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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숙 개인전: 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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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숙 개인전 “아 리 랑”
서학동사진미술관에서 8월 29일(화) ~ 9월 10일(일)까지
전시행사 :  2023. 8. 29(화)P.M 6:00

서학동사진미술관
전북 전주시 완산구 서학로 16-17 
blog.naver.com/seohakdong 16-17

서학동사진미술관에서는 2023. 8. 29(화) ~9. 10(일)까지, 한 숙 개인전“아리랑”展이 열린다.
평면회화 120호 3점을 비롯해 25점의 작품이 전시되어 오랜만에 한숙 작가의 회화작품을 한자리에서 만나게 되었다. 
2023년 서학동예술마을 촌장, 전북 민미협 회장으로 마을과 미술계에 활력을 불어넣으며 참일꾼으로서 활동 중이다.
‘아리랑’展에 나온 작품들은 묵묵히 각자의 자리에서 제 역할을 다 하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더 이상의 아픔, 부조리, 피폐해지는 삶이 없기를 기원하는 마음은 춤, 또는 북춤 추고 있는 모습에 담겨 고통을 표출하면서도 우리가 소망하는 현실을 초대하는 제의(祭儀)가 된다. 이 제의에 동참해 혼자가 아닌 공생의 몸짓만이 살아갈 길이라고 말하며 생명의 붓질을 펼쳐 보였다.



아리랑 작품 3



한숙 개인전 “우리들의 탄생 설화 〈아리랑〉”


글. 백정기

한복을 입으면 나도 모르는 나를 만난다는 한숙 작가의 〈아리랑〉에는 하늘과 바다색의 머리를 하고 그림자도 없는 사람들이 초록색 대지(大地) 위에 이리저리 서서 두 팔을 흔들며 춤춘다. 그들은 지금 그렇게 해야만 하고, 그것이 최선인 것처럼 춤춘다. 작품은 작가의 감성, 언어, 표현력을 감추거나 미화하며 숨길 능력이 없다. 작가가 보고 배우고 느끼며 생각하는 작가의 현실이 작품이다. 벌거벗은 채 어우러져 자유롭게 춤추는 그들은 정신을 놓았거나 어떤 신비경에 빠진 사람들도 아니다. 저 홀로 북치고, 저 홀로 춤추는 것 같은데도 그들을 떼어놓을 방법을 찾을 수 없다. 

물론, 이 시대가 춤추고 놀 만한 태평성대의 형국이 아님을 모두가 안다. 최근 우리는 시민들이 무고하게 생명을 잃는 사건들을 거듭 겪었는데 매번 책임자가 없다. 권력은 멧돼지처럼 삶의 기본인 상식과 도덕을 헤집어 놨다. 사람들은 고통과 절망이 무엇인지를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이것을 알면서도 작가는 춤추는 사람들을 그렸다. 몸을 아무리 미미하게 움직일지라도 특별한 감흥 없이는 불가능한 게 춤이다. 또한, 어울렁더울렁 춤추는 인생은 어디에도 없음을 생각할 때 저들의 춤이 궁금하다. 춤추는 저들, 〈아리랑〉의 주인공은 어떤 사람들일까? 

나는 이 그림 앞에서 〈한국에서의 학살 Massacre en Corée〉 (1951년)을 그린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가 떠올랐다. 그는 그림에서 민간인을 학살하는 자들의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 학살자들은 군복의 색깔과 상관없기 때문이다. 이런 학살이 언어, 인종, 민족과 상관없이 작자의 역사 속에 가득하다. 그래서 학살당하는 사람들의 통곡, 찢기고 부서지는 몸과 비명이 더 크게 보인다. 당시, 이 현실을 이렇게 보여준 작가가 우리 중에 있었던가? 누군가는 생각했을지라도 나설 수 없었을 것이다. 

피카소의 직설(直說)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 역설(逆說)은 스스로 일어난다. 여흥을 따라 춤출 만한 분위기가 전혀 아닌데도 누군가 벌떡 일어나서 춤춘다.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다. 사람들은 그렇게 말없이 춤추는 이들의 거침없는 몸짓을 보며 깨닫는다. 그것은 시대를 향한 반발이고 저항이며, 고통의 표출이고 이렇게 춤추는 세상을 원한다는 적극적인 표현임을. 그래서 〈아리랑〉은 우리가 소망하는 현실을 초대하는 제의(祭儀)다. 

이 제의에 동참하여 전쟁, 이념, 능력주의라는 미신, 그릇된 종교적 관념, 돈에 중독된 가치관의 현실 속으로 태어나려면 두려움과 고통이 동반된다. 얼굴 없는 학살자에 의한 죽음이 연이어 발생하는 곳에서 각자 능력껏 살아남는 각자도생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그래서 〈아리랑〉의 공생을 도모하는 생명의 몸짓에는 엄청난 용기와 책임이 따른다. 그리고 이것이 살길이다. 

〈아리랑〉은 이런 우리의 현실을 라울 뒤피(Raoul Dufy, 1877~1953)처럼 경쾌한 선으로써 표현한다. 우리는 작가의 서두른 듯 서툴고, 다 끝나지 않은 것 같은 붓의 흔적과 선을 보며 숨 쉴 틈을 얻는다. 연거푸 몰려온 슬픔도 절망이 될 수 없다는 신념을 갖는다. 그것은 기분 좋은 감흥이다. 그렇다, 작가 한숙의 작품에는 살게 하는 생명력이 있다. 그녀가 있는 곳에서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고 축제와 ‘아리랑’이 시작되는 이유다. 



아리랑 작품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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