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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암 이응노 탄생 120주년 기념전 II. 고암, 인간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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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시  명 고암 이응노 탄생 120주년 기념전 《II. 고암, 인간을 보다》
주      최 가나아트, 가나문화재단
장      소 가나아트센터 (서울시 종로구 평창 30길 28) 1, 2, 3관 
일      시 2024. 8. 2 (금) – 2024. 9. 8(일) (총 38일간)
출 품 작 품 평면, 입체 100여점



가나아트 · 가나문화재단 고암 이응노 탄생 120주년 기념전 2부 개최
1960년대부터 1989년 타계 직전까지 전개된 ‘인간 시리즈’ 조명
‘인간 시리즈’는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통일무(統一舞)’
<군상> 연작을 중심으로 평생 인간을 향한 예술을 펼친 고암의 예술관에 주목
회화, 조각은 물론 응용 미술의 영역에서도 전개된 인간 시리즈 100여점 대거 출품
바카라(Baccarat)와 협업해 제작한 ‘올림픽 크리스털’ 6종 최초로 한자리에 소개


  가나아트와 가나문화재단은 올해로 120주년을 맞은 고암 이응노(顧菴 李應魯, 1904-1989)의 탄생을 기념하여 특별전을 기획했다. 본 특별전의 마지막 순서인 《II. 고암, 인간을 보다》가 2024년 8월 2일부터 9월 8일까지 가나아트센터에서 개최된다. 지난 7월 28일에 종료된 1부 전시는 고암의 사생, 콜라주, 문자추상 작업 등 193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의 시기별 대표작을 선보이며 그가 독창적인 추상 양식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주목했다. 이번 2부 전시는 고암의 대표작이라 일컬어지는 <군상>을 중심으로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집중적으로 나타난 ‘인간 시리즈’를 살펴본다. 고암은 화업 전반에 걸쳐 인간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을 드러냈다. 특히 고암이 타계 직전까지 매진한 <군상> 연작은 그가 평생의 예술 세계를 종합해 이른 인간 탐구의 종착점이다. 진정한 예술가는 대중의 편에 설 수 있어야 한다고 설파하며 인간을 향한 예술을 실천한 이응노의 예술관을 이번 전시에서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전시전경


  이응노의 인간 시리즈는 이번 전시에 총 100여점 출품되며, 회화와 조각은 물론 크리스털, 도화 등의 형태로도 소개될 예정이다. 이응노는 1958년 ‘용구(用具)의 혁명’이라는 표현을 통해 다양한 매체와 재료를 활용한 조형 실험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는 당시 고암이 추상 작업을 염두하고 한 말이었으나, 새로운 매체를 시도하려는 그의 태도는 작업이 변화하는 가운데서도 지속됐고, 덕분에 인간 시리즈 역시 계속해서 변주되었다. 또한 이응노는 1960년대부터 순수 미술 장르를 넘어 프랑스 국립 태피스트리 제작소, 세브르 국립도자공장 등과 협업하며 공예나 디자인의 영역도 섭렵했다. 본 전시는 이응노가 1986년 프랑스 크리스털 제조사인 바카라(Baccarat)와 협업해 제작한 ‘올림픽 크리스털’ 여섯 종과 1988년 조카 이강세의 도자기에 그린 도화 작업을 선보인다. 이를 통해 그가 <군상> 연작을 통해서도 계속해서 조형 실험과 영역 확장을 꾀했음을 보이고자 한다. 이응노의 올림픽 크리스털 여섯 종 모두를 한 자리에서 함께 소개하는 것은 이번 전시가 최초이며, 도자기에 그려진 <군상>은 그가 생전 마지막으로 남긴 도화 작업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전시전경


