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열의 생명 예찬
계절의 향기
이상열의 그림은 청명한 하늘을 배경으로 나무에는 감과 사과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고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붉은 단풍이 화면을 짙게 물들인다. 이상열의 그림을 보고 있자면 파란 하늘 한 자락이 가슴에 내려와 않는 듯한 느낌을 갖는다. 여기에 보랏빛 라벤더 꽃과 천사의 얼굴로 불리는 아이리스, 안젤로니아까지 보태져 한층 풍부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그러고 보면 그의 작품은 꽃과 과실, 그리고 복사꽃, 사과꽃, 배꽃, 감귤 등으로 계절을 가리지 않고 자연에서 볼 수 있는 것들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겨울 사과나무>나 <설감> 등 하얀 눈밭에 붉은 과실을 품고 있는 자태는 초현실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만약 그가 정형화된 패턴과 스타일을 고수했다면 별다른 감흥을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나, 이상열의 작업은 파격적인 조형에다 고조된 계절의 감정을 담고 있기에 무언가 색다르게 다가온다. 그의 손이 닿는 곳마다 요술이 펼쳐지고 선율과 화음의 교향곡이 울려 퍼진다. 계절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의 움직임을 다루는 흥겹고 경쾌한 감정은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해져 활력을 자아낸다.
이상열의 화면은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달구고 두드리고 녹이며 깨뜨리는 팩토리를 방불케 한다. 그의 작업실은 바닥과 주위에 떨어진 물감들이 마구 흩어져 있어 마치 대장간에 와 있는 것같은 느낌을 받는다. 정적을 깨트리는 소리와 격한 노동의 흔적들은 화면에 고스란히 남게 된다. 화면에는 바르고 찍고 으깨고 휘젓는 등 격정적인 몸짓들이 휩쓸고 지나가며, 마티에르가 봉긋 솟아오르고 필선들이 분주히 들락거리기도 한다.
그에게 조형언어는 내용을 전달하는 통로가 될 뿐만 아니라 세상의 풍요를 담는 그릇이 된다. 일상에서 지나치던 것들을 새롭게 인식하는 장이 열리게 되는 셈이다. 그러므로 그의 그림을 보며 감사와 기쁨의 감정을 느낀다면 그것이야말로 작품에 대한 화답이며 작가가 우리에게 들려주려는 메시지라고 본다. 자연이 펼치는 축제에 응답하듯이 화면에는 생명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가가 메아리친다.
존재의 생명력
그의 작업에 변화 조짐이 생긴 것은 2천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0년대에 들어와 이상열의 그림표정이 한층 밝고 화사해졌으며 원색의 색대비가 두드러졌다. 터치가 도처에서 꿈틀거리고 있는가 하면 봄과 가을 등 계절감각도 이전보다 민감해졌다. 작가는 실물 자체를 정확히 담아내는 차원이 아니라 그것이 풍기는 정취나 존재의 생명력을 나타내는데 주력한다. 살아있는 존재의 맥박을 전달하기 위해 색상의 순도를 높이고 계절의 감각을 숨 가쁜 터치를 통해 실어낸다.
이점은 과거 작품과 비교할 때 좀더 명확해진다. 그전만 해도 작가는 숲속의 가옥이나 호젓한 시골풍경, 호수, 해안이나 염전, 전국 각지의 섬 등을 옮기는 데에 힘썼다. 이 시기의 작품은 전반적으로 실경의 재현에 비해 주관의 해석이 덜 강조되는 편이었다. 그러나 2008년부터 유실수들과 꽃동산이 등장하면서부터 큰 폭의 변화를 보인다. 소재상의 변화뿐만 아니라 과감한 색채, 즉 빨강색, 황금색, 흰색, 오렌지색, 노란색, 보라색이 어울리고 때로는 대조를 이루기 시작하였다. 조심스러웠던 붓질이 과감해지고 순도 높은 색상을 사용하면서 화면이 한층 활기를 띠게 되었다.
