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 전 시 명 : 2024 소장품기획전 《회화적 지도 읽기》
ㅇ 전시기간 : 2024. 4. 9.(화) ~ 2024. 8. 18.(일)
ㅇ 전시장소 : 대구미술관 1전시실
ㅇ 참여작가 : 44명
ㅇ 전시규모 : 대구미술관 소장품 중 회화 82점
대구미술관은 2024년 소장품기획전으로 2011년 개관 이래 수집된 전체 소장품의 78% 가까이를 차지하는 ‘회화’ 작품을 집중 조명하는 전시 《회화적 지도 읽기》를 선보인다. 대구미술관이 과반이 훌쩍 넘는 비중의 회화작품을 소장한 것은 근현대 회화의 발상지를 대표하는 지역미술관으로서 위치한 지역과 작가를 포용하며 동시에 동시대적 흐름을 읽어내는 미술관의 의지와 성격을 보여준다.
본 전시는 지도에 담겨있는 정보들을 해석하듯, 지역과 국경을 넘어 축적해 온 대구미술관의 ‘회화’ 소장품이 지니는 여러 층위의 지표들을 연구하여 이를 통해 보여지는 표현의 흔적과 새로운 맥락에 주목한다. 일반적인 회화의 역사나 이론의 규격에 작품을 맞추기보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성과 수집과정을 성실히 들여다봄으로써 20세기 이후 회화의 위기 담론 아래 대구미술관의 소장품들이 함께 모여 만들어 내는 연결점과 새로운 관점을 읽어내려는 시도이다. 물리학자이자 기술비평가 어설라 프랭클린(Ursula Martius Franklin)은 '지도에는 목적이 있다. 그것은 여행자를 도와주고 알려진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의 간극을 메우는 데 유용해야만 한다. 지도는 집단적 지식과 통찰의 증거다‘라고 말한 바 있다. 방대한 지표들이 총집합한 지도를 독해하며 길을 찾듯, 대구미술관의 회화 소장품들이 각자 품고 있는 독자적인 시각과 이야기들을 되새기며 미술관이 걸어온 작품수집의 길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함께 예견해 보는 기회로 삼고자 한다. 지도가 품고 있는 가능성의 길들을 따라 떠나는 여행처럼 회화작품 안에서 발견되는 지식과 통찰을 통해 새로운 회화의 지형도를 그려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섹션 1 : 상상의 지형학
회화적 지도를 손에 들고 산을 오른다. 인간과 자연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듯, 과거부터 회화의 주된 대상은 자연이었다. 현대의 화가들은 단순히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화폭에 옮기지 않고 자신만의 시각과 메시지, 실험적 욕망과 바람을 내포하며 자연을 흡수하고 상상한다. 자연은 예술가들에게 마르지 않는 영감의 원천인 것이다. 자연을 소재로 하되 구체적인 지형적 접근법으로 회화의 다양한 실험을 이어 나가거나, 자연과의 교감과 조응을 통해 자기 자신을 돌아보기도 하며, 때로는 수행적 태도로 산책하듯 자연이 가진 기운생동을 표현하기도 한다. 넓은 대지가 품은 가능성만큼 작가 각자가 바라보는 자연의 모습도 무한개이다.
자연적 이미지에 드로잉을 접목시켜 직관적인 순간성을 포착한 정태경, 조선시대 산수화 일부를 확대하고 변용하여 ‘산’이라는 이미지를 새로이 구축한 정주영, 2차원의 평면성 안에 존재하는 초록의 산과 3차원의 일루전을 실험한 송명진, 그리고 강렬한 필체와 색으로 산이 가지는 강한 기운을 표현한 김종복은 모두 산의 지형적 특징을 자신만의 화법으로 읽는다. 반대로 김지원과 안두진의 작품은 자연을 상상의 도구로 활용한 듯 보인다. 인간의 허영이나 욕망을 맨드라미에 비추어 상징하기도 하고, 우리의 상상과 조형예술 사이의 관계를 모색하기도 한다. 나아가 추상적 자연의 표현을 통해 작가의 마음과 태도, 즉 내재적 의미들을 추구하게 되는데 유영국의 작품은 산을 관조하듯 대상의 본질을 들여다보며, 차규선은 직접적으로 ‘흙’을 사용하여 자연이 건네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또한 신경철의 붓질이 드러내는 회화성을 강조한 풍경화와 김선형의 동양 산수의 특징을 바탕으로 한 추상풍경, 그리고 자연의 조형미가 거의 남지 않은 균열과 붓질로 대지의 보편성을 담아낸 윤명로의 작품에서는 마치 추상화이면서도 산수화 같은 동서양의 미를 느낄 수 있다.
