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시기간 : 2023. 10. 12.(목) – 12. 10.(일) ※ 매주 월요일 휴관
■ <성북의 청괴들>
‟ 지난 해 성북동 산골짜기로 복거(卜居)를 한 후 내 집 주변으로 젊은 화가 몇몇 사람들이 앞뒤로 모여 살게 되었는데 한 마을에 더구나 담을 서로 사이 하다시피 되고 보니 아침저녁으로 거리낌 없이 왕래하면서 울적한 심회를 달래도 보고 때로는 문외의 기담으로 파안대소도 하여 본다. 이들은 모두 내가 20년 전 대학에 출강하면서 만난 홍안의 소년들이었는데 지금은 모두들 장년으로 화단에 기예(氣銳)한 중진들이 되어 있다.
나는 이 한 마을에 뭉쳐 사는 젊은 화가들을 「성북의 청괴(淸怪)들」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모두 가는 길이 같고 보니 취미도 같을 수밖에 없다. 집마다 돌과 소나무와 매화와 난초를 가꾼다.
지난 한 겨울 동안 적설의 골목길을 밟으면서 어느 집엘 가도 그 매섭고 싸늘한 매화의 향내 속에 젖어 들어 온갖 시름을 잊을 수가 있어 왔다. 매화를 가꾸는 심정이란 그 고절(苦節)을 함께 하면서 누구보다 봄을 먼저 기다린 사람들만이 서로가 알 수 있는 것. 그러니 집집마다 매화를 가꾸어서 매화촌을 방불케 하는 성북의 청괴들은 정녕 고절을 사랑하면서 누구보다 봄을 먼저 기다리고 가꾸고 있음이 분명하지 않은가. ”
- 서세옥, 1974.2.6. 「서울신문」
서세옥, <정오>, 1957년, 한지에 먹, 183×69cm, 성북구립미술관 소장
신영상, <양지27>, 1986, 170x106.5cm, 천에 먹,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송영방, <계산무진>, 97x73cm, 종이에 먹과 색, 2000,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정탁영, <드로잉 2002-8>, 29.8x 29.8cm, 2002,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이규선, <잔상>, 1971 , 130x130cm, 한지에 먹과 색,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임송희, <우후>, 2010, 70x140cm, 종이에 먹과 색, 개인소장
■ 기획 의도
성북구립미술관에서는 2023년 하반기 기획전시 <성북의 청괴들 : 붓 끝에 기대어 홀로 가리라>를 통해 여섯 명의 한국 화가들이 화업과 풍류를 중심으로 교유한 이야기를 조망한다. 서울대학교 회화과 1회 졸업생인 산정 서세옥과 그의 제자이자 동료인 우현 송영방, 노석 신영상, 남계 이규선, 이석 임송희, 백계 정탁영은 1970년대부터 성북동에 하나둘 모여 살았다. 이들은 문인화의 전통을 깊이 탐구하는 한편 현대적인 감각을 반영한 작품 세계를 이룩하며 한국화단의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더불어 이들은 지근거리에 살며 돌을 사랑하고 문인다운 소양을 쌓는 등 서로 돈독한 정을 나누었다. 한창 때는 각자의 집 마당에서 새로 얻은 돌을 보기 위해 자주 어울렸는데 그 때의 기억이 여러 글을 통해 생생히 전해진다. 덕분에 성북의 골목들은 여전히 묵향이 은은한 거리로 남아 있다.
‘성북(城北)의 청괴(淸怪)들’이라는 이름은 서세옥에게서 비롯되었다. 1974년 서울신문에는 ‘성북에 뭉쳐 살며 집마다 돌과 소나무, 매화와 난초를 가꾸는 젊은 화가들’을 일러 「城北의 淸怪들」이라고 애정 담아 지칭하는 산정의 글이 실렸다. 그리고 그 말은 유럽 여행 도중 신영상에게 적어 보냈다던 편지에도 언급된 바 있어, 가까이 살던 임송희와 송영방 등의 기억 속에도 선연히 남았다. 중국 청대 중기 양주 지역의 유명 화가들이었던 '양주팔괴(揚州八怪)'의 이름을 본 따 붙인 '성북청괴'라는 명칭은 성북에서 살며 그림을 그리는 맑고 개성 있는 화가들이라는 뜻이다. 양주팔괴는 하나의 유파로 불리기는 했으나 각자의 고유하고 독창적인 스타일과 대담한 표현으로 명성을 얻었다.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고 하던가. 재미있는 이름으로 들리나 그 명칭은 실은 담대하고 자신감 넘치는 여섯 화가들의 자부심을 보여준다. 서세옥은 이 성북의 여섯 화가들 각각이 깊이 있는 정신성과 단단한 실력을 지니고 있음을, 그리하여 전통을 넘어선 현대로 한국화를 널리 펼쳐낼 것임을 자신했던 것이다.
이에 성북구립미술관에서는 <성북의 청괴들: 붓 끝에 기대어 홀로 가리라>展을 통해 전통을 뛰어넘어 과감한 조형적 실험으로 현대적인 화풍을 전개해 갔던 이들의 여정을 소개하고자 한다. 서울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한 이 여섯 화가들은 서양화와 동양화를 함께 배우는 전통 속에서 보다 새로운 표현기법과 재료, 소재를 경험할 수 있었다. 제 1전시실(3F)에는 한국화, 특히 문인화의 전통과 유리되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서 자신의 것을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는 이들의 고심을 느껴볼 수 있다. 같은 재료를 이용해 비슷한 시기에 화업을 일군 이들의 작품은 각각의 개성에 따라 전혀 새로운 것인 듯 존재감을 뿜어내면서도, 한편으로는 한 사람의 작품인양 어우러진다.
제 2전시실(2F)에서는 인물, 산수, 화조, 영모 등 한국화의 장르와 표현에 두루 능했던 여섯 화가들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사실 그대로 재현하거나 본인의 작업양식을 이룩하는데 치중하기보다, 여러 장르 및 표현 기법에 담긴 정신성을 더욱 중시하는 동양 미학의 배경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같은 대상을 소재로 하였다 하더라도 화가의 심중에 담긴 정신과 운필의 차이는 각각의 그림에 활달한 기운과 개성을 담아내고 있어 보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또한 조선 후기 이후 큰 사랑을 받았던 돌을 아끼고 감상하던 문화가 ‘성북청괴’들에게는 어떤 의미였는지 살펴본다. 화려하지 않지만 은근하고 깊은 개성과 멋이 있는 돌은 그를 애정 하는 이들의 정신성을 그대로 닮아 있다. 이번 전시를 통해 깊은 멋과 높은 격조, 개성과 해학의 미를 지닌 한국화의 세계에 흠뻑 빠져들게 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