 추구하였으며, 작품의 주제로 자연의 모습과 꽃과 여
인을 화폭에 담아내 궁극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생명의 힘과 그 내면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작품의 바탕을 인상파적인 미학에 두었지만, 그보다 더욱 현대적인 감각이나 시각의 기쁨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 임직순의 작품세계이다. 언뜻 보기에는 그를 색채화가로 보기 쉬우나 형태와 색채 화가 두 가지를 아울러 갖고 있다고 본다. 하나의 화상이 결정되면 그것에 알맞은 주조색을 설정하고 그 색을 중심으로 다양한 보색 관계가 성립된다. 그의 작품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는 대상이나 자연을 올바르게 관찰하고. 그 관찰을 토대로 하여 전개시킨 굳건한 화면의 구조이다.
그는 6·25 전쟁으로 중단됐던 국전이 1953년 휴전과 함께 재개되자 해마다 입선과 특선을 거듭하였고1957년 제6회 국전에서는 꾸준하게 노력과 부지런함으로 닦아온 그간의 역량을 인정받아 문교부장관상을 거쳐 실내의 소녀를 주제 삼은 풍부한 색채 구사의 「좌상」 이 대통령상을 타며 크게 각광을 받았다.
초기에는 좌상 형식의 인물과 풍경을 주로 그렸으며 작업할 대상인 인물과 자연을 면밀히 관찰하고 그 대상의 본질적 의미와 조형적 구도에 심혈을 기울여 작업하였고, 1980년대 중반 이후 대범하고 자유분방한 필치는 구상적인 형태에서 사물의 내적인 본질로 향하는 단순화된 선과 색을 이용한 형태로 조금씩 변화되었으며 꽃을 소재로 한 정물화 작업에 집중하여 꽃의 화려한 모습과 생명력을 작품에 구현하였다.
그는 조선대학교에서 선임 교수였던 오지호(吳之湖)처럼 색채 존중의 기법을 학생들에게 지도하여 자연주의 성향의 호남 서양화풍에 큰 영향을 미친 작가이다.
이대원 (1921~2005)
이대원 작가의 작품에는 진정으로 그리고 싶었던 충동과 남다른 심성의 자연관과 향토적 애정의 깊이가 진하게 묻어 나온다. 이대원은 어려서부터 뛰어난 그림 재능을 보이고 있었으나 뜻했던 미술학교 진학은 집안의 반대로 좌절하고 경성제국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림을 포기할 수 없었고, 화가의 길을 스스로 개척하려고 들었다.
전통적 미의식과 한국적 감성의 표출, 우리의 고화, 민화 민예품 등에 애정을 가지고 있던 이대원은 1960년대 전통적 미의식과 미의 유산의 본질을 자신의 현대적 화면에 도입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서예와 이조의 수묵화, 중국 청 초에 간행된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 등의 묘화법 등을 배워 1960년대 이대원은 민화 풍의 시도와 유채로서의 문인화 전통의 묵화 형식을 계승하고 1970년대 동양적 혹은 한국적 감성 표출을 위한 점묘다채 수법을 통해 한층 독자성을 키워나갔다.
그의 순수하고 밀도 짙은 감정 표현과 독특한 기법은 1980년대 중반 이후 더욱 생동감 넘치는 색채로 지향되어 독창적인 이대원 화법을 완성시켰다. 특히 그가 즐겨 그린 주제인 과일나무가 있는 농원 시리즈와 연못 풍경은 반복적인 화면이면서도 변화 있는 구도와 강렬하고 선명한 색채의 짧고 연속적인 붓 터치로 또 다른 내면세계의 조화로운 풍경 예술로 거듭 그려졌다.
프랑스 미술평론가 피에르 레스타니는 “이대원은 빛을 그린다기보다는 데생한다.”며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그의 나무 그림은 한국 수묵화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라고 평가했으며 부수처럼 쏟아지는 눈부신 색채의 향연에서 받는 감동적인 자연에의 귀의는 바야흐로 생의 허심한 경지에 이른 것이 아니냐는 극찬을 받고 있다.
