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열: A LITTLE BRIGHTER A LITTLE DARKER
YOON SANG YUEL
2023-09-01 ~ 2023-10-21
데이트갤러리
051-758-9845 gallerydate@naver.com
48099, 부산 해운대구 해운대해변로 298번길 5 2F
dategallery.kr
움직이는 과녁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들
이선영 미술평론가
윤상렬의 작품에는 수직선들, 또는 수평선들만 있다. 푸른 색감이 더해진 속도감 있는 선들은 요즘 같은 계절에 시원한 느낌을 주지만, 예술작품을 둘러싸고 있어야 할 뜨거운 담론의 장은 숨겨져 있다. 모든 것들이 즉각적으로 이해되어 소비되어야 하는 시대에 불친절한 작품이다. 기하학은 직선을 분명하게 정의할 것이다. 시각예술에서의 선은 대개 형태를 만들며 이는 곧 의미와 연결된다. 형태와 의미는 인과적이지 않지만, 그러한 관습이 재현주의를 지탱해왔다. 요컨대 그려진 사과는 곧 사과라는 것이다. 윤상렬의 작품 속 선도 언뜻 분명해 보인다. 수없이 그어진 각각은 선은 자기가 갈 곳을 아는 듯이 쌩쌩 달린다. 또는 쏜살같이 날아간다. 그는 자신의 작업을 그림보다는 화살이나 섬광과 비교한다. 하지만 거기에는 시점과 종점이 없고 과정만 있으며, 수없이 그려진 선의 순서도 불분명하다. 분명함과 불분명함이 공존하는 그의 작품은 거듭해서 시작될 뿐이다.
세상 속에서 소통될 수 있는 이야기의 조건인 기승전결이 아니라, 시작들이 쌓여 무엇인가 된다. 질 들뢰즈는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예술작품은 언제나 세계의 시작을 구성하고 또 구성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시작들로 인해서 ‘예술작품은 다른 세계와 완벽하게 다른 특정한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들뢰즈) 그렇게 예술작품은 현실과는 구별되는 ‘비물질적인 장소들이나 풍경들’(들뢰즈)을 이룬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어법이 종합적으로 적용된, 여러 화면이 겹쳐 나오는 결과물은 정확한 예측이 불가능하다. 작업만큼이나 집중해야 하는 조립의 결과도 마찬가지다. 볼 때 마다 달라지는 듯 한 선들의 배열은 ‘천천히 흔들리는 나’, 또는 ‘달라지는 표적’(작가)을 상징한다. 이 역설의 숲, 또는 기둥으로 떠받쳐진 세계는 시작도 끝도 없이 과정만 존재하는 듯하다. 시작/ 끝의 결정은 작가의 몫이다. 선을 긋는 행위에서 작가는 카타르시스와 자유를 느끼지만, 그 선들이 자못 기하학적 엄밀성을 가지고 있기에 역설적이다.
그것은 기하학 자체가 가지는 역설과 관련될지도 모른다. 도널 오셔는 [푸앵카레의 추측-우주의 모양을 찾아서]에서 우리는 정확한 정의가 없이도 소통할 수 있지만, 수학적 대상들은 일반적인 경험 너머에 있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모든 용어가 엄밀히 정의되고 모든 문장이 증명되어야 한다는 고집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자유롭게 상상하고 이야기할 수 있게 해준다. 절대적인 정확성으로 의미 있게 꿈꿀 자유를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도널 오셔는 일상 경험을 벗어난 대상들에 관해서 의미 있게 추론할 수 있도록 해주는 정확성은 가능성을 탐구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하면서, 존재하는 것뿐만 아니라, 존재할 수 있는 것을 탐구하려면 정확성이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물론 예술은 다르다. 기하학은 공리가 있지만, 예술은 작가가 정한 규칙에 따른다는 점에서 보다 융통성 있고, 유희적이다. 윤상렬은 자를 사용하지만, 기하학자들처럼 모눈종이 같이 규격화된 간격을 따라 줄을 긋는 것은 아니다.
