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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민 : 항해하는 물질 Voyage of Matter

  • 전시분류

    개인

  • 전시기간

    2024-09-03 ~ 2024-09-15

  • 참여작가

    이정민

  • 전시 장소

    CN갤러리

  • 유/무료

    무료

  • 문의처

    02-739-6406

  • 홈페이지

    http://cngallery.kr/

  • 상세정보
  • 전시평론
  • 평점·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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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민 : 항해하는 물질 Voyage of Matter


■ 전시개요

전 시 명  : 항해하는 물질 
전시기간 : 2024. 9. 3(화) ~ 9. 15(일)   
참여작가 : 이정민
전시장소 : CN갤러리 F1, F2 (서울 종로구 북촌로 5길 56-7, 정독도서관 앞) 
관람시간 : 10:00 am - 6:00 pm(월요일, 공휴일 휴관)
관 람 료  : 없음
후       원 : 충청남도, 충남문화관광재단
문       의 :  02-739-6406
홈페이지https://cngallery.kr/



글: 이정민

본 전시 《항해하는 물질》은 2021-2023년도와 올해의 최근 작품들로 구성된 전시이다. 자연 속 경험, 개발을 목전에 둔 원도심, 모두가 떠난 공터의 들풀에서 인간 삶의 모습과 유사함에 주목하고 관계에 의해 변화와 변질을 동반함이 구체화 되어 가는 과정중임을 시각화하고자 다매체 혼용을 더욱 심도 있게 연구한 실험들의 결과물을 전시한다. 또한, 작업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매체에 관한 실험의 장이라고도 볼 수 있다.

전시명에서 엿볼 수 있듯, 물질은 사용된 매체로서, 소재로 사용된 식물과 이미지로서, 그리고 작품이 은유하고 있는 인간으로서 모두를 통칭하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항해’는 포스트-매체(post-midium) 담론을 제시한 로잘린드 크라우스(1941~, Rosalind Epstein Krauss)의 저서, <북해에서의 항해>에서 어원을 빌려 왔다. 

작품의 형식과 내용을 모두 아우르는 매체의 사용은, 탄소 기반의 감광성 유기물질과 태양빛, 온도등의 비물질과 얽혀 인화되는 고전프린트 사진, 그리고 자연염색과 견뢰도를 높이기 위한 일부 과정, 화면의 깊이를 더하기 위한 회화 혼용으로 이루어졌다.

성질이 상반되는 인화와 견뢰도 향상의 두 과정에서 작가의 적절한 타협과 균형으로 이미지가 생성되는데, 이러한 특징에 수반된 비고정성과 불확정성의 수용은 인간 삶을 반추해 볼 수 있는 메타포로 작동되며, 들풀 생태의 형상으로 드러낸다.

작가는 이번 전시 <항해하는 물질>에서 자연의 한 부분에 불과한 인간의 삶 또한, 주어진 소명을 이루어 나가는 ‘항해의 장’임을 확인하고, 변환의 여지가 담긴 씨앗과도 같기에 절망보다는 희망을 품어 갈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라고 있다.




가제교의 달맞이 풀2_sunprinting, natural dyeing, oriental ink, botanic emulsion on paper_162x97cm_2024


대전육교의 넝쿨1_sunprinting, natural dyeing, oriental ink, botanic emulsion on paper_162x97cm_2024


열두 로제트_natural dyeing on paper, soil_25.2x16cm, eachx70-90_가변설치_2023


스물네 개의 해_natural dyeing on paper_15x11cm, eachx20 / wood frame_172x28cm, eachx24_2023




■ 전시평론

이정민의 ‘항해하는 물질’
: 비인간 행위자들과의 네트워크로 창발하는 변이의 회화

장훈영 (독립비평)