한편 2008년 이후의 작업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파도처럼 일렁이는 색채와 중후한 물질감이며, 이것을 향후 작업의 청사진으로 삼았다. 그의 이름이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고 보면 이때의 작품이 상당히 강하게 다가왔던 것같다. 초기 작업은 지금보다는 훨씬 자유분망하고 붓질의 리듬을 중시하는 편이었다. 바탕과 표면이 나누어져 있기는 해도 서로 영향을 미치는 유기적 관계 속에 있었다. 언덕위의 배꽃, 복사꽃 등 여전히 구체적인 대상을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화면은 통합과 전체성을 유지하였다.
그의 풍경화는 크게 농가를 낀 나무 풍경, 나무만 등장하는 구도, 기화요초로 가득한 풍경 등 세 유형으로 나누어진다. 농가를 낀 나무 풍경은 담 너머 감나무가 보이거나 소박한 농가의 앞이나 뒤로 나무가 자라거나 혹은 나무 뒤로 헛간이 있는 모습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농가 때문인지 이 유형의 그림은 담장 너머로 나무나 유실수를 키웠던 옛 기억 때문인지 고향에 대한 추억에 잠기게 한다. 세 번째 기화요초로 채워진 풍경은 수평구도가 주는 안정감과 함께 화려하고 이국적인 정취를 안겨준다. 이상열의 작품에서 가장 보편적인 것은 배경을 빼고 과감히 ‘한 그루의 나무’를 등장시킨 유형이다. 풍경화에서 배경을 뺀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자칫하면 단순한 그림이 될 수도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작가가 이런 시도를 하는 것은 그의 주제의식과 연관이 있다. 그의 나무에 관한 시각을 청취해보자.
“내가 나무를 그릴 때 나는 나무를 그린다기보다 화폭 속에서 나무를 키운다. 내가 손끝으로 밀면 그때마다 나무가 가지를 뻗고 그 가지 끝에서 꽃을 피운다. 또 때로는 그 가지 끝에서 과일이 영글기도 한다. 나는 때로 노란 물감을 풀어 흘리고, 때로 붉은 물감을 풀어 흘린다. 나의 화폭 속에서 나무들이 그 물감을 자양분으로 삶을 키운다.”
작가는 단순히 실재 나무를 재현한 것이 아니라 캔버스에 한그루 나무를 키우는 것에 비교한다. 그가 농부의 마음으로 밭을 갈고 비료를 주고 씨를 심고 해충이 들지 않도록 잘 돌본다는 말에 주목해보자. 작가가 작업을 밭일에 견주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농사일을 대충대충 할 수 없듯이 그의 그림도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정성과 세심한 돌봄을 요한다. 이렇듯 작가는 농부의 마음으로 그림속의 나무를 키우고 꽃을 가꾼다.
그가 작품을 농사일과 견주는 데는 또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농사일만큼이나 작품제작에 엄청난 공을 들인다는 점이다. 특히 그의 작품을 보면 어느 한 구석 작가의 손길이 닿지 않은 부분이 없다. 몸 전체를 사용해서 작품을 했다고 여겨질 정도로 신체의 흔적이 역력하다. 농부가 작물에 물과 비료를 주듯이 작가는 나이프와 붓질을 계속하며 나무와 잎사귀들, 그리고 과실의 이미지를 형상화 하는 과정을 밟는다.
감각은 사물에 대한 섬세한 표현을 가능케 하지만 지각은 사물이 지닌 의미를 확연하게 만든다. 열매는 여름의 뙤약볕과 세찬 비바람을 참고 이뤄낸, 다시 말해 오랜 역경과 난관을 꿋꿋하게 극복한 삶을 말해준다. 우리 눈에 보이는 고운 빛깔의 열매는 온갖 어려움을 극복해낸 인고의 산물임을 알 수 있다. 세찬 비바람은 사과나무로서는 가장 큰 위험이었고 뙤약볕은 자신을 끝없이 시험하는 시련이었을 것이다. 그런 난관과 위험을 슬기롭게 견디어낸 끝에 이제 사과열매는 탐스러운 빛깔과 달콤한 맛을 내는 존재로 거듭나게 된 셈이다.