전시전경


  인간의 형상은 이응노의 작업에서 꾸준하게 등장하는 소재였다. 1960년대 초 고암은 인간을 서로 손을 잡고 있거나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듯한 모습의 군중의 형태로 표현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기호가 아닌 하나의 주제로 여겨진 것은 그가 1967년 동백림 사건으로 투옥돼 고초를 겪은 이후부터다. 1950년대까지 고암은 서민들의 생활상을 옮겨 그리며 시대를 증언하는 방식으로 화폭에 인간을 담았다. 1960년 파리에 정착한 이후 이응노는 한동안 콜라주, 문자추상 작업 등으로 추상 화면을 구성하는 데 집중했으며 이 시기 인간은 정치적, 사회적 의미는 탈락된 채 추상화된 풍경의 일부, 혹은 <컴포지션(Composition)> 연작의 상형 기호로서 등장했다. 그러던 중 이응노는 1967년부터 1969년까지 2년 반의 시간 동안 수감생활을 하며 사회적 약자, 정치적 상황과 삶의 관계에 대해 다시 인식하게 되었고 그림이 인간과 사회에 대한 발언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자각을 계기로 인간과 함께 ‘평화’, ‘통일’과 같은 메시지가 그의 작업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내 그림은 모두 제목을 ‘평화’라고 붙이고 싶어요. 
저 봐요. 모두 서로 손잡고 같은 율동으로 공생공존을 말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 삶이 곧 평화지 뭐.” 

-이응노, 「조국의 감옥이 <인간>시리즈 탄생시켰어」, 『일요뉴스』, 1988. 10. 23. 中


전시전경


  본 전시에는 이응노의 옥중조각, 일명 ‘밥풀조각’ 세 점이 출품된다. 작가는 출소 후 있었던 한 기자회견에서 안양 교도소 수감시절(1968. 12. 23~1969. 3. 7) 죄수들이 밥풀을 뭉쳐 장기 말을 만드는 것을 보고 같은 방 수인들이 남긴 밥이나 심부름 하는 사람을 통해 얻은 밥 찌꺼기를 짓이기고 신문지 등과 반죽해 조각했다고 회상했다. 이로 인해 고암의 밥풀조각은 그가 안양 교도소로 이감된 이후 제작된 것이라 여겨져 왔다. 하지만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부조 형태의 조각에는 뒷면에 ‘재료(材料) 먹다가 남은 밥과 그리다가 바린(버린) 창호지(窓戶紙) 외피지(外皮紙)를 사용(使用)한 것이다. 68(년) 시월(十月) 대전(大田)에서 이응노 창작(創作)’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어 그가 대전 교도소 수감시절(1968. 8. 3~1968. 12. 23)부터 밥풀조각을 제작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 작품은 고암이 투옥 전 전개한 <컴포지션> 연작과 같이 인간이나 동물을 본뜬 듯한 기호들이 한 데 뒤섞인 형태를 하고 있으며 요소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도상은 후에 여러 사람이 나란히 서서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고 함께 춤을 추는 입상(立像) 형태로 발전한다. 이응노는 이렇게 서로 손잡고 같은 춤을 추고 있는 인간의 형상을 두고 공생을 염원하는 ‘민중’이라 칭했으며 이는 훗날 이어지는 <군상> 연작의 시원이라고 할 수 있다. 



전시전경


  고암은 1969년 석방된 이후 문자 추상이라는 독자적인 양식을 개발하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사람을 그렸다. 1970년대 이응노는 가구, 크리스털, 무대나 무용 의상 등을 디자인하거나 민속공예에 관심을 가지면서 자신의 영역을 넓혔는데, 이 덕분인지 그는 전보다 훨씬 화려한 색채와 무늬를 사용해 인물을 장식적으로 표현했고 군무(群舞)를 추는 모습을 다수 그렸다. 또한 이 시기 세 명 내지 다섯 명 정도의 사람이 어깨동무를 하고 서로 한 몸이 되어 마치 날개를 펼치듯 만세를 부르고 있는 도상이 자주 등장했는데, 여기서 나타나는 굵은 획과 이를 두르고 있는 윤곽선, 그리고 도식적인 구조는 후기 문자 추상 작업의 주된 표현법으로, 추상에서 <군상>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전시전경