선의 굵기와 간격은 매 순간 선택된다. 그의 작품은 여러 굵기의 샤프펜슬로 긋는다는 방법론적인 분명함만이 있다. 그러한 엄밀함은 지진계나 현악기처럼 자신의 상태를 미세하게 옮겨 놓는 점에서 기하학적 엄밀성과 크게 다르지 않다. 본질이나 실체가 아닌 과정이나 관계에 중점을 두는 것도 비슷하다. 20여점이 걸린 이번 전시에서 [A little brighter A little darker...일련번호]로 표기된 윤상렬의 작품 제목에는 비교급이 들어가 있다. 하지만 재현 대상과 관계없는 그의 작품은 무엇보다 더 밝은지, 또는 어두운지 알 수 없다. 전시장 벽에 걸린 작품들이 서로를 참조하게 되는 무한반사의 세계다. 어둑한 화면에 유리까지 끼워진 작품의 경우, 관객의 얼굴이 비치기도 한다. 자기반성적인 성격이 강한 그의 작품은 관객에게도 그것을 요구한다. 위에서 아래로 그은 수직선의 경우, 중력의 방향성 때문에 추락을 상상하게도 한다. 중력이 아주 세게 작용해서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블랙홀처럼 어떤 강한 힘은 근처의 것을 가는 선으로 뽑아내며 빨려 들어가게 할 것이다.
대상은 사라지고 흔적만 남는다. 사건은 사라지고 정황만 남는다. 종이와 아크릴, 유리까지 가세하여 겹겹의 층을 이루는 윤상렬의 작품은 얇지만, 그 안에 미묘한 공간감이 있다. 이 공간은 고착되어 있지 않으며 유동적이다. 작품은 보는 각도마다 변화무쌍해서 관객은 명확히 잡히지 않는 대상을 포착하기 위해 계속 움직일 수 밖에 없다. 샤프펜슬과 출력을 통해 그가 팽팽하게 당겨 놓은 줄은 간격이 변화된다. 정지된 매체에 움직임을 부여하는 작가의 방식이다. 작가는 각도의 미묘함을 강조한다. 심지어 가느다란 샤프심조차도 각도만 맞으면 살을 뚫고 들어가는 강도가 있다고 말한다. 손수 제작한 액자에서 몇 밀리미터도 안 될 얇은 공간에 만들어진 공간의 진수를 느끼려면. 관객은 인간의 시선이 아니라, 작은 벌레 같은 존재로 변신해야 할 것이다. 카프카나 들뢰즈 같은 저자들은 동물 변신을 탈주의 방식으로 높이 평가한 바 있다.
벌레같은 미소한 존재는 황홀과 공포를 동시에 야기할 그 미로 같은 선의 숲에서 길을 잃을 것이다. 윤상렬의 작업은 아름다움의 창조가 아니라 자신의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시작됐다. 그의 드로잉은 어둠 속에서 먼저 실행됐다. 보지 않고 그리고 나중에야 불을 켜고 봤다. 넝쿨처럼 얽힌 것들이 풀려나가는 듯 한 것이 마치나 일기나 비망록같은 역할을 했다. 어둠 속의 드로잉은 그리기와 지우기가 구별하기 쉽지 않다. 선이라는 주요 조형 요소는 밝은 곳에서 그려져도 마찬가지다. 그의 선들은 말소하는 느낌이다. 특히 두려움의 말소를 기대했다. 두려움과의 싸움은 고통과 슬픔을 동반한 치열한 과정이었지만, 결과는 건조하고 중성적으로 보인다. 고도의 집중력과 노동력은 두려움을 작품으로 승화시킨 것이지만, 인간적 흔적은 완전히 휘발된 듯 보인다. 모리스 블랑쇼는 [문학의 공간]에서 현대 예술 속에서 단순히 주관적 경험이나 미학적인 상관관계만을 본다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현대 예술가가 도달하려고 애쓰는 객관적인 공간과 밤의 내면 공간 사이에 닮은 점이 있다’(블량쇼) 그것은 인간을 벗어나고자 했던 현대 예술의 특징이기도 하다. 사진이나 영상 등 기계적인 복제가 주도하는 시대에 인간적 관점은 해체되어 간다. 모리스 블랑쇼는 예술작품의 공간은 중성적이라고 말한다. 블량쇼의 말을 들어보자; ‘시는 언제나 또 다른 것을 창시한다. 현실적인 것에 비하면 그것은 비현실적인 것, 이 세계의 시간에 비하면 영원한 것, 자연을 수정하는 행위에 비하면 제한된 행위라고 볼 수 있다. 문학은 결코 언급된 적이 없는 중성적임이라는 체험이다. 들을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 중성적인 말’이다. 블랑쇼에 의하면 이 말은 ‘현대의 위대한 작품들에서 갑자기 더 이상 예술이 없어진다면 듣게 될 소리’다. 