  서구 모더니즘 사상과 그를 토대로 한 사회변화는 인간과 비인간, 문화와 자연,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과 인간중심주의를 초래하며, 생각하는 인간만이 자율적인 행위를 할 수 있다는 관념을 형성했다.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체계는 전세계적으로 수많은 분열과 한계를 드러냈으며, 특히 근래 수십 년 동안 지구에서 벌어진 전염병, 환경오염, 지구온난화 등의 전례 없는 문제들은 인간이 자연과 분리된 존재가 아님을 명확히 인식하게 만들었다. 이는 인간이 다양한 비인간들과의 관계, 곧 하이브리드의 세계에서 살아왔음을 자각하게 한다. 이러한 시대 현실 속에서 인간중심주의와 이분법적 사고를 극복하며, 비인간과 인간 사이의 위계를 허물고 비인간의 지위를 회복하려는 움직임들이 등장했다. 신유물론이라는 이 이론적 흐름의 시작에는 비인간을 행위자로 보며 인간과 비인간들이 함께 사회를 구성하는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의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ctor-Network Theory, ANT)이 자리한다.

  라투르는 모더니티가 시간을 도약과 단절로 인식하며, 세계를 전적으로 구분되는 두 영역으로 나누는 정화와 동시에 이들 간의 하이브리드를 생성하는 번역의 차원을 가진다고 말한다. 근대인은 모든 세상을 이항대립으로 구별하여 정화하려 했지만 그들이 설정했던 깨끗하고 순수한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근대인의 모순을 지적하며 대안으로서 시간을 일종의 나선 혹은 소용돌이의 운동으로 상상하며, 비근대성과 일반화된 대칭성의 원칙을 추구한다. 이것은 각각의 행위자들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하지만, 다 같이 동등하게 네트워크 안에서 인정받고 능동적인 행위자로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과 비인간을 포함한 행위자는 무수한 이종적 네트워크들의 관계 속에서 행위능력을 획득하는 존재로,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여러 시련을 겪는 유동체1)이다. 라투르는 실체로서 행위자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 자체에 중점을 두며, 행위자가 다양한 시험 또는 수행을 통하여 존재하기까지 겪게 되는 복잡한 과정에 주목한다. ANT의 비인간 행위자는 인간을 제외한 모든 것으로, 인간과 동일한 행위성을 지닌다고 가정한다. 이에는 생명체인 식물, 동물, 곤충, 미생물과 생명체가 아닌 햇빛, 온도, 습도, 대기, 암석들, 그리고 인간이 만든 인공물 즉 유리, 목재, 철, 플라스틱 등도 전부 포함된다. 하나의 기획에 이질적 행위자들을 참여시켜 새로운 네트워크를 형성해 가는 일련의 과정을 번역이라고 하는데, 이는 신호를 전달하며 왜곡하기도 하는 매개와도 관련된다.

1)브뤼노 라투르,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에 관하여: 약간의 해명, 그리고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기」, 『인간·사물·동맹: 행위자네트워크 이론과 테크노사이언스』, 서울: 이음, 2010, p. 109.

  이정민의 작업은 작품의 제작 과정, 조형 요소, 주제와 미학이 가지는 밀접한 상호관련성과 시의성의 측면에서 라투르의 관점과 ANT가 주장하는 동시대의 상황에 부합한다. 그는 자연을 소재로 변이하는 시간성을 회화로 표현하며 이를 위해 사진의 고전 프린트 방식, 판화와 염색, 작가 고유의 유기 물질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한다. 그는 이름 모를 꽃, 들풀, 나무 등 일상의 시간에서 변화하는 자연의 다채로운 모습을 실물이나 사진의 형태로 수집하여 그로부터 조형적 사유를 전개한다. 선 프린팅(Sunprinting)의 중첩은 매체적 프로세스, 자연의 방법과 인간의 연구가 어우러지며, 제작 환경과 재료들이 만드는 우연성과 이질성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하이브리드이다. 작가는 자연물에서 추출한 유기 물질과 먹, 수채화와 동양화 안료 등 사물과 인간의 긴밀한 협응으로 이루어진 재료들을 선호하며,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자연과 물질의 물리적, 화학적 성질에 순응한다. 햇빛, 기온, 습도, 바람 등 주위 시공간적 환경과 유기 물질들의 성분, 반응, 상호작용과 협력하여 조형적 효과를 창출한다. 이렇듯 그는 비인간 행위자들을 작품 제작이라는 기획에 적극적으로 참여시켜 번역하여 네트워크를 생성한다.
  
