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정보
■ 전시개요
전시일정 : 2023.05.18.(목) ~ 06.04.(일)
초대일시 : 2023.05.18.(목) 16:00
전시장소 : 아트센터고마(충청남도 공주시 고마나루길 90)
관람시간 : 10:00 ~ 18:00 (매주 월요일 휴관)
문의전화 : 041-852-9806
<공주문화원 초대전>
함축적인 이미지 속에 담긴 자연미와 힘의 표현
-신항섭(미술평론가)
그림은 크게 실재하는 사실을 재현하거나 재해석하는 표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실재하는 사실을 재현하는 건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는 사실주의 또는 자연주의의 범주에 든다. 실재하는 사실을 재해석하는 건 인상파나 야수파가 있으며, 그 밖에 초현실주의와 환상주의 그리고 모더니즘 미학을 따르는 작품 경향도 이에 속한다. 재해석하는 그림은 형태를 단순화하거나 생략, 그리고 변형하거나 왜곡하기도 한다. 모두 사실성을 벗어나 자유로운 조형적인 해석을 전제로 하는 표현기법 또는 표현양식을 일컫는다. 이는 주정적인 이미지와 연관성이 있다. 이성적인 접근보다는 감정의 표현을 중시하는 주정적인 성향의 그림은 대체로 사실성을 개의치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사실성을 경시하는 건 아니다. 어느 면에서 실재하는 이미지보다 더 강렬한 사실성은 비재현적인 그림에서 더 많이 볼 수도 있다.
김배히의 그림은 비재현적이다. 다시 말해 실재하는 사실을 보고 그로부터 느끼는 감정 표현에 비중을 둔다. 물론 실재하는 사실을 골격으로 하여 살을 붙이거나 빼는 식으로 재해석의 과정을 거친다. 그래서일까. 풍경화의 경우 어느 곳에서 소재를 취했는지 알 수 있을 정도이다. 즉 전체적인 이미지는 특정의 공간임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의 이미지를 남긴다. 설령 실재와 완연히 다른 자의적인 해석에 대한 유혹이 있을지라도 거기에 넘어가지 않는다. 어느 작품이나 실재하는 사실이 주는 감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현실에서 보고 느낀 사실과 감정을 어떻게 하면 그대로 그림 속에 투사시킬 수 있는가 하는 데 있다. 단지 그림을 위한 그림이 아니라, 그 자신이 보고 느낀 사실과 더불어 그로부터 일어나는 감동을 고스란히 전하고 싶다는 욕망의 표현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이때 너무 많은 것을 보여주면 시선의 분산이 불가피해진다. 따라서 구도라든가 이미지가 비교적 단출하게 느껴지는 건 많은 부분을 생략하거나 단순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재하는 소재 및 대상으로부터 감응하는 감정, 즉 감동이 쉽게 이입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물론 실재하는 풍경일지라도 그림은 어차피 평면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일종의 시각적인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재현적인 그림일지라도 결과적으로는 눈속임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더라도 그는 현실과 다른 그림의 세계, 즉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점을 명확히 한다. 조형적이라는 용어는 형태를 만드는, 즉 그림을 그리는 행위 그 전반을 의미한다. 그의 작업에서 조형미에 대한 관심사가 어떤 식으로 드러나는지 알아내기는 어렵지 않다.
그는 언제나 간결한 구도를 선호한다. 자연풍경이거나 인물이거나 정물이거나 대체로 간단한 구도이자 구성이다. 설사 현실적으로 복잡해 보이는 풍경일지라도 단순하게 압축한다. 적지 않은 부분을 생략하거나 단순하게 처리하여 단출하게 보이도록 한다. 이는 시각적인 인상과 결부되는 문제인데, 복잡한 구도보다는 간명한 구도가 주는 인상이 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이는 걸 전부 담기보다 간결하게 함축함으로써 시각적인 긴장감을 높일 수 있다. 이는 작품에 대한 인상에도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그의 경우 초기에는 비교적 사실적인 묘사에 근사한 작업을 했다. 사실 묘사는 시각적인 설득력이 강하다. 실제처럼 착각하게 묘사하는 데 대한 일반적인 관심은 기술적인 완성도에 대한 감탄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사실 묘사에 빠져서는 자신만의 조형미를 관철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보고 느낀 사실을 표현하는 데 집중하게 됐다. 많은 부분을 생략하거나 단순하게 처리하는 가운데 사실성을 중심적인 가치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어차피 실재하는 사실 또는 대상으로부터 받은 인상이나 감동을 표현한다는 뚜렷한 목표가 있기에 그렇다.