블량쇼는 현대문학 연구가지만 현대미술에도 시사점을 준다. 그가 다루고 있는 카프카, 말라르메, 로브그리예같은 작가의 예술적 언어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현대미술에도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롤랑 바르트는 [이미지와 글쓰기]에서 회화와 텍스트를 제도적으로 갈라놓은 간격(검열)을 없애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 그 간격을 허무는 대표적인 형식이 드로잉이다. 무의식적인 끄적임으로부터 시작된 윤상렬의 작품은 쓰기와 그리기의 중간에 있다. 바르트의 말을 들어보자; ‘회화는 현실적인 대상도 그렇다고 해서 상상적인 대상도 아니다. 이미지는 코드의 표현이 아니라 코드화 작업에 대한 변형이다. 따라서 이미지는 하나의 체계의 보관소가 아니라 체계들의 생성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구조란 구조화 자체이다’. 구조는 굳어진 것이지만 구조화는 생성이다. 생성 그 자체는 재현되지 않는다. 현대 예술은 재현주의로부터 멀어진다. 선을 그을 때마다 무엇인가 개시하는 행동과 비교될 수 있는 작품은 미지의 시공간의 탄생이다. 이를 위해 화면은 텅 비어 있어야 한다. 수많은 전제들로 이미 포화되어 있는 캔버스로부터 탈주하기 위해서는 그림 자체를 잊어야 할 지경이다.
블랑쇼는 창조성과 비어있음의 밀접한 관계를 강조한다. ‘우리는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는다. 우리가 창조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극단적인 비어있음의 자리가 다가올 때뿐이다.’(블랑쇼) 현대예술가는 ‘시간과 공간의 새로운 게임을 만들어내는 또 다른 언어’에 몰두한다. 이러한 언어는 ‘정상적인 기하학적 공간도 실제적인 생활의 공간도 파악할 수 있게 해주지 않는 무한히 복잡한 공간관계’(블랑쇼)일 따름이다. 윤상렬의 작품은 아름다움이라는 미학적 용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굳이 비교한다면 미학의 역사에서 미와 견주어졌던 숭고와 가깝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는 것이 숭고이며, 그의 작품은 ‘침묵’이 내재한다. 2016년 데이트갤러리에서의 전시 제목은 ‘침묵의 소리’였다. ‘검은빛’(갤러리 소소, 2016)이라는 부제 또한 역설적이다. 침묵은 ‘반복적 긋기로 쌓여진 겹’에 의해 드러날 따름이다. 하지만 윤상렬의 작품은 형식적 완결도가 있다는 점에서 숭고와 차이를 보인다.
어떤 미학적 범주로도 포착되지 않는 그의 작품은 ‘진실된 태도와 취향의 결합’이나 ‘낯설면서 감동 주는 것’을 원한다는 작가노트를 직접 참조하는 수 밖에 없다, 그것을 자신을 쏟아내는 것에 머물지 않는 예술적 소통의 조건이다. 이후에 봇물처럼 터진 20 회가 넘는 개인전의 시작인 첫 전시 제목도 [fear](2007)였다. 그는 ‘나에게 있어서 두려움(fear)이란 오래된 공생자이자 내자신이 극복해야만 할 대상’이라고 말한다. 두려움은 삶의 일부인 것이다. 미술인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주변에서 작가로서 귀감이 되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지만, 동시에 예술의 어려운 조건에 대해 일찍이 의식하게 됐다. 회화과를 졸업하고도 20대부터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졸업 후 국내외에서 섬유공장 운영, 조명회사 근무, 무대미술, 가구 디자인 등 다양한 경험을 거친다. 그가 본격적으로 작업을 재개한 시점은 2005년 경이다. 파리 국제공동예술체에서의 레지던시 (2007)를 거쳐 10년 만에 첫 개인전을 가진다.
