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 6일(화) 부터 2023년 8월 27일(일) 까지 한국·독일 수교 140주년 특별기획전 ‘Close Society_밀접한 사회 展’ 을 개최한다. 개최 목적은 지난 140년간에 걸쳐 축적된 한국과 독일의 우호 협력 관계를 기리고, 양국의 미래를 연결하며 결속을 희망하는 위한 목적으로 양국 교류 활성화에 협력 등을 위해 기획 되었다.
이번 전시는 ‘관계’라는 키워드로 예술가들의 시선을 빌어 코로나 19 이후의 사회를 들여다보고자 하는 전시이다.
일정 공간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관계에서 이뤄지는 모든 것을 사회라 한다면, 인류사에 유례없던 코로나19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 여전히 코로나 변종에 관한 뉴스가 가끔 등장 하곤 있지만, 황망하게 죽음을 목도했던 그 시절에 비하면 점차 사그라지는 모양새이다. 전염병이 등장했을 때 인류는 인간이 인간을 서로 멀리하는 방식으로 인류 문명사에서 가장 모순적인 형태로 개인을 고립시키기 시작했다. 이 주제는 인간의 기본 단위를 부정하며 무언가 부자연스럽고 불안한 뉘앙스를 생산하는가하면, 사회·경제적 구도 속 인간 문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예고하기도 한다.
이러한 시점에서 마련한 이번 전시는 사회 경제적 구도의 인간 문화 속 ‘관계’에 대해 ‘예술’이라는 매개를 통해 다양한 관점을 드러내고 예술가 6인의 60점 작품을 소개하는 기획으로 회화, 조각, 영상, 설치, 디지털아트, 설치미술로 구성됐다.
참여 작가는 케스틴 세쯔(Kerstin Serz), 글랩 바스(Gleb Bas), 윤종석(Jongseok Yoon), 베티나 바이스(Bettina Weiss), 임정은(Jeoungeun Lim), 박종규(Jongkyu Park)로 이들은 예술가 자신들의 시선을 빌어 1전시실에 ‘틈에서_우연성에 깃든’, 2-3전시실에 ‘틈에서_적극적 탈주’란 테마로 작품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티저 영상
AMplanner Artdirector 에이엠플레너
전시총괄감독 유영동
이번 전시는 한독 수교 140주년을 기념하여 유럽과 한국 문화를 연결하는 양국간의 문화 교류를 통해 오산 시민들의 문화 복지 환경을 증대하는것에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독일과 한국은 전쟁의 상혼을 이겨낸 국가로서 서로 유사한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독일과 한국은 국가와 국가를 잊는 지리적 위치해 있어 역사적으로 수많은 전쟁으로 인해 상처를 통한 다문화가 공존하는 곳입니다. 특히 전쟁 후 지역적 특성으로 전쟁 피해로 유랑민이 되어버린 인구가 가장 많이 밀집되어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로 인해 역사적으로 유럽에서 다양한 대중 예술 문화가 가장 발달된 곳이기도 합니다.
독일은 2차 대전 후 분단된 독일의 구 동독과 서독을 잊는, 전 세계인들이 통일을 염원하며 자유를 상징하던 소통 공간으로 유명했던 곳이었습니다. 전쟁 후 패허가 된 도시 곳곳에 문화 예술인이 자리하여 새로운 도시 문화를 형성하던 곳이기도 합니다. 그로 인해 다문화가 서로 교류하며 근 현대 문화 예술의 중심지로 발 돋음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곳입니다. 현재 전 세계 문화 예술인들의 집결지 이기도 하며 다양한 국제 문화 행사가 자유로이 이루워지는 곳입니다.
한국은 역사적으로 동아시아의 다양한 문화의 시작점이자 교류의 통로입니다. 전쟁 후 실향민들의 밀집 지역이었으며 아픔의 역사를 뒤로한 채 국가 재건의 기초틀을 형성한 곳이며 국제화 사회로 가는 척도를 마련한 곳입니다.
이번 전시의 목적은 회화, 조각, 영상, 설치, 디지털 아트,,등 다양한 작업을 하는 예술가들에게 전시공간을 지원 함으로서 다채로운 기회의 발판을 제공하고 국제 교류를 통한 다문화 예술의 공간을 제공합니다. 이번 행사를 통해 한국과 독일의 새로운 활동 영역을 구축함으로서 장기적인 국제 교류 행사로 발 돋음 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될 것이며, 한국과 유럽의 새로운 활동 영역을 구축함으로서 장기적인 국제 교류 전시 행사로 나아갈 수 있는 통로가 될것입니다.