홍종명 (1922~2004)
과수원 집 딸을 그리는 작가로 알려져 있는 홍종명은 일제 강점기 때 데이고쿠미술학교에서 수학한 뒤 한국전쟁 중 남한으로 자유를 찾아 내려온 평양 출신이다. 1951년 후퇴 때 제주까지 피난을 와 어려운 피난 상황에서도 제주시 칠성통에 ‘미술사’라는 화방을 열고, 오현중고등학교 미술교사로 일하는 동시에, 그림을 배우고자 하는 학생들을 가르쳐 제주 현대미술의 주역들을 키워냈다.
한국전쟁과 분단으로 이산이라는 아픔을 겪어 그의 작품에는 고향을 연상시키는 향토적 소재, 헤어진 큰 딸을 그리워하는 정서가 자연스럽게 담겨있다.
작가는 향토적 정서와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정립하였고 구상과 추상을 넘나들며 흙의 빛깔과 같은 색을 사용하여 고분벽화의 퇴락한 색조를 재현하려 했다. 그의 작품에서 간취되는 한국적인 특성은 거친 질감과 투박한 색채에 의해 초가집, 벽화와 같은 요소이며 질감이 남한에는 없는 고구려 고분 벽화를 상기시킨다는 점은 주목할 일이다.
문신 (1923~1995)
문신은 유년시절을 마산에서 보내고 1938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일본미술학교에서 회화를 공부한 후 고국으로 돌아왔다. 마산과 서울을 오가며 회화작가로 활동하다가 돌연 1961년 프랑스로 떠나 60년후반부터 기존에 하던 구상회화에서 벗어나 추상조각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는 도전과 실험을 통해 자신의 독특한 예술세계를 만들어 나가던 때로, 구와 반구, 선이 만나 반복하고 변화하며 표면을 매끄럽게 연마하여 문신 특유의 개성적인 조형이 나타난다. 1970년 프랑스에서 열린 국제 조각 심포지엄에 출품한 13미터 높이 나무조각 ‘태양의 인간’으로 조각가로서 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그는 선보인 브론즈, 나무, 석고 조각은 유럽 미술계에서도 독창성을 인정받고 조각가로서 명성을 떨쳤으며, 1980년 프랑스로부터의 귀화요청을 거절하고 귀국, 고향 마산에 정착하여 1995년 타계할 때까지 창작에 몰두했다.
문신 조각의 가장 큰 특징은 대칭-시메트리(symmetry)이다. 그러나 완벽한 좌우대칭이 아니라 미세하게 불균형한 차이를 만들어 자연스러운 밸런스를 열어 두는 대칭이다. 그는 곤충, 식물, 새와 같은 자연에서 영감을 받았고, 따라서 그의 작품에는 생명이 깃든 것들에 있는 자연스러운 곡선과 리듬감이 있다. 그는 이러한 조화로움이 생명의 근원이자 우주와 같다고 여겼으며 이를 깊이 탐구하여 확고한 자기만의 독창적인 세계로 발전시켰다.
그는 퍼블릭 아트라 불리는 야외 조각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1988년 올림픽 조각공원의 25미터 높이 작품으로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다. 1992년에는 파리 시립현대미술관에서 헨리 무어, 알렉산더 칼더와 함께 <세계3대 조각 거장전>에 참여해 조각가로서의 명성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또한 프랑스 정부로부터 예술문학 훈장인 ‘슈발리에’를 수상했고, 제11회 세종문화상을 수상했다. 1994년에는 프랑스 예술문화 훈장 ‘오피시에’를 수상했다. 이후 오랜 시간 직접 건축과 디자인을 하며 공들인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을 개관하고 이듬해인 1995년 타계했다. 이 미술관은 그가 염원했던 ‘인간이 살 수 있는 조각’으로 그가 미술관에 기증한 작품들과 함께 그의 50년 조각 인생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권옥연, 여인, 27.5x22cm, oil on canvas, 1980-1984
권옥연 (1923~2011)
화가 권옥연을 떠올렸을 때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그만의 개성은 사물을 인식하고 자신의 내면 속에서 걸러내어 이를 화면 위에 개성적 이미지로 발현시키는 개인양식을 심화한 결과이다. 그는 독자적인 자신만의 양식을 확립한 작가들을 동경하면서 “전람회장에 들어갔을 때, 작품보다는 사람이 먼저 보이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하였고 “흉내 낼 수 없는 자신만의 체취, 자신만의 시, 자신만의 노래”를 갖기를 원했다.