본격적인 작업에 이전의 경력과 체험들이 모두 녹아있다. 가령 정밀한 기계에 대한 감수성이나 기술이 그렇다. 어릴 때 정글짐에서 놀기를 좋아했다거나 건축가도 꿈꿔 본 적이 있는 점은 작가의 취향에 대해 흥미로운 지점을 알려주며, 그것이 디자인 등의 일에도 영향을 준 듯하다. 1-2mm의 각도도 따져야 하는 작품 프레임은 직접 제작하며, 전시 공간에 대한 연구는 필수다. 그는 20여회가 넘는 개인전을 통해 많은 공간을 경험했다. ‘나침반, 자석, 모터, 바늘, 샤프심...’ 등 그가 좋아하는 물건들은 어떤 징후를 정교하게 반영하는 기계들이 많으며, 그의 초기 작업에 오브제 등으로 직접 활용되기도 했다. 가령 샤프심은 필기구의 일부지만, 그자체가 선적 형태를 가지는 오브제로 작품에 배치되곤 했다. 그 경우에는 샤프의 선과 색(샤프심에 도색을 한 경우)이 드러나는 조명 판이 사용된다. 이후 종이에 그은 작품에서 선이 빛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은 이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그는 1997년에 조명회사에 다니면서 전광판에 사용되던 라이트 패널을 접하고 다루어본 경험이 있다. 조명판은 단순해 보이지만 가장 대중적인 인터페이스로 그 자체가 첨단매체에 속한다. 요즘의 작품을 낳은 그의 이력은 전형적인 의미의 ‘화가’는 아니라는 단면이다. 언뜻 잘 읽히지 않는 지금의 작업에는 그의 삶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그림보다는 기록물’에 가깝다고 말한다. 하나의 작품 만들 때 많은 밑 작업이 필요한 그의 작품은 마치 기록물처럼 뭔가 계속 쌓이면서 의미가 만들어진다는 점이 그렇다. ‘난 두 계단을 뛰어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작품을 ‘공든 탑’과 비교한다. 그것은 아날로그 뿐 아니라 디지털 작업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그려진 것인지 또는 만들어진지 궁금해지는 윤상렬의 작품은 ‘수평으로 수없이 긋고, 긋는 과정에서 순간 스치는 번뜩이는 섬광을 머금은 채 그 느낌과 호흡을 유지하며 그 위에 아크릴을 겹치는 형식’이며, ‘시간이 지나고 그 켜들이 쌓여지면서 그림자와 환영은 서로 다른 두께를 드러낸다...’ 라는 자술서를 참고하면 될 듯하다.
빛은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작가 나름의 기획에 도움을 주었다. 물감을 잘 사용하지 않는 작품들은 색보다 명암이 중요하다. 이번 전시를 계기로 이전에 만든 검정 표지의 작품집과 상보적인 작용을 할 밝은 표지의 책자도 만들 계획이다. 에바 헬러는 색에 관한 에세이 [색의 유혹]에서 신이 세상을 창조했을 때 제일 먼저 명령 ‘빛이 있으라’고 했던 말을 인용하면서, 많은 언어에서 흰색과 검정은 밝음과 어두움, 낮과 밤을 구별하기 위해 가장 먼저 생겨난 이름이라고 지적한다. 빛과 어둠으로 상징될 화이트/블랙 계열의 대조는 윤상렬의 기본 매체가 종이와 샤프펜슬이라는 점에도 있을 것 같다. 스스로 규정한 정교한 규칙들에도 불구하고 작업 또한 두려움을 근본적으로 해소할 수는 없었다. 심지어 작업에 전념하는 삶 때문에 야기되는 두려움도 있지 않은가. 그의 말대로 두려움은 삶의 조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충만했던 모체로부터의 분리라는 사건, 즉 태생부터 새겨진 두려움은 죽어서야 끝날 수 있다.