 이 이정민-행위자-네트워크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은 비인간 행위자들의 능동적인 개입으로 인한 오염과 변이가 작품의 조형성과 개념의 주요한 한 축이라는 점이다. 완성된 작품은 이후로도 이 행위자들에 의해 조금씩 상태가 변화하는데, 이러한 재료적 변질을 작가는 시간과 자연의 순환에 대한 미학적 은유로 이행시킨다. 변이의 강도와 화면의 조형적 요소를 조정하기 위한 이정민의 탐구적 시도는, 비인간 행위자들과의 끊임없는 시험과 수행을 통해 다양한 시련을 경험하며 성장하는 그의 작품의 동력이다. 이정민의 조형적 방법론은 블랙박스화2) 되어가는 과정 중에 있으며, 그와 동시에 비고정성과 불확정성을 허용하는 네트워크이다. 작가는 블랙박스 안에서 작품을 만드는 비인간 행위자들의 모든 행위능력을 파악할 수 없다. 그는 이들에게 작가의 의도를 강제하지 않는다. 작가는 이 행위자들과 함께 대칭적으로 사고하며, 이들의 우연적이고 다양한 상호작용을 중재하고 그로 인하여 창안되는 효과를 겸손하게 받아들인다. 그는 블랙박스에서 벌어지는 비인간 행위자들의 무한한 행위들을 돕는 조력자이자 중재자이며, 동등한 자격으로 이들과 블랙박스 속의 창발에 같이 참여한다.

2)블랙박스란 내부의 복잡한 구성물과 조작이 무관심의 대상이 되어 알 필요가 없는, 일종의 안정화된 네트워크를 말한다.
  
 이정민이 일상에서 접한 자연에 관한 남다른 관심과 따뜻한 시선은 곡선과 타원, 비정형의 조형성과 작품의 제목들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이는 그의 작업에 흐르는 감성과 미학적 바탕이 느림과 부드러움임을 보여준다. 식물은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시기가 모두 다르다, 그냥 다를 뿐이라는 걸 어느 순간 이해했다는 작가의 말은 오랜 시간과 풍파를 유연하게 버텨내며 천천히 피어나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삶의 과정을 유비한다. 재개발지에 자라나는, 그냥 지나쳐 버리는 외진 곳의 식물들, 그들의 색깔과 촉감, 모양과 특성이 그를 매혹하며, 그들은 작가와 연결되어서 또 다른 예술적 행위능력을 얻게 된다. 그는 이들 식물 행위자들을 작업으로 번역하여 새로운 식물-이정민, 유기 물질-이정민 네트워크를 조성한다. 주변의 풍경과 사물을 세심하게 살펴보는 자연관찰자의 자세는 비인간 행위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생태화를 지향하며, 거시적인 서사와 원리가 아닌 미시적이고 사소한 실천에 집중하는 테크노 사이언스의 태도와 닮아 있다.

