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03. 20 - 04. 09
이화익갤러리는 2024년을 시작하는 첫 전시로 ‘화론’전을 준비하였다.
4회째 맞는 화론전은 그 동안 9인의 작가들로 구성된 전시였지만, 올해부터 김성국 작가의 합류로 10인의 작가가 전시에 참여한다. 각자 함께할 작가를 추천하는 방식으로 화론전 작가들이 모였던 것처럼 기존 참여 작가들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김성국 작가가 합류하게 되었다.
화론전은 “꽃”이라는 단순하지만 포괄적인 주제로 시작되었다. 꽃을 대상으로 하는 예술작품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지만, 그만큼 자주 다뤄진 주제이기 때문에 식상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하지만 화론전에 참여하는 10인의 작가들은 단순히 “꽃”이라는 주제를 재현하는 것을 넘어서 자신만의 조형언어를 통해서 각자의 예술관을 드러내고 있다.
다양한 이미지를 캔버스 위에 패턴화 된 형태로 보여주는 김성국 작가의 작업은 개인, 개인 및 사회, 그리고 사회와 사회의 관계를 표현한다. 어떠한 관계를 잘 유지하기 위해서는 본인 스스로 자신을 이해하고 파악하는 것과 그것을 적절히 드러내서 타인에게 알리는 것이 필요하다. 쉽지만은 않은 이러한 과정을 위해서 김성국 작가는 이미 잘 알려진 이미지와 개념을 차용하여 주변 환경이나 주변 인물과 함께 캔버스에 구성하는 작업을 통해 자신을 알아가는 방법을 찾고 있다.
김정선 작가는 짧게 피었다가 지는 꽃의 찰나의 아름다움을 캔버스에 그려낸다. 이미지와 이미지, 이미지와 배경사이의 경계선을 미세하게 중첩하거나 흐리게 표현하는 김정선 작가의 표현기법은 화면의 공간감과 깊이감을 극대화시킬 뿐 아니라 가장 예쁘게 피어있는 시간이 그리 길게 유지되지 않고 쉽게 사라져버리는 꽃의 유한한 아름다움과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그리움, 상실의 아픔이 느껴진다.
콘크리트, 아스팔트 등 다양한 인공물을 배경으로 유기적인 선을 그리며 뻗어가는 풀의 모습이 종이 위에 자유롭게 그려지는 드로잉의 필선을 닮았다고 이야기하는 김제민 작가는 드로잉을 기반으로 그림을 그린다. 김제민 작가는 자유롭게 뻗어나가는 풀의 움직임처럼 작업에서 필선이 만들어내는 필체 (혹은 서체)가 중요하게 여겨지며 필선을 잘 그려낼 수 있는 도구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한다고 얘기한다.
원하는 다양한 필획의 효과와 마음에 드는 표현을 위해서라면 붓 뿐 만아니라 만년필, 대나무 펜, 심지어 나무젓가락까지도 김제민의 화법을 전달하는 언어가 된다.
신수진 작가의 작품은 꽃이 피어나는 형상이나 바람에 흔들리는 숲과 같이 재현적인 느낌을 주지만, 사실 구체적인 형상을 그린 것이라기보다는 선과 색 등 조형적인 요소들이 수없이 중첩되면서 생성된 추상적인 공간이다. 세포처럼 아주 작은 하나의 유닛들이 혼합되면서 다른 색상을 만들기도 하고 어떠한 형태나 효과를 만들어내기도 하는 것이다. 신수진 작가는 물감을 수없이 겹치는 작업과정에서 화면이 탁해지거나 어두워지지 않도록 색상과 농도의 조절에 집중함으로써 완성된 화면에서 은은하게 빛을 발하는 자연물의 투명성이 느껴진다.
이광호 작가는 물웅덩이 곳곳에 자라난 기다란 풀, 불그스름하고 하얀 꽃과 습지식물을 그린다. 캔버스 위에 구획되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뻗어있는 식물들을 보고 있으면 캔버스 담겨진 습지는 광범위하고 거대한 전체의 일부모습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이광호 작가가 보여주는 작은 화면을 통해서 캔버스의 경계를 넘어 세계가 확장되고, 작품을 보는 관객들은 거대한 습지를 상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유화물감을 칠하고 물감이 마르기 전 고무 붓으로 뭉갠 다음 니들(needle)로 긁어내는 이광호 작가의 독특한 작업방식은 생경한 습지풍경의 느낌을 더욱 부각시킨다.
이만나 작가의 작품은 캔버스 절반이상의 공간에 담쟁이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만나 작가는 벽에 납작이 붙어있기에 ‘깊이 없는 풍경’인 담쟁이는 그 속성 자체로 멋진 ‘자연의 회화적 표현’이라고 이야기한다. 납작해 보이는 담쟁이 표피 이면에는 켜켜이 얽히고 설킨 시간의 층위가 존재하는 것처럼, 이만나 작가의 작품은 캔버스 위에 반복되는 붓질 사이에 무수히 많은 색의 층을 쌓아서 대상을 드러낸다. 이만나의 작품은 마치 담쟁이의 시간을 흉내 내듯 긴 호흡을 담고 있다.
전통 동양화 작업방식을 따르는 이정은 작가는 닥나무의 섬유로 제작된 장지 위에 동양화 물감으로 채색을 하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장지를 그대로 사용하면 안료의 번짐과 스밈이 일정하지 않아 섬세한 표현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아주 묽은 농도로 희석한 아교를 장지 표면에 수차례 바르고 말리는 과정을 거친다. 이러한 수고스러운 작업과정까지 기꺼이 받아들이고 수행하는 이정은 작가의 모습은 솔직하고 담백한 본인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그녀의 작품 속에 온전히 드러난다.
고전적인 회화의 진수를 보여주는 이창남 작가는 자신만의 고유한 화풍과 색감으로 눈앞의 대상을 충실히 재현하는데 몰두한다. 대상의 사실성에 가까이 다가가는 듯하지만, 미묘하게 얼버무리는 지점에서 이창남 작가의 두드러진 회화적 감각을 느낄 수 있다.
한수정 작가는 오랜 기간 동안 꽃을 그리고 있다. 긴 시간 동안 꽃을 그리면서 그 사이 여러 변화가 있었다. 변화의 계기는 새로운 시도를 위한 작가의 의도이기도 하지만, 시력저하와 같은 신체의 변화가 생기면서 연결되는 작업의 변화이기도 하다. 작가는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과 작업이 쌓이는 과정이 일치하는 것이 본인의 그리기 작업인 것 같다고 설명하며, 그리는 시간을 본인이 재미있어하는 요소들로 채우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허보리 작가가 그리는 풍경은 전체적인 모습을 그린다기 보다는 대상의 일부분을 조각내어 한곳에 집중한 모습을 보여준다. 허보리 작가는 표현하는 대상을 자세히 그려내는 것을 넘어서 대상의 에너지와 움직임을 조형적 언어로 보여주고자 한다. 그리려는 대상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그것을 캔버스에 옮기면서 발생하는 수많은 즉각적인 결정들은 결국 표현하려는 대상과 작가가 하나가 되는 과정이 된다. 허보리의 작품 속에는 작가의 체온과 기운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 봄, “화론”전시를 통해서 10인의 작가들의 자신만의 화법으로 풀어놓는 자연(꽃)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는 시간을 갖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