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부터 박서보재단은 청년 창작 활동 지원을 위해 [캔버스 지원 프로젝트]를 시행했다. 고 박서보화백은 작고 직전까지 자신의 작업을 위해 신문지를 배접한 캔버스를 제작했다. 재단은 노 화백의 꿈을 이어 받아 캔버스를 청년 작가들에게 지원하여 후세의 작가들을 지원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이혁은 자신의 이야기를 박서보의 캔버스에 풀어 낸다.
이혁은 1988년 평안남도에서 태어났고 2006년에 탈북하여 2009년에 한국에 입국했다. 이미 작가의 삶에 대한 굵직한 경험이 보이는 듯 하다. 이혁은 북조선의 ‘고난의 행군’과 함께 자라났고, 황해북도 사리원예술전문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중국에서는 불법 체류 노동자로 짧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한국 사회에서 자신의 자리를 만드는 일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이혁은 이 모든 혼란과 자신의 이야기를 작업으로 풀어낸다.
출발점이 된 것은 <자화상>이다. 작가는 자신의 계급 의식과 이주민으로서의 인식을 버려진 개로 표현한다. 인터뷰(1)에서 이혁은 지배 계급이 보여주는 피지배 계급에 대한 인식이 개와 닮아 있어 반발심리도 있었다면서, 동시에 이주민으로서 느끼는 한국 사회와 자신의 역동을 개 이미지에 투영하기도 했다고 설명한다. 그가 기억하는 떠돌이 개는 일견 비굴할 만큼 순종적일 수 있으면서도, 야생성이 살아 있어 다가섰을 때 그 곁을 내어줄지 확실하지 않다. 언어로 소통하는 것은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분명한 몸짓의 신호를 공유하기도 한다. 오묘한 관계다. 이혁은 자신의 감정 상태를 개의 몸을 빌어 가시화하고 싶었다고 덧붙인다.(2)
새로이 작업한 <자화상>(2024) 3점에서 개는 각기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어둠을 앞에 두고 돌아보는 개, 앉아 있거나, 올려다보는 시선과 함께 천천히 몸을 움직이는 애처로운 모습, 다리의 움직임이 사라지기 전에 재빠른 필치로 그려내 어디론가 걸음을 옮기는 듯한 움직임만 남은 개. 경계를 헤집고 다니는 개는 과연 작가 본인의 모습 같기도 하다. 평안남도와 황해북도, 중국, 그리고 서울, 대한민국에 온 이후로도 하동, 창원, 대구, 천안으로 작가는 떠돌았다. 어딘가에 정착하기보다 늘 어떤 여정 위에 있다.
그 여정 동안 마주한 풍경과 올려다 본 달 또한 이혁이 자주 그리는 대상이다. 산수화 속 공간은 자본과 이념, 그 어떤 것도 개입하지 않고, 그리운 대상을 만날 수도 있는 곳, 작가의 이상향을 상징한다. <관월도> (2024)에서 드러나는 밤하늘과 어둠이 삼켜버린 산수, 그리고 휘영청 떠오른 달의 명암 대비는 작가의 표현대로 “어둠을 그리지만” 동시에 “빛을 그리는” 모습이다.(3) 자화상과 산수화, 두 주제를 반복하여 그리는 일은 그래서 작가가 대비되는 현실과 이상의 사이에서 자신의 위치를 조율해 나가는 일처럼 보인다.
거친 붓 선으로 형상만이 흐리게 남은 <행려도>(2024)의 배를 탄 나그네는 현실과 이상의 사이의 공간에 떠 있다. 회화 표현과 동세를 강조하는 북조선의 미술 교육(4)이 이혁에게 남긴 표현 방식과 배경에 아스라한 1950년대 월스트리트 저널이 어우러진다. 어느 것도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시간, 이념과 사회를 배경에 두고 나그네는 또 어떤 경계를 넘어가는가.
이혁은 말한다. “[내 작업의] 방법론은 바로 이 혼란에서 출발한다. 과거와 현재를 받아들이는 수용적 태도로, 진부함과 새로움, 구상과 추상, 표현과 절제가 한 화면에서 기우뚱하게 공존하는 방도를 연구하고자 한다.” (5)
누구나 경계에 머무는 시간이 있다. 이혁의 작업은 그 시간을 탐구해 보기를 제안한다.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이상향을 그려낼 수 있다면, 경계를 건너는 것은 스스로를 확장하는 경험이 될 것이다.
(2) 상동
(3) “산수화 속 공간은 이념과 자본이 개입할 수 없는 나의 이상향이며, 그리운 대상과 만날 수 있는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공간이다. 나는 어둠을 그리지만 빛을 그리며 표현하지만 절제하고자 한다” 2022 갤러리밈 개인전 작가노트
(4) 이혁의 북조선식 미술사고와 표현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는 임근준의 글 「[미완의 보고서] 어떤 초국적 횡단의 가능성 : 이혁의 회화 세계는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는가?」, 『더 느리게 춤추라 : N Artist 2023』, 경남도립미술관, 2023 참고.
(5) 임근준, 「[미완의 보고서] 어떤 초국적 횡단의 가능성 : 이혁의 회화 세계는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는가?」, 『더 느리게 춤추라 : N Artist 2023』, 경남도립미술관, 2023 에서 화가 이혁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