  이정민의 이번 전시인 《항해하는 물질》은 2021-2023년도와 올해에 제작된 최근 작품들로 구성된다. 자연 속에서의 경험, 개발이 예정된 도시와 공터의 들풀 등을 소재로 인간과 식물, 자연 생태 간의 상호 얽힘과 변화하는 시간성을 형상화하고, 그동안 그가 꾸준히 주력해 온 다매체적 혼용을 더욱 심도 있게 연구한 실험들의 결과물을 전시한다. 작품의 내용과 형식을 포괄하는 매체의 사용은 작가가 직접 제작한 감광성 유기 물질과 사진적 과정인 고전 프린트의 인화, 작품 표면에 깊이와 촉각성을 더하는 회화와 판화, 그리고 자연 염색과 견뢰도를 높이기 위한 일부 과정의 하이브리드로 이루어진다. 창과 방패와도 같이 성질이 상반되는 인화와 견뢰도 향상의 두 과정에서 작가의 적절한 타협과 균형으로 이미지가 생성되는데, 예상하지 못한 자연과 물질의 반응들은 종종 의도치 않은 표면 효과로 나타난다. 

  <부드러운 속도 5>는 자연의 비법과 작가의 방법론이 총체적으로 결합된 대작이다. 서로 다른 매체의 재료들이 조화롭게 한데 스며들며 보이는 형상은 오묘하고 애매모호한 색채와 형태가 집적되어 표현된다. 이 역동적인 회화의 공간에는 충만한 물질과 에너지가 응축과 발산, 교차와 확장을 반복하며 강도적 울림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내부와 외부가 구별되지 않고, 모세혈관과 같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네트워크이자 리좀이며, 자연과 인간의 경계를 허물고 그 사이의 연속성을 회복하는 집합체이다. 구조물을 휘감거나 타고 올라 주위 환경과 동화되며 삶을 영위하는 넝쿨식물을 연상케 하는 이미지는 여러 개의 패널을 연결하여 보여지는데, 전시장의 벽면을 따라서 약간씩 어긋나는 설치 방식은 이 작품 행위자가 전시공간, 그리고 관객과 맺는 협상의 네트워크라 할 수 있다. 작품의 시간은 선형적으로 흐르지 않으며 다차원적이다. 한때 푸르렀던 식물의 지나간 과거, 숨어 있던 질감과 색, 명암의 스펙트럼이 면면히 나타나는 찰나의 현재, 미세한 갈색의 변환, 순환에의 기대와 희망을 내포하는 미래가 뒤얽히며 한 화면에 공존한다. 인간과 비인간 행위자들이 빚은 사건들로 구성된 작가의 회화에 드러난 시간성은 휘몰아치는 듯한 소용돌이와 나선의 궤적으로 시각화된다.  

  <가제교의 달맞이 풀>과 <대전육교의 넝쿨>은 작가의 삶의 터전이었던 대전 원도심3)에서 자라는 식물들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이들은 도시개발 때문에 베어내진 여름내 훌쩍 커 꽃피운 다리 밑의 달맞이 풀, 그리고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고속도로 교량 아래 살아가는 넝쿨식물들이다. 작가는 그들이 살아남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알고 있기에 마음이 아팠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주체와 타자, 중심과 배경을 구분하는 인간 중심적 형태가 아닌, 자연의 모습과 운동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사물 중심적 형태를 지향한다. 그는 인간의 기준과 이미지의 재현에 집착하지 않고, 자연의 양상을 따라 벌어지는 비인간 행위자들의 상호작용과 비가시적인 힘들의 배치에 초점을 맞춘다. 색상의 명도와 채도, 축적된 효과들의 기묘한 변모는 우연적 요소들의 수용과 창발로 새롭고 유동적인 의미를 만들어내는 변이의 과정이다. 인간의 목적을 위해 삶을 다한 식물들은 작가와 함께 공명하며 작품이라는 사건으로 다시 태어난다. 깊이와 세련미를 동시에 갖춘 이 작품 행위자들은 몹시도 매력적이다.

3)도시의 옛날 중심지, 혹은 원래부터 내려오는 중심지를 뜻한다.