이러한 자각이 있고부터 대담한 필치를 구사하게 되었다. 사실적인 형태 묘사에서 자유롭게 되자 색채에의 관심이 높아졌고, 터치도 활달하게 전개될 수 있었다. 형태 묘사에 대한 강박관념을 벗어남으로써 세부를 의식하지 않는 담대한 표현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달리 말해 현실적인 사실을 그대로 보여주지 않고도 아름다운 그림으로서의 요건을 갖추어가는 게 그의 작업이 지향하는 핵심이다. 여행을 통해 새로운 풍경을 스케치하고 거기에서 받아들인 인상이나 감동의 여운이 사라지기 전에 작업을 끝내고자 한다.
그러기에 감정의 흐름을 타는 터치는 빠르게 전개된다. 작품의 전체적인 인상을 결정짓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 터치의 흐름이다. 머뭇거리거나 주저하지 않을 수 있는 건 심상의 명확성과 연관성이 있다. 어떤 풍경과 마주했을 때 그림으로 옮겨보고 싶다는 욕망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 순간적인 욕망이 캔버스를 펼치게 하거나 스케치를 유도한다. 그 과정에서 눈앞에 두고 있는 풍경에 대한 강렬한 인상이 심상으로 변환하게 된다.
따라서 현장에서 작업을 끝내거나 화실에 돌아와 작업을 하면서 심상을 끄집어내기만 하면 된다. 현장에서 캔버스에 직접 그리거나 간단하게 스케치함으로써 이 과정에서 개략적인 구도 및 구성이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작품에 따라서는 전체적인 화면에서 형상이 아주 작아 보이거나 적은 경우가 있는데도 심심하다거나 싱겁지 않다. 이는 사실성을 중시하는 조형적인 관점과 무관하지 않다. 다시 말해 전체적인 구도 및 이미지에서 사실성이 그림의 골격을 형성케 하려는데 집중한다. 물론 눈에 보이는 그대로 묘사한다고 해서 반드시 사실성이 보장되는 건 아니다. 한마디로 많은 부분에서 생략하거나 단순하게 표현할지라도 사실적인 느낌이 강하게 느껴지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의 작업에서 감지되는 사실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처럼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시선을 유도하는 구도는 원근감과 함께 아득히 먼 과거의 시간을 되살리는 정서적인 효과가 있다. 먼 곳에서 아련히 보이는 시골집을 통해 문득 추억 속의 어느 시점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시간과 공간을 하나의 개념으로 묶는 정서적인 표현에 따른 결과이다. 원경이라는 구도 자체가 지닌 내적인 정서는 그림이 단지 시각적인 이미지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높은 산 아래 나지막이 앉아 있는 시골 마을풍경도 마찬가지다. 어느 작품이나 세부적인 묘사를 지양하는 그의 작품은 묘하게도 감상자의 마음을 흔드는 힘이 있다. 이는 향수 또는 추억과 결부된 정서가 짙게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지 싶다. 구체적인 묘사를 지양했을 때 현실에서 아득히 멀어진 추억의 어느 시간과 마주하도록 이끄는 힘이 작동한다. 이는 어쩌면 현실에서 볼 수 있는 사실적인 이미지를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생기는, 즉 모호하거나 선명치 않은 이미지 때문이리라.
이에 반해 근경, 즉 눈앞에 존재하는 소재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풍경의 경우, 근경과 원경의 대비를 통한 공간 해석이 돋보인다. 풍경에서 더러 쓰이는 구도이긴 하지만 그의 작업에서는 자주 볼 수 있다. 유사한 경향의 작품 숫자가 많다는 건 의도적인 구도임을 말한다. 작품 하단에 모란, 해바라기, 억새꽃, 파꽃, 도라지꽃, 모과나무 등 꽃과 과일나무를 배치하고 화면 상단에 나지막한 시골집들을 배치하는 구도이다.