이러한 면모는 권옥연을 어떤 사조나 운동의 흐름 속의 하나가 아닌 권옥연 자체가 가진 고고한 개성으로 작품을 바라보게 한다. 그가 일본 제국미술학교에서 수학 후 돌아와 활동한 초기의 구상적 화풍에서, 50년대 후반부터의 추상적이고 초현실적인 양식의 화풍, 70년대 이후의 인물, 정물, 풍경의 구상적 화풍으로 회귀하기까지 변화의 과정 속에서도 그의 감수성에 바탕을 둔 ‘스타일’은 또렷하게 드러난다.
“권옥연의 목청을 그림 속 빛깔로 나타낸다면 오래된 기왓장을 닮은 청회색이 될 것이다”라고 평론가 황인이 말했듯이, 그의 그림 속 절제된 회색 톤을 자신만의 그림을 나타내는 특유의 포에지(poesie)로 자리 잡았다. 강렬한 원색이 없이도 단번에 눈길을 잡아끌고 오래 보게 하는 것은 그가 가진 예리하고 풍부한 감성을 갈무리하여 깊이를 더하고, 차분한 색채를 조화롭게 사용하는 뛰어난 역량 때문이다. 사물이 가진 고유의 색도 아니요, 현실 세계에 있는 자연의 색도 아닌 특유의 회색의 톤이 가득한 정적인 화면은 그가 가진 심상의 풍경이 지니고 있는 내면의 이미지들을 그려왔기 때문일 것이다.
정규 (1923~1971)
정규는 화가로, 판화가로, 도예가로 장르를 넘나들며 활발한 화단 활동을 하였다. 그는 20대에 일본 데이코쿠 미술학교에서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해방을 맞이했지만 곧 6.25가 터지자 부산으로 내려왔고 1953년 부산 르네상스 다방에서 첫 전시회를 열었다. 그는 이듬해 서울로 올라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55년 록펠러재단의 후원으로 국립박물관 부설 한국조형 문화연구소가 설립되자 연구원으로 활동하였다. 박물관에서 근무한 것이 계기가 되어 1958년에는 록펠러재단 초청으로 미국에 건너가 도자를 연구하였고 1963년 경희대학교 요업 공예과 교수로 부임하여 현대 도자 운동을 주도하였다. 정규는 박대순, 남상교, 이신자 등과 함께 한국공예가회를 발족시키고, 공예 운동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정규는 1953년 서양화, 1958년 목판화, 1960년에 도자기 전시를 열었던 데에서 확인되듯이 서양화가로 출발하여 판화가, 도예가로 영역을 넓혀 나갔다. 또한 미술비평과 장정 및 삽화 분야에서도 두각을 드러냈다. 특히 판화는 현대 판화계의 시대적 과제를 자신의 독자적 조형어법으로 발전시키는 성취를 보여준 몇 안 되는 작가 중 하나였으며, 평론가 이경성은 한국 현대 판화의 선구자 중 하나로 정규를 꼽았다.
또한 정규는 최순우, 이구열, 이경성 등 당대 미술 이론가 및 비평가들과 교류하며 비평가로도 활동하였다. 특히 그가 1957년 잡지 <신태양>에 연재했던 ‘한국 양화의 선구자들’을 통해 우리의 근대미술가들을 발굴하고 재정립하였다. 그는 시대의 흐름을 예리하게 인지하여 관통하는 비전을 가졌고, 우리 고유의 미를 찾아 현대화하며 차별화하는 것을 고민한 작가였다.
