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전시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전시상세정보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김여운 : 거기 있다

  • 상세정보
  • 전시평론
  • 평점·리뷰
  • 관련행사
  • 전시뷰어


‘일상의 형상’
2023년 하반기 기획공모 선정작가전
2023. 7. 19 (수) ~ 7. 24 (월)




1. 전시개요 

■ 전 시 명: 2023년 하반기 갤러리 도스 '일상의 형상' 기획공모 선정작가展
             김여운 ‘거기 있다’展
■ 전시장소: 서울시 종로구 삼청로 7길 37 갤러리 도스 제1전시관(B1)
■ 전시기간: 2023. 7. 19 (수) ~ 7. 24 (월) 



2. 전시 평론

이름 모를 들풀의, 혹은, 이름도 없는 것들의 윤리학 

고충환 / 미술평론 

전시장에 들어서면 크고 작은 텅 빈 캔버스가 걸려있다. 하얀 캔버스에 하얀 사각형을 그린 절대주의 회화인가(말레비치). 아니면 회화가 가능한 필요충분조건을 평면이라는 최소한의 조건으로 환원한 미니멀리즘인가(클레멘테 그린버그). 그도 저도 아니면 텅 빈 캔버스를 보고 당혹해할 사람들이라는 상황 논리를 겨냥한 개념미술인가. 미술사에서 보고 들은 적은 있지만, 실제 전시를 통해 확인해본 적은 없는 만큼 텅 빈 캔버스가 꽤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환원주의 혹은 금욕주의와 결합한 후기 미니멀리즘이라고 불러도 좋겠군, 하고 돌아서려는데 얼핏 화면 속에 알 수 없는 얼룩이 보인다. 사실은 캔버스 천을 찢고 그 틈새로 고개를 내민 싹이 그려져 있었다. 실제로 전시장에 돋보기를 비치해놓기도 했지만, 그 실체가 손에 잡힐 듯 사실적이고 정교하게 그려져 있었다. 떡잎에 난 보송보송한 털이며, 캔버스가 찢어진 가장자리의 올 하나하나가 오롯한 것이, 그리고 여기에 그림자마저 생생한 것이 영락없는 실물 같았다. 작가가 오며 가며 본 이름 모를 들풀이라고 했고, 실물 크기 그대로라고 했다. 
그러나, 저 큰 캔버스에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만큼 작은 들풀 하나를 그렸다니. 정말 비효율적이군, 이라고 했지만 정작 작가는 그 말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작가는 회화적 관습을 문제시하고 있었다. 이미지 과잉의 시대에, 의미 포화 상태의 현대미술에 대해 꼭 필요한 말과 이미지로 한정하고 싶었다고 했다. 스펙터클 한 시대에 던지는 검소한(혹은 같은 의미지만 검약한) 말이라는 점에서 작가의 한정에는 윤리적인 측면이 없지 않다. 
여기에 작가는 적정 거리 혹은 심적 거리를 문제시한다. 그림을 더 잘 보기 위해서 요구되는 거리를 의미하며, 그림을 넘어서 삶의 태도와 같은 상황 논리에 확대 적용되는 개념이다. 작가는 그 거리, 그 개념을 수정하는데, 작가의 그림에 무엇이 있는지 보기 위해선 그림에 바짝 다가가야 한다. 주의 깊게 보아야 하고, 세심하게 보아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보인다. 그렇지 않으면 정작 보아야 할 것을 못 본 채, 아니면, 아예 아무것도 못 본 채 지나치기 쉽다. 
무슨 말인가. 앞서, 이름 모를 들풀이라고 했다. 이름도 없는 것들이라고 해도 좋을, 사실은 지천이지만 없는 거나 매한가지인 존재들이다. 이 미물들이 봄이면 언 땅을 깨고 고개를 내민다. 보도블록 사이로 뿌리를 내리고, 시멘트 바닥을 뚫는다. 창틀에 쌓인 먼지에서도 자라고, 마침내 캔버스 천을 찢고 나온다. 혹자는 이처럼 새싹이 언 땅을 깨고 나오는 소리가 들린다고도 했지만, 실제로 소리가 들린다기보다는 심적으로 공감하는 소리를 듣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존재에 대한 공감이다. 존재의 살림살이를 보기 위해선, 존재가 사는 소리를 듣기 위해선 존재에 대한 공감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정작 현실에서 그 존재는 이름도 모르고, 이름도 없다. 조르조 아감벤은 법으로부터조차 보호받지 못하는 인간을 호모 사케르, 그러므로 발가벗은 생명이라고 했다. 작가가 그려놓고 있는 이름 모를 들풀들, 그러므로 이름도 없는 존재들에 대한 유비적 표현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어쩌면 우리 미물들 그러므로 타자들이 사는 치열한 삶의 소리를 보고 듣기 위해선 주의 깊고 세심해야 한다. 겨우 보이고, 바짝 다가가서야 비로소 보이는 작가의 그림의 숨은 뜻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는 다시, 타자의 삶에 대해 깊고 세심한 주의를 요청해오고 있다는 점에서, 윤리적인 측면이 있다. 
그런데 정작, 이처럼 이름 모를 들풀들, 그러므로 어쩌면 이름도 없는 존재들 하나하나에 작가는 이름을 불러주고 있었다. 안젤리나, 하나, 소피, 안나, 에바, 루이스, 미아, 버지니아, 리사와 같은. 그리고 관객들도 작가처럼 저마다 풀들에게 이름을 불러주라고 요청한다. 연대를 요청해오는 관객참여형 프로젝트다. 내가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는 김춘수의 시를 떠올리게 된다. 처음부터 이름도 없는 것들은 없다. 처음부터 무의미한 것들은 없다. 처음부터 미물(타자)들은 없다. 다만 이름을 불러주는, 의미를 발견하는, 타자를 인정하는 누군가가(혹은 행위가) 없었을 뿐. 그러므로 이름 모를 풀들에게 이름을 불러주는 이 프로젝트에는 타자(성)의 초대가 있고, 자기_타자의 맞아들임이 있다(에마뉘엘 레비나스). 