  작품에서 언뜻 내비치는 작가의 모습은 라투르가 말한 열정적인 실험 과학자의 태도와 비슷하다. 그는 주변의 사물을 주의 깊게 바라본다. 구도심을 재정비하면서 버려진 야생식물에 공감하고 그 아름다움을 찾아내며, 폐고속도로의 다리를 감싸고 솟아오르는 넝쿨식물의 유연성과 생명력에 경이로움을 느낀다. 그에게는 자연 사물을 감각하고 모시는, 위계 없는 시선과 특별한 심미안이 있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익어간다고 표현한다. 익는다는 것은 홀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씨나 곡식, 장이나 거름 등이 익어가는 현상은 인간만이 아닌 다양한 비인간 행위자들이 관여하여 여물고 맛이 들고 변하는 과정이다. 그는 어떤 작품은 다시 하래도 못한다고 한다. 그것은 마치 호두까기 인형처럼 밤이 되면 지들끼리 쿵짝하면서 놀고, 인간이 일어나면 아무것도 아닌 척하는 신비하고 환상적인 모험의 세계가 가져다 준 선물 같은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이정민은 더 크고 단단한 작가-예술-네트워크를 생성하기 위해 이런 이질적 행위자들을 더 과감하게 많이 가담시키며 영향력을 발휘하는 하이브리드로서의 예술 작품을 조성한다.

  <열 두 로제트>와 <스물 네 개의 해>는 자연 염색과 판화의 형식을 활용하여, 시간에 따른 자연의 변화에 맞춰 슬기롭게 삶을 헤쳐나가는 들풀들에 대한 관찰과 기록이다. 로제트는 땅바닥에 바짝 붙어서 잎이 죽지 않은 채로 겨울을 나는 식물로 그 모양이 흡사 장미꽃을 펼쳐놓은 것과 같다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다. 민들레, 냉이, 달맞이꽃 등 두해살이풀이나 여러해살이풀이 로제트 형태를 띤다. 그들은 여름에는 키가 커지고 꽃을 피우며, 가을에는 줄기가 짧아지고 잎이 넓어져 땅에 무성하게 퍼지면서 겨울을 보낼 준비를 한다. 이들은 작가가 말한, 살아남기까지 무수한 시련의 과정을 거친 그 식물들이다. 작가는 이런 로제트 식물과 다양한 자생식물을 활용하여 명리학적 관점에서 자연과 조화되어 순환하는 인간 삶의 시간을 암시한다. 각각 12운성과 24절기에서 영감을 받아 작업한 소품들을 바닥에 흙과 같이 쌓아두거나 세로로 긴 프레임에 붙여서 나열하여 설치한다. 이 방식은 자연이 그러하듯이 전시장의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며, 전시 작품의 개수를 12개나 24개가 아닌 몇 개를 더하거나 빼는 방식으로 상호 관계 속의 일부분인 인간의 욕심과 운명을 함의하기도 한다. 이 두 작품은 여럿이 모여서 하나를 이루는, 그러나 낱낱이 들여다보면 또 다른 하나의 작품이 되는 작품-네트워크이다. 개개의 작품들이 간직한 생동하는 기운과 색조, 형상들은 작가와 이질적 행위자들의 다채로운 매개 작용과 번역의 수행으로 만들어진다. 