천경자 (1924~2015)
천경자는 누구와도 닮지 않은 독특한 화풍과 강렬한 에너지를 뿜어내는 컬러로 환상적인 작품세계를 확립한 작가이다. 그녀의 화가로서의 삶은 1940년 유학길에 올라 일본 동경여자미술대학에서 인물화를 익히고 1943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자신의 조부를 그린 작품이 입선하며 시작되었다. 귀국 후 1946년에 모교인 광주여고에서 첫 개인전을 열고, 이후 1949년 서울에서 개인전을 성공적으로 치르며 화가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그 무렵 동생의 죽음과 삶의 역경으로 인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린 1951년 작품 <생태>는 수십 마리의 뱀이 얽혀 있는 모습으로 화제가 되었다.
천경자는 자신의 삶의 희로애락을 작품을 통해 가감 없이 보여주었으며, 특히 여성으로서 삶이 가진 한과 슬픔을 화려한 색채를 통해 역설적으로 표현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받았다. 대표적인 작품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는 55세의 작가가 22세 자신의 과거 모습을 떠올리면서 그린 것으로, 그녀가 그린 작품 속 수많은 여인들은 모두 자신의 모습이 투영된 분신이다. “나는 종일 혼자 있어도 내 그림에 나오는 모델들과 대화도 하고 사랑도 나누니까 하루가 지루하지 않다”라며 자신의 그림을 목숨처럼 아끼고 사랑했고, 그림을 통해 삶을 구원받았다고 하였다.
또한 1955년 여인 소묘를 시작으로 출간했던 여러 수필들로 연애와 결혼, 그리고 여자이자 엄마이고 예술가로서 살아가는 자신의 경험과 생각들을 진솔하게 남겼으며, 1969년부터 유럽과 남미, 아프리카 등 세계 각국을 여행하며 이국적인 풍물에 영감을 받아 몽환적인 예술로 승화해서 표현하였다. 그녀에게 삶은 곧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떠나는 여행이었고, 2015년 타계할 때까지 멈추지 않고 자신만의 꿈과 환상을 쫓아 생명력 넘치는 아름다운 작품을 피워냈다.
변종하, 새, 46x53cm, mixed media on relief laid on canvas, 1980년대
변종하 (1926~2000)
변종하는 한국적 이미지를 서정적이고 은유적으로 담아낸 작가이다. 그는 1950년대 서울에서 활발히 작품을 발표해오다 1960년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의 아카데미 드 라 그랑드 쇼미에르와 소르본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962년 저명한 평론가이자 시인인 르네 드루앵(Rene Drouin)과 만나면서 이전의 표현주의적 경향에서 벗어나 작품 세계에 큰 전환을 가져왔다. 르네가 말한 <테푸이예(depoailler)>, 껍질을 벗긴다는 뜻의 단어는 화가에게는 군더더기를 빼고 본질에 도달해야 한다는 의미로, 변종하 작품세계의 평생의 테마가 되었다. 르네 드루앵에게 발탁된 후, 그는 런던과 파리, 뮌헨 등 유럽의 갤러리와 미술관을 무대로 활동하며 일그러진 인물상을 해학적으로 표현한 <우화>와 <돈키호테>연작 등을 발표했다.
변종하는 귀국 이후 1970년대부터는 부조와 같은 독특한 요철의 화면에 물들이듯이 채색을 하는 ‘요철회화’의 기법을 새롭게 시도하였다. 1980년대에는 한국의 자연에서 따온 모티브인 꽃, 새, 나무, 달, 잠자리 등 우리에게 친근한 풍경을 특유의 시적 서정성을 담아 간결하고 소박하게 표현하였다. 이후에도 판화, 분청사기나 청화와 같은 도화(陶畵)까지 끊임없이 새로운 주제와 다양한 기법 등을 펼쳐 보였으며, 변종하만큼 이렇게 전 생애를 걸쳐 회화의 새로운 길을 탐구한 화가는 보기 드물다. 또한 그의 작품 속 간결하고 자연스러운 형태와 부드러운 색감, 독특한 문학적 서사가 있는 구성은 항상 본질에 다가가고자 했던 화가의 심상 그 자체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