독일 3인의 작가와 한국 3인의 대표 작가를 구성하여 두 나라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의 현시대 삶을 읽어나가는 시각을 통해 지역성을 공유하고 재해석하는 전시 입니다.
밀접한 사회 展
Close Society 밀접한 사회는 ‘관계’라는 키워드로 예술가들의 시선을 빌어 코로나 19 이후의 사회를 들여다보고자 하는 전시이다. 일정 공간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관계에서 이뤄지는 모든 것을 사회라 한다면, 인류사에 유례없던 코로나19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 여전히 코로나 변종에 관한 뉴스가 가끔 등장하곤 있지만, 황망하게 죽음을 목도했던 그 시절에 비하면 점차 사그라지는 모양새이다. 전염병이 등장했을 때 인류는 인간이 인간을 서로 멀리하는 방식으로 인류 문명사에서 가장 모순적인 형태로 개인을 고립시키기 시작했다.
마스크를 벗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지금. 역설적으로 사회는 다시 한번 ‘개인’을 강조한다. 특히 ‘소비에서 개인’은 ‘트렌드’라는 미명 아래 대상화되고 있다. 일견 우리가 경험했던 세계화는 끝났고, 모든 것이 점차 분절되는 사회적 현상과 부합되는 것처럼 보인다.
다만 현상을 규정하기 위한 정의를 내리기 전에, 그것들을 산업 또는 서비스의 이름으로 다루기 전에, 지나간 사건의 후유증쯤으로 치부되기 전에, 진정 우리는 ‘개인’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끝끝내 가져가야 할 무엇을 찾을 수 있을까.
코로나 19가 창궐했던 당시 최선이었던 ‘고립’은 사회가 무엇으로 유지될 수 있는가를 명백히 보여주는 근거가 되었다. 제한적인 일상과 단절된 교류는 범위나 깊이와 관계없이 ‘연결, 관계’에 대한 욕구를 확인하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파편화되고 있는 현상은 오히려 조각날수록 한 개인의 일상에 무수한 개인이 관련되어 있음을 발견하는 일-온라인상에서 클릭 한 번으로 물건을 사고, 새벽에 물건을 받아볼 수 있는 이런 시스템-의 연속이다. 이렇듯 개인과 개인이 연결될 때, 신체적 감각이 거세된 비가시적 관계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무수한 개인을 잊기에 십상이다. 그 길에는 타인뿐만 아니라 나 또한 그렇게 잊힌다. 보려 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일이고, 보려 한다면 수만 가지의 방법으로 보게 될 것이다. 여기 예술가들이 만들어 내는 ‘보려 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관계해보자.
틈에서_우연성에 깃든
섣불리 말로 정의하기 이전에 우리가 이미 자연스럽게 ‘하고 있는 것’이 있다. ‘보는 것’이 그것인데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또는 우리가 믿고 있는 것에 영향을 받는다.”고 말한 존 버거(John Berger)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일상을 쉬이 놓치는 점을 잘 알고 있다.
틈을 포착한다는 건 능동적 행위를 전제한 것으로 예술가는 벌어진 공간에 개인의 신체적 감각과 서사에서 비롯된 형상을 우연하게 등장시켜 새로운 공간의 주인이자 이미지로 만든다.
Kerstin Serz의 작업에서 등장하는 각각의 생명체들은 우리가 아는 것들이지만, 그것들이 결합하여 만들어 낸 형상은 마치 과거 자연과 인간이 구분되지 않았던 인류의 오래전 이야기처럼 보인다. 우리의 인식구조가 이름을 붙이며 구별하고 소외시켜버린 그것들, 끊임없이 나눴던 모든 것들을 우리의 일상적 순간에 등장시킨다.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시간의 틈에서 자연적 요소들은 불현듯 튀어 올라 함께 있는 방식으로 세계를 재구성해나간다. 서로의 일상에 ‘겹쳐’있음을 한 사람의 얼굴에서 찾아내기도 한다.