  1980년 파리에서 각종 매체를 통해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소식을 접한 이응노는 “지금까지 추상만 해 왔다. 그러나 <군상>부터는 구상으로 바꿔서, 이 혼란한 시기에 좀 더 명료하게 평화, 남북통일 등의 염원을 좀 더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전달하겠다”고 다짐하며 작업에 큰 변화를 꾀했다. 추상보다는 구상 작업, 그 중에서도 인간 시리즈, <군상> 연작이 사회적 발언에 적합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고암은 ‘인간 시리즈’를 두고 통일무(統一舞)라고 했다. 통일된 광장에서 환희의 춤을 추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였다. 군상 연작에 등장하는 인물들에서 두 손을 높이 들고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은 형태나 손에 악기를 들고 있는 모습, 상모돌리기가 연상되는 모자를 쓴 형상이 관찰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아들 이융세의 인터뷰에 따르면 고암은 프랑스 거주 시절 무용 공연을 즐겨 보았다고 한다. ‘춤’이 이응노에게 인간의 움직임에 대한 자극, 율동감 있는 선의 표현에 대해 영향을 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인간 시리즈에서는 전에 없던 시도로 200호 이상의 대형 회화를 그리기 시작했고 화면 전면에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빼곡히 그려 넣어 집단적 움직임을 표현했다. 고암은 <군상>의 주제가 “광주 민주화 운동”과 같은 특정한 사건에 국한되지 않고 한국의 역사적 맥락을 벗어나 인류 보편의 가치가 되기를 바랐다. 그래서인지 <군상> 속 사람들은 성별이나 인종, 나이 등을 가늠할 수 없는 익명의 형태이며, 그러면서도 자유롭게 각기 다른 몸짓으로 모여 ‘반전(反戰)’, ‘평화(平和)’와 같은 문구를 이루기도 한다.

전시전경


  이응노의 <군상> 연작은 사람들의 일상과 더욱 밀접한 응용 미술의 영역에서도 전개되었다. 1986년 이응노는 프랑스의 크리스털 제조사인 바카라 측의 제안으로 <군상>의 도상을 활용해 장식용 크리스털을 제작했다. 크리스털은 총 여섯 종류로 제작되었으며, 올림픽의 경기 종목 중 마라톤, 수영, 승마, 축구, 유도, 장대 높이 뛰기를 표현한 이응노의 그림이 각각 새겨져 있다. 이응노의 전체 작업 세계를 봤을 때 운동 경기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소재인데, 올림픽은 인류의 평화와 화합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그의 작업 주제와 맞닿아 있고, 때문에 이응노는 바카라와의 협업이 <군상>의 메시지를 더욱 확장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응노는 <군상>을 도자기 위에도 그려 넣었다. 이응노는 1967년 그의 작업에 감명을 받은 세브르 국립도자기 공장의 디렉터의 제안으로 도자를 작업의 매체로 활용하기 시작했는데, 이번 전시에 출품된 이응노의 도화 10점은 1988년에 제작된 것으로, 그의 생전 마지막 도화 작업이다. 이 작품들은 고암의 조카인 도예가 우출 이강세(又出 李綱世, 1946-)와의 합작이며, 이강세의 도자기에 이응노가 그림을 그리는 방식으로 제작됐다. 이강세의 회고에 따르면 둘의 협업은 한국에서 제작한 초벌구이를 파리로 보내면 이응노가 그 위에 그림을 그리고 2차 소성을 한 뒤에 다시 이를 한국으로 보내 3차 소성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이는 일련의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작업활동이 어려워지자 어쩔 수 없이 프랑스로의 귀화를 선택한 이응노가 고국에서 작업을 완성하고자 얼마나 노력했는지, 그 의지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1987년 비로소 동백림 사건의 간첩 혐의에서 벗어나게 된 이응노는 1989년 1월 호암갤러리의 초청으로 한국에서 12년 만에 개인전을 개최하게 되었고 귀국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응노는 그토록 그리워하던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전시가 열리고 있던 중 파리에서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별세했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군상>에 매진했고 무수한 변주를 만들어 인간의 삶에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총 2부로 진행된 이응노 탄생 120주년 기념전은 고암의 화업 전반을 돌아보며 그의 예술이 항상 인간을 향해 있었음을 확인했다. 가나아트와 가나문화재단은 그가 평생을 노래한 인류 평화의 메시지가 이번 전시를 통해 다시금 우리 사회에 닿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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