작가에 의하면 ‘두려움(fear)’ 단어에 숨겨진 의미는 ‘진실처럼 보이는 거짓된 징표’(False Evidence Appearing Real)의 약자이다. 그것은 ‘진실’이라고 알려져 있는 것들에 대한 불확실성을 함축한다. 불확실성은 두려움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그것은 자유로운, 또는 자유로워야 할 삶의 근본적인 관계이기도 하다. 삶의 불확실함에 마주한 인간은 자신에게 가장 확실해 보이는 행위를 반복함으로서 두려움을 무화시키려 한다. 정신분석학도 트라우마나 불안에 대한 반복의 효과를 말한다. 동서고금의 종교적 전승에서 반복에 관련된 의식(儀式)은 나름 검증된 기능을 가졌다. 하지만 윤상렬의 작품은 보다 큰 존재인 절대 타자가 주체를 감싸주는 듯 한 종교적 따스함은 없다. 유기체의 감각이 의지할만한 징표들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무균실험실과 비교될 만하다. 조금의 차이도 드러날 수 있게 만든 장, 또는 장치다. 손을 푹 넣으면 바닥을 알 수 없을 만큼 선의 열은 촘촘하고 그 간격도 가늠하기 힘들다.
십 수 년 이상 선(요즘 전시되는 수직, 수평선 드로잉 작품)을 그을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삶의 흔적을 함축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긋기를 그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뭔가 계속 긁적거리던 어릴 적부터의 습관과도 연관되고, 자신의 현재를 심리적으로 반영하는 일종의 태도라고 본다. 가슴 속에 응어리진 것들이 직선적으로 펴진, 감성을 응축한 선들은 조금 밝고 조금 어둡게 나타난다. 수백 가지의 두께와 농담이 오랫동안 쌓인 선들은 얇으면서도 깊다. 비재현적이지만 표면적 깊이감이 있다. 윤상렬은 회화의 정체성이라고 할 만한 색을 부정하지만, 작품들에 색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작업 과정을 생각할 때 검정 계열은 실제 샤프로 그은 것이고, 푸른 계열은 작가가 그린 원본 이미지를 바탕으로 투명 필름에 출력된 것이다. 출력이기에 다른 색으로도 코드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림자에 해당되는 복제물에는 색이 있고, 직접 그려진 원본은 그림자처럼 검정이다.
이러한 전도는 그의 작품에 내재 된 수많은 역설 중 하나에 불과하다. 수직 또는 수평으로 속도감 있게 활주하는 선들은 작가가 샤프로 직접 그은 아날로그적인 선과 디지털 양식의 종합이다.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와는 거리가 있는 윤상렬의 작품은 선으로만 이루어진 형태만큼이나 색을 중성화한다. 물론 극도의 섬세함을 가지는 작품들은 웬만큼 정교한 프린터기도 정확한 값을 내지 못해 그 결과에 대해서는 작가도 확신할 수 없을 정도다. 일단 이번 전시에서는 블루다. 블루는 그자체가 다양함 깊이감을 가진 색이다. 같은 크기의 작품을 동시에 놓고 보면, 각 작품 별로 블루의 농담은 다르며, 마치 하늘빛이 시간에 따라 변하는 듯 한 차이의 계열이다. 이러한 비유가 하늘이 아니라 바다라고 한다면 빛이 닿는 깊이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색감은 화면에서 섞이는 것이 아니라 관객의 시야에서 직접 섞인다는 점에서 옵티컬 아트의 면모를 보인다.
형식의 차이에서 나오는 색의 선들이 다른 두께와 간격을 가지면서 생겨난 광학적 효과다. 그는 전형적인 의미에서의 그림을 그리지는 않지만 순수한 광학적 효과라는 점에서 시각성에 충실하다. 조형 요소를 수직, 또는 수평의 직선으로 환원함으로서 다양한 효과를 야기한다는 점에서 윤상렬 작품은 ‘미니멀’하다. 평면이면서 관객의 시점 이동을 요구한다는 점은 미니멀리즘의 연극성에 기댄다. 자대고 줄을 긋는 반복적 행위가 낳는 차이의 계열은 재현주의로부터 멀어지는 그의 방식이다. 선이라는 기하학적 요소는 조형적 계산을 부정하지 않지만, 전체적으로는 부분적 계산을 포함한 감성, 또는 그가 즐겨하는 표현으로는 태도라는 점에서 수행적이다. 그려지지 않은 작품들은 현대미술의 한복판에 자리한다. 여러 굵기의 샤프펜슬만큼 가늘게 뽑힌 선들은 ‘화살처럼’, ‘빛처럼’ 어디론가부터 와서 어딘가로 간다. 그의 작품은 그 중간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