Gleb Bas는 주변 인물의 역사적 총체성을 드러내기 위한 방식으로 화면 위에서 천을 덧대어 여러 번 겹칠한다. 그렇게 화폭 위에서 수많은 요소의 간섭과 중첩으로 맺어지는 축적이 지나고 나서야 한 사람이 등장한다. 개인은 매끄러운 표면으로 완성된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있다’라는 이렇게 화폭 위에서조차 수많은 요소 간의 간섭과 중첩으로 맺어진다. 때론 한 사람이 선택한 시간-날짜를 중심으로 관계를 시도해 수많은 경우의 일상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윤종석의 작업에서 등장하는 대상들의 교집합은 날짜이다. 해당 날짜에 포착한 이미지와 과거 흘렀던 시간을 하나의 구조로 엮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이러한 무한에 가깝지만 안개와 같은 조합에 이야기에 구체성을 띠게 만드는 것은 하나하나 찍어 넣는 점이다. 확률로써 존재하나 관측이라는 간섭행위로 비로소 결정되는 양자물리학처럼, 조합에 의해 다수의 가능성으로 펼쳐지는 다중우주처럼, 점을 찍는 행위는 수많은 경우의 수를 가진 미래를 현재에서 하나의 일상으로 잡아채며 확고히 펼쳐나가는 적극적 관계의 실마리다.
틈에서_적극적 탈주
일상이 더는 일상이 되지 않는 순간, 예술가들이 포착하는 일상의 틈은 이면의 다양한 양상을 앞으로 밀고 나와 관계의 구체성을 짓기 시작한다. 그리고 벌어진 틈에 머무는 방식으로 반사적 행동을 하지 않고 멈춤의 시간 속에서 관계의 열쇠를 찾아내어 외연을 넓혀 나간다.
BETTINA WEISS의 기하학적인 형태는 불투명하고 밝은 색채의 반복적인 자리 잡기와 밖으로 뻗어 나가는 듯한 선의 요소 간 상호 작용을 통해 역동적이면서도 개방성을 발산한다. 어디 하나 닿지 않은 곳이 없는 연결의 진동은 폐쇄적이거나 닫혀있지 않고 화면 밖까지 연결되는 일종의 시스템으로써 경험케 한다. 강조하는 개인의 삶 이면에 수많은 개인의 삶이 함께 있음을 느끼게 하는 전율이다. 서로를 존재케 하는 일은 이렇듯 고정적 위치가 아니라 방향성을 띤 움직임 자체일 것이다.
임정은의 <깊이의 단서>에서도 기초적인 조형 요소를 토대로 보이는 것을 존재케 하는 것들의 단서를 모색하는 작업을 시도한다. 위치정보만 가지고 있는 0차원의 점이 1차원의 선으로 2차원의 면으로 나아가는 형태와 더불어 진출과 후퇴라는 색의 속성을 단서로 시각화한다. ‘있음’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보이는 것들의 이면을 알기 위해서는 관성적인 시선에서 버리고 자신의 위치를 벗어나 방향성을 담보한 움직임을 요청하고 있는 셈이다.
박종규의 <수직적 시간> 또한 움직임을 내포하고 있다. 그는 화면에 발생하는 노이즈를 화폭에 옮겨 담고 있는데, 노이즈는 기계의 정상적 운영을 방해하는 신호로써 교정 또는 수정, 차단, 없애야 하는 것으로 여긴다. 일상의 노이즈는 도처에서 발견된다. 그러한 노이즈는 특정한 대상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무차별적으로 발생하는 노이즈는 사실 나일 수 있다. 내가 그들이 될 수도 있는 순간이 있음을 알리는 신호로써 화폭에 옮겨 담는 전환의 움직임이다.
<누스피어>는 집단지성이 사이버 공간에서 만들어가는 인류통합의 세계, 곧 집단지성의 세계를 가리킨다. 개인을 강조하면 강조할수록 개인이 사라지기 더욱 쉬운 구조일 수 있다. 외부적 변화나 자극에 그대로 휘말리기보다, 잠시 멈춰 서 볼 일이다. 예술가들이 일상에서 포착하는 틈에서 짓는 에너지처럼, 틈에 깃들어 관계하길 바란다.
작가약력
케스틴 세쯔 Kerstin Serz
최종학력
2000 독일 베를린 국립예술 대학교 시각예술 대학원
Prof. Leiko Ikemura 라이코 이케무라 교수
개인전
2019 Space MM, 서울, 한국
2018 Magic Garden, 분도갤러리, 대구
스태그비틀의 신부. 파크 갤러리, 베를린
2017 High Light Transmission, AMplanner, 베를린
2016 소리없는 나라, P103, 베를린
단체전
2022 끝없는 여름, Kleiner von Wiese 갤러리, 베를린
2021 Lusus Naturae, BCMA 갤러리, 베를린
2020 이중성의 문제. 파울 플라이슈만 하우스 갤러리, 베를린
장학금
2022 Uwe Lüders 예술 장학금, Sparkassen-Lüneburg 재단
2006 - 2008 베를린 칼-호퍼-게젤샤프트 스튜디오 장학금
2006 - 2007 Dorothea- Konwiarz- Foundation 장학금, 베를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