이처럼 근경과 원경을 명확히 구분하여 배치하는 구도는 일반적인 화가들이 선호하는 건 아니다. 어느 면에서는 그만의 독특한 구도 감각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화면 상단에 공간적인 여유 없이 바짝 올려붙이는 시골집들은 화면에서 아득히 사라질 듯이 보인다. 근경과 원경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극단적인 대비는 시각적인 압박에서 벗어나는, 즉 카메라의 밀고 당기는 줌렌즈의 기능과 같은 시각적인 효과가 있다. 근경과 원경의 극단적인 대비는 풍경에 대한 그의 독특한 구도 감각이다.
또한 그의 작업에서 풍경과 함께 주목할 장르의 하나는 인물화이다. 그 자신의 주변 인물과 바닷가 여인들 그리고 누드로 나뉘는 인물화는 대상을 통해 받아들이는 인상을 중시한다. 이밖에 전통 춤사위를 감각적인 이미지로 펼치는 인물화도 눈길을 끈다. 전통 춤사위를 소재로 한 인물화는 화려한 의상이 지어내는 원색적인 색채이미지를 표현하는 데 주력한다. 여기에서는 색채 포름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원색적인 색채 포름이 지어내는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한껏 강조하려는 것이다.
인물화에 공통으로 드러나는 점은 색채 포름이다. 사실적인 묘사 중심이 아니라 그 인물에서 받아들이는 인상과 색채이미지 표현에 비중을 둔다. 초상화 형식의 주변 인물상은 사실적인 묘사는 아닐지언정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묘사한다. 인물의 형태에 집중하기보다는 전체적인 분위기와 색채이미지에 의미를 둔다. 보이는 사실의 재현임에도 배경이라든가 색채이미지는 자의적으로 선택한다. 부분적으로 색채 포름과 같은 추상적인 이미지를 도입함으로써 단순명쾌한 인물상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어촌의 일상적인 삶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바닷가 여인들을 대상으로 한 인물화는 현장감이 넘친다. 그 어떠한 기교를 덧붙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포착한다. 밝은 햇빛이 쏟아지는 해변에서 조개를 캐거나 생선을 처리하는가 하면, 물질 나가는 해녀들의 일상적인 삶이 활기차게 펼쳐진다.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강인한 바닷가 여인들의 건강한 일상의 단편들이다. 구태여 아름답게 표현하지 않더라도 삶에의 진정성이 담긴 생활상이 드라마처럼 다가온다.
누드도 숫자가 적지 않다. 여체는 그 자체로 신의 선물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아름답다. 따라서 구태여 아름다운 포즈를 취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러운 포즈 그 자체로 아름답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려는 듯싶다. 그처럼 꾸밈없는 포즈와 표정이 자연스럽다. 어쩌면 공간적인 여유를 두지 않은 채 화면에 가득 채우는 구도는 여기에서 비롯되고 있는지 모른다. 누드에 대한 일반적인 선입견을 불식시키기라도 하듯 당당한 포즈가 인상적이다. 그의 누드는 여체가 지닌 양감이나 곡선 그리고 피부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사실 묘사와는 다른, 건강하고 자연스러운 여체에서 느끼는 힘, 즉 생동감을 표현하는 데 의미를 둔다.
그의 작품 가운데 초상화 형식의 인물화와 작은 꽃들 그리고 고양이를 소재로 한 일련의 작품들이 있는데, 모두 손수 가꾸는 작은 정원에서 피어나는 계절 꽃이나 과일나무가 배경을 이룬다. 이와 같은 소재와 인물은 소소한 일상, 즉 개인적인 삶의 일기일 수도 있다. 사시사철 다른 모양으로 바뀌는 작은 자연, 즉 정원을 통해 생명의 힘과 아름다움에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 이러한 일상적인 삶이 창작활동에 큰 활력으로 작용하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