  <뒤로 멈춤, 앞으로>는 비인간 행위자들과 얽혀 여전히 미시적인 움직임을 갖는 자연 염색을 기반으로 한 콜라주 회화 작품이다. 작품명은 스러진 들풀들이 과거에 멈춘 것으로 보이나 그 안에 품은 씨앗이 있어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들풀들은 씨앗을 품기 위해 진화하고 생존한다. 들풀 오브제들은 콜라주된 것도 있고 붙였다 떼낸 것도 있으며 자국만 남긴 것도 있는데, 작품의 부분들을 보면 풍부한 갈색 톤에 검은색, 흰색, 푸른색 등의 촉각적인 흔적들과 여러 방향의 크랙들이 미세하게 변이한다. 이러한 변이는 작품의 절합을 이끌어낸다. 절합이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더 세밀해지는 구분들, 갈수록 미묘해지는 뉘앙스들, 그리고 더욱더 늘어나는 연결들과 객체들을 어느 만큼 인식하는가라는 문제다.4) 작가는 이를 위해, 이미지의 섬세한 차이를 감지할 수 있게 자신의 신체와 감각을 연마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그는 절합의 리듬과 색깔, 박자를 민감하게 인식하며, 복잡한 측면들을 정교하게 탐구한다. <때를 따라>는 작가가 직접 농사짓거나 채집해 온 씨앗과 들풀을 설치한 작품이다. 햇빛이 드는 쪽에 놓인 씨앗들은 움트는 생명과 앞으로 이어갈 삶의 꿈들을 품은 바람들이다. 그는 하나하나, 사려깊고 조심스럽게 이 작은 사물들을 다루며, 뒤에 멈추었으나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자라날지 모르는 식물들의 순환적 삶에서 절망이 아닌 희망을 읽는다. 때를 따라 움직이고 살아가는 자연의 씨앗들처럼, 그는 진중하게 생각하고 천천히 다가가는 태도와 개방적인 자세를 가진다.

4)아네르스 블록, 토르벤 엘고르 옌센, 『처음 읽는 브뤼노 라투르: 하이브리드 세계의 하이브리드 사상』, 황장진 옮김, 고양: 사월의책, 2017, p. 167.

  이와 같은 작가의 의식은 돌봄과 주의5)로 정의할 수 있다. 비근대인이 갖추어야 할 대안적 덕목인 돌봄과 주의는, 행위는 어떤 주체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집합체의 연합으로 발생한다는 점을 알고 예측 불가능하며 불안정한 비인간 행위자들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네트워크를 만들기 위해 이질적 행위자를 기획에 등록하는 번역의 과정에서, 한 행위자가 다른 행위자의 강점을 빌리는 방식은 결국 권력의 위임과 같다. 작가는 일상의 삶 속에서 인간에 의해 발생할 수 있는 이러한 문제의 가능성을 몸으로 체득하며, 비인간 행위자들을 존중하고 공생하는 협력자이자 동반자로 여긴다. 이정민-예술-네트워크는 실천하는 인간과 비인간 행위자들의 연대로 구성되는 예술적 기획이며, 끊임없는 창발과 변이를 통해 그 조형 세계를 확장해 나가고 있다.

5)브뤼노 라투르, 『판도라의 희망: 과학기술학의 참모습에 관한 에세이』, 장하원·홍성욱 옮김, 서울: 휴머니스트, 2018, pp. 454-460.

  이정민은 전시명 《항해하는 물질》에 대하여, 물질은 사용된 매체와 소재인 식물과 이미지, 그리고 작품이 은유하는 인간 모두를 통칭한다고 말한다. 자연의 한 부분에 불과한 인간의 삶 또한, 주어진 소명을 이루어 나가는 항해의 장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항해는 미지의 세계를 찾아나가는,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행위자들과 함께하는 나날이다. 이정민의 회화는 햇빛, 날씨, 나무, 들풀, 돌 등 우리가 지나가며 미처 보지 못했으나 항상 우리 곁에 있는 것들을 환기시킨다. 그의 작품은 우리의 삶과 닮았다. 삶과 자연이 작품의 시간 속에서 하나가 된다. 인내와 시련의 시간 끝에 이어지는 화합과 행복의 시간, 그리고 희망의 시간. 그 기나긴 항해의 여정에서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우리는 생각한다(Cogitamus ergo sumus), 고로 우리는 구성해야 할 세계로 함께 들어간다.6)

6)브뤼노 라투르, 『브뤼노 라투르의 과학인문학 편지: 인간과 자연, 과학과 정치에 관한 가장 도발적인 생각』, 이세진 옮김, 고양: 사월의책, 2023, p. 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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