섹션 2 : 마음으로 떠나는 여행
마음의 지도를 따라 계획없이 떠나는 여행은 추상적이다. 정해진 길을 따라 걸어가는 여정과는 달리, 추상적 여행은 내부의 주체적 요구를 따르며 예상치 못한 즐거움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20세기 서구현대미술의 주축을 이루었던 추상미술(abstract art)은 자연의 구체적 대상의 묘사를 기피하고 작가의 의지에 의한 추상적 형식으로 작품을 구성했다. 마치 계획 없는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추상회화의 작업들은 붓질에 담긴 작가의 감정과 숨결로 인해 저마다의 주체적 개성이 강조되며 예상치 못한 새로운 효과와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고대 유물을 발굴하고 난 후의 현장, 혹은 암벽화에 그려진 그림을 연상케 하는 박다원, 오세영, 노은님의 작품은 생명체의 흔적과 같은 원초적 미감을 드러내며 동시에 음악적 율동감을 전해준다. 한국적 문자추상을 선구한 김영주, 전통 필묵법을 지키면서도 자신만의 화법을 구축한 황창배, 지역추상의 선구자로 불리는 이영륭은 단순히 서양의 추상회화를 따르지 않고 한국적 자연주의와 연결된 자신만의 개성을 찾아나가며 본질을 잃지 않는 실험을 이어갔다. 또한 액션 페인팅을 연상케 하는 ‘행위성’을 강조한 곽훈과 이열의 뜨거운 추상회화는 보는 이로 하여금 역동적 모험심을 불태우고 기(氣)의 철학을 담은 비자연적 표현들로 인한 숭고함을 느끼게 한다. 마지막으로 동양적 여백의 미와 응축된 간결함을 강조한 이강소와 이배의 작품은 추상과 평면성의 현대미술 가운데 독보적 아름다움을 뽐낸다. 모험심을 가지고 혼자 떠나는 여행처럼, 추상회화 작품들의 형태, 색채, 질감 등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원초적 순수와 새롭게 꿈틀거리는 존재의 기운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섹션 3 : 캔버스 너머의 방위각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모더니즘 회화의 본질로 언급한 ‘평면성(Flatness)’은 캔버스 안에서 순수한 점·선·면과 같은 기초 조형요소들이 배치되고 축적되어 신체적 노동과 자기비판의식이 강조되며 때로는 평면을 뛰어넘는 정신적 숭고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비록 20세기 이후 회화의 종말이 선고되었지만 시간성과 공간성, 나아가 작가의 노동적, 심미적 요소들이 서로 축적되며 회화는 여전히 다양한 실험적 시도들로 진행 중이다. 특히 ‘대구’는 1970년대부터 전국의 현대미술인의 축제였던 ‘대구현대미술제’를 개최한 지역이며 당시의 실험적인 설치미술, 모노크롬 회화, 미니멀리즘, 개념미술 등의 다양한 동시대 국제미술의 사조들을 앞서 반영한 바 있다. 캔버스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방위각으로 무한 확장되는 조형들은 수많은 실험정신을 내포하며 결국 기초조형으로 회귀된다.
여백과 관계를 중시하며 신중히 내려그은 이우환의 붓질이나 최명영의 수직수평의 반복작업은 ‘그린다’기 보다는 일종의 획으로 보여지는데, 이는 붓질과 호흡 등 작가의 사유적 태도가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며 작품에 수행적 층위를 쌓아 한국 모노크롬 회화를 완성시킨다. 수학적 분할과 비례, 그리고 관계를 중시한 김용수, 박두영, 이교준의 작업에서는 반복에 의한 무한의 확장과 규칙에 의한 절제미 사이의 힘겨루기를 느껴볼 수 있다. 또한 색면의 깊이를 만끽할 수 있는 손아유, 유희영의 작품에서 화면을 뒤덮는 색면을 정성들여 바라보면 얼룩이나 흘림을 통해 동양적 필치를 간직하고 있는 듯 보인다. 이렇듯 순수하게 절제된 시각성은 오히려 회화의 내적감각을 더욱 예민하게 만든다. 점으로부터 시작해 선에서 면(색)으로 자연스레 이행하는 기초조형들처럼, 본질적인 것에서부터 정신적인 것, 즉 캔버스를 넘어 내부로 향하는 심미적 길을 걸어보게 한다.
섹션 4 : ‘축척’된 현대적 삶의 지표들
샤를 보들레르는 『현대 생활의 화가』라는 책에서 현대성이란 ‘유행으로부터 역사적인 것 안에서 유행이 포함할 수 있는 시작인 것을 꺼내는 일, 일시적인 것으로부터 영원한 것을 끌어내는 것’이라 설명했다. 다시 말해 보들레르가 강조하는 현대성을 띤 회화에는 그 시대의 풍모와 시선과 미소가 담겨 생동감이 넘쳐야 역사를 현재까지 살아있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는 한 미술관이 오랜 세월을 거쳐 수집해 온 소장품들이 가진 지표들에서도 유의미하다. 우리는 하나의 소장작품을 감상함으로써 작가의 시선이 담긴 일상 풍경, 역사적 과거와 현재, 한국 전통과 해외 생활상 등 시간과 공간을 마음껏 넘나들며 다층적 삶의 축척을 펼쳐볼 수 있다.
우리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선 모습들을 선보이는 안지산, 홍순명, 공성훈, 이명미, 힐러리 페치스의 작품에서 우리는 현실세계의 리얼리티에 숨겨져 있는 공통의(혹은 개인의) 서사들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반면 박자현, 안창홍, 최민화, 임동식, 송창의 작품을 통해 우리는 한국의 역사와 시대정신을 되새기며 과거의 기억에서 현재로, 예술에서 일상(현실)으로의 확장을 꾀한다. 또한 배윤환, 로베르 콩바, 조나단 가드너, 성백주, 정강자, 한운성은 작가의 시각으로 바라본 해외의 생활상과 고전의 이야기를 시각화하며 시공간의 지표들을 확장시킨다. 다양한 경로와 심층적인 방식으로 수집되어 수장고에 안착한 작품들은 저마다의 시대와 시선, 미소를 머금고 있다. 현대성을 띤 회화는 우리로 하여금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하는 현재 삶의 지표와 시대적 의식을, 더불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미래를 고민하게 하며, 이는 작품들에 ’현대적 회화‘로서 새로운 영원(永遠)을 부여하는 일이기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