보다시피 그림에는 빨갛고 푸른 사과, 감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데 과일들은 탐스러울 뿐만 아니라 빛을 머금어 찬란하기까지 하다. 만일 태양이 지성을 지니고 있다면 “내가 빛을 발하는 것은 그것이 나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을 기뻐한다. 그것이 내 삶의 기쁨이다.”(J. H. 바빙크)고 말하는 것같다. 태양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이 나무와 꽃들은 생명감으로 가득차서 작열하는 태양의 햇살을 흡수한다. 그의 그림은 단순히 계절의 감각을 전해주는 정도가 아니라 그들의 생명력, 아름다움, 열매를 맺었다는 기쁨과 희열을 담고 있다. 그런 충일한 감정이 임계점에 이르러 ‘색의 코러스’를 만들고 ‘자연의 심포니’를 울려 퍼지게 하는 것이다.
질료감각의 함의
그의 작품은 달구지에 몸을 싣고 덜컹거리는 비포장 시골길을 가는 기분이다. 곳곳에 잠복한 자갈과 움푹 패어진 곳을 만나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 위에 오른다면 십중팔구 멀미와 어지럼으로 고생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만일 이 점을 확인하고 싶다면 작품을 측면에서 바라보면 더욱 실감이 날 것이다. 그만큼 그의 화면은 낙차와 굴곡이 심한 편이다.
물감을 얇게 펴는 과정과는 대조적으로 물감을 두텁게, 마치 물감을 통째로 쏟아낸 것같은 심한 요철효과가 두드러진다. 임파스토를 구사한 몽티셀리(Adolphe Monticelli)나 안젤름 키퍼(A. Kiefer)의 화면보다도 두텁다. 말하자면 다른 조형요소를 제치고 단연 ‘질료감각’이 압권이라는 얘기이다. 그렇다면 그의 회화에서 이런 거친 질료감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자동화와 정보화가 편만해 있는 디지털 사회에서 그의 ‘아날로그적 수법’은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디지털 시대에 태어난 사람이 수동 타자기를 처음 볼 때처럼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윤기 나고 맨질맨질한 표면이 안락함의 산물이라면 그의 느리고 더딘 표현법은 삶의 풍파와 고난을 함축한 것처럼 생각된다. 모종의 긴장감은 예술에 본질적인 요소이다. 어느 모로 보나 매끄럽지 않은 질료감은 잘 조율된 디지털 세계에서 점점 더 작아지는 현실감, 신체의 느낌을 되돌려 준다. 작가는 그렇게 우리가 기피하는 것, 즉 타자를 받아들인다.
초벌칠을 하고 그위에 계속 물감을 올리거나 물감을 두텁게 쌓아가는 일은 만만치 않은 일이다. 밭을 개간하기 위해 수 천 번 삽과 곡괭이질을 하는 사람처럼 그의 심정도 꼭 그와 같을 것이다.
작가는 매 작품마다 자신의 힘을 다 소진할 정도로 그림과 한바탕 씨름을 벌인다. 이 일은 작가를 녹초로 만들어버리지만 그럼에도 그가 더디고 번거로운 작업방식을 고수하는 것은 ‘예술에 지름길은 없다’는 것을 자신의 신조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효율성과 이를 달성하기 위한 속도의 신봉은 어느 새 우리의 생활 가운데 깊숙이 침투해있다. 작가는 이러한 현실의 유혹에 순응하기 보다는 보다 회화에 있어 본질적인 것은 무엇인가를 성찰한다. 편리성, 가벼움을 거부하고 불편함, 수고스러움을 감수하는 것은 ‘회화의 본질적 계승 발전’(작가의 말)을 꾀하려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가 비수처럼 끄집어낸 것은 가장 아날로그적이랄 수 있는 ‘촉각적인 것’이다. 그것은 시각적인 디지털과는 대조되게 몸의 궤적을 화면에 그대로 남긴다.
예나 지금이나 그림이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오고 있는 이유는 기계장치가 넘볼 수 없는 경지, 즉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그림의 아우라 때문이 아닐까. 예술가의 손길과 체취를 거부해도 아무렇지도 않은 세상이 도래했지만 여전히 인간의 호흡과 숨결로 채워진 예술을 추구하는 이상열의 도전정신은 그 자체로 충분한 의미를 지닌다.
서성록 |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