그리고 여기에 집주인이 있고, 세 들어 사는 사람이 있었다. 집주인은 여하한 경우에도 집에 못을 박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런데, 세 사는 사람이 이사 가고 난 뒤에 벽에 박힌 못을 발견했다. 아마도 집주인마저 눈치채지 못할, 쉽게 찾기는 힘든, 후미진 곳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서도 삶의 방법은 찾아지고 있었고, 치열한 삶은 계속되고 있었다. 내가 미처 모르는 사이에, 어쩌면 나의 인식(보다는 관심)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도 치열한 삶을 살고 있었던 이름 모를 들풀처럼. 그러므로 작가가 그려놓고 있는 못 그림(정확하게는 벽에 못을 박은 그림)은 제도가 그어놓은 금을 넘어서 삶의 방책을 찾아내고야 마는, 여하한 경우에도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당위처럼 읽히고, 금기와 위반의 알레고리처럼 읽힌다. 그렇게 작가는 이름 모를(그러므로 어쩌면 이름도 없는) 들풀 같은 존재들의 치열한 삶의 순간에 주목하게 만들고, 후미진 구석에서도 계속되는 삶의 현실에 눈뜨게 만든다. 

그리고 여기에 세 개의 기둥이 서로 기대어 서 있는 입체 설치작업이 있다. 세 개의 기둥이 마치 한 몸인 양 하나로 묶여 있는데, 하얗게 도색 된 표면에는 Life와 Variable(변수)과 같은 영문자가 기록돼 있다. 아마도 삶의 지침을 적어놓은 것일 터이다. 삶의 표상 혹은 푯대라고 해야 할까. 혼자서는 삶을 살아갈 수가 없다. 서로 기대어야 하고, 협동해야 하고, 연대해야 한다. 그 과정에 예기치 못한 변수가 매개될 수 있다. 삶이 꼭 그럴 것이다. 김지하는 삶을 기우뚱한 균형, 그러므로 유격에 비유했는데, 아마도 변수의 또 다른 표현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작가는 인간다움이 본인의 작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라고 했다. 여기서 작가가 추구하는 인간다움이란 인간중심주의를 의미한다기보다는, 제도에 반하는 인간, 제도의 잣대가 아닌 자기의 잣대로 서는 인간, 그러므로 자율적인 인간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작업은 자율적인 인간 간 연대와 협동을 의미할 것이다. 형태는 다르지만, 두벌의 옷이 마치 한 몸인 양 하나로 들러 붙어있는 작업을 매개로 협동을 주제화한 요셉 보이스의 작업을 떠올리게 된다. 계몽(교육)을 매개로 사람들의 의식에 변화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요셉 보이스의 사회조각에 대한 공감과 유대를 떠올리게 만든다. 

발터 벤야민은 예술가를 망가진 세계를 수선하는 사람에 비유했다. 안젤름 키퍼는 세계를 불태워 내년 농사를 기약하는 화전민에 비유했다. 작가 역시 어쩌면 이런 수선공과 화전민에서 예술의 당위를 얻고, 예술을 위한 실천 논리를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과정에서 이름 모를, 그러므로 어쩌면 이름도 없는 들풀 같은 존재들에, 후미진 구석에서 계속되는 치열한 삶의 순간들에, 그리고 자율적인 인간 간 연대에 주목한다. 어쩌면 내가 모르는 것들, 나의 인식(보다는 관심)이 미치지 못하는 것들, 그러므로 진즉에 거기에 있었던 존재들에 눈뜨게 만든다. 작가는 근작의 주제를 거기 있다, 라고 명명한다. 아마도 진즉에 거기에 있었던 존재를, 거기에서의 치열한 삶의 현실을 증명하고 싶었을 것이다.





Angelina, Oil on Linen, Wood frame, 166.1 x 134.3 x 4 cm, 2023





Angelina_close up





Aria, Oil on Linen, Wood frame, 24.9 x 30.3 x 2.9 cm, 2023





Aria_close up





Sophie, Oil on Linen, Wood frame, 37.9 x 30.4 x 2.9 cm, 2023





Sophie_close up



3. 작가노트

 이번 작품들은 크기와 구성에서 전형적인 전시의 모습으로부터 탈피하고자 했다. 작품들이 전시장 벽을 꽉 채운 흔한 회화 전시장의 모습이 아니라 자세히 봐야만 작품이 보이는 빈곤한 전시이다. 캔버스의 8할 이상을 손 대지 않은 화면에 정밀하지만 아주 작은 것을 그렸다. 어찌보면 사람들이 기대하는 바에 못미치는, 하찮아 보이는 미세한 그림이다. 눈요기 기술과 환상의 현란함이 날이 갈수록 발전하는 현대 사회에 역행하는 듯 보이는 전시이다. 
 그림의 주 소재 또한 정물화의 대상이 되거나 꽃다발의 재료로 쓰이는 등으로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화려한 꽃이 아니고, 내가 길을 가면서 마주친 강인한 생명력으로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남은, 보도블럭 사이에서 자라난 이름 모를 작은 들풀들이거나, 주변에서 보이는 것들로, 아주 작지만 꿋꿋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들이다. 작품은 실제 사이즈에 가깝다. 그 중 많은 풀들은 내 검지 손톱보다도 크기가 작았으며 가까이서 관찰하지 않는 이상 존재 자체가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들은 거기 있다. 그들만의 역경을 딛고. 그런데 그 역경은 누구나 인정하는 거창한 역경이 아니다. 그것들의 역경도 대중의 잣대에 대어 보면 풀의 조그만 크기 만큼이나 별 볼일 없는 것이다. 몇 발자국만 떨어져도 잘 볼 수 없을 정도로 캔버스의 작은 일부분에만 조그마하게 그려진 모습을 통해 사람들이 기대하는 전형적인 작품의 모습에서 탈피하고자 하며, 그럼에도 부인할 수 없는 캔버스 위의 그들의 존재를 통해 관람객들에게 메세지를 전달하고자 한다. 
 언뜻 전시장이 텅 비어보이는 듯 하는 것은 의도된 바이다. 사회가 정한 기대치와 달라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현대인들은 관심받고 의미있는 존재가 되기를 원하고 그렇게 되지 않으면 불행하다고 느낀다. 그림 속 작은 존재들은 나이자 여러분이다. 뿌리가 있다면 설령 첫 번째 꽃이 지더라도 언제고 다시 피울 수 있다. 나는 활짝 피운 예쁜 꽃보다 그것을 위해 노력하는 삶이 가치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가치를 찾는 일이다. 그날 그날을 이겨내는 거창하지 않은 작은 존재들을 통해 불안 속에 매일을 사는 현대인들이 응원받고 치유받기를 소망한다. 어쩌면 시스템에서 무의미의 범주에 들어가는 그것들은 그렇게 거기 있다. 



4. 작가약력 

김여운(Yeowoon Kim)
yeowoony@gmail.com
Instagram: kimyeowoon

2007 서울대 서양화과 졸업


개인전
2023 거기 있다, 갤러리도스 공모당선전, 서울
2023 Pic Cell, 아웃오브더박스 버티박스, 서울
2017 1.2.4., 사이아트 스페이스 공모당선전, 서울
2017 Anti-Standard, Artifact Gallery 공모당선전, 뉴욕
2016 Revealing Imperfection, 스페이스 옵트 공모당선전, 서울
2011 Circle of Life, Life of Circle 아트스페이스 개관초대전, 홍콩
2011 house of THE HUNTED, 롯데갤러리 초대전, 롯데백화점 일산점, 일산
2010 house of THE HUNTED, 갤러리 엠(청담동) 초대전, 서울 외

그룹전 
2016 Tokyo International Art Fair, 오모테산도힐스, 도쿄
2015 The Voice of the Artist, ArtScope, 마이애미
2015 아트로드 77, 갤러리 논밭, 헤이리
2015 꿈과 마주치다-공모당선전, 갤러리일호, 서울
2014 Thank You!, 롯데백화점 잠실
2014 아트바겐, 갤러리토스트, 서울
2012 Parallax Art Fair, Chelsea Old Town Hall, London
2011 IYAP-스팩타클의 사회, 인터알리아, 서울
2011 나비의 꿈, 광주시립미술관, 광주
2010 메리 크리스마스, 가나아트센터, 서울
2010 Korea Tomorrow, SETEC 3전시실, 서울
2010 동방의 요괴들 in the city, 충무아트홀, 서울 외

레지던시 프로그램
2011 버몬트 스튜디오 센터, 버몬트, 미국
2009 프레리 아트 센터, 일리노이, 미국 
2009 우드스탁 버드클리프 길드, 뉴욕, 미국

작품 소장
2009 한국불교미술박물관, 서울

Articles
2016 NewYorkio.com, Exclusive Interview, 2월
2010 CNB 저널 187호, 표지작가, pp.52-54
2010 Art on TV 인터뷰, 8월
2010 월간 객석 8월호, 인터뷰, p.191
2010 버질아메리카 5-6월호 pp.90-93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