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테리아, 꽃, 기계 곤충··· ‘감각의 실험실’이 된 미술관
‘스스로 진화하는 작품’아니카 이의 명상적이고 영적인 전환
□ 기술과 생물, 감각을 연결하는 실험적인 작업을 전개하는 한국계 미국인 작가 ‘아니카 이’ 의 세계를 조망하는 아시아 첫 미술관 개인전
- 자아와 타자의 경계 없음에 대해 탐구하며 작업의 확장과 전환을 모색하는 <산호 가지는 달빛을 길어 올린다> 등 신작 11점 첫 공개
- 신작을 비롯해 기존 대표작 <방역 텐트>, <꽃 튀김 패널> 연작 등 총 33점으로 작가의 작품 세계 전반과 최근 경향을 폭넓게 선보임
- 심해와 외계를 연상시키는 향, 친족에 대한 고정관념에 균열을 내는 유전자 조작 형광 박테리아 등 폭넓은 연구와 다학제적 협력 작품 소개
리움미술관은 한국계 미국인 작가 아니카 이의 아시아 첫 미술관 개인전 《또 다른 진화가 있다, 그러나 이에는》을 M2에서 9월 5일(목)부터 12월 29일(일)까지 개최한다.
지난 10여 년간 제작된 작품 33 점이 출품되는 이번 전시는 신작을 포함한 작가의 최근작에 방점을 두고 이와 연결된 구작을 함께 전시하여 작가의 전반적인 작업 세계와 최근 경향을 폭넓게 소개한다.
아니카 이(b.1971)는 기술과 생물, 감각을 연결하는 실험적인 작업을 전개해왔다. 특히 박테리아, 냄새, 튀긴 꽃처럼 유기적이고 일시적인 재료를 사용해 인간의 감정과 감각을 예민하게 포착하고, 이산과 여성주의 등 사회적 이슈를 담아낸 작업으로 세계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또한 개미나 흙 속의 미생물 등 살아있는 생물을 조력자 삼아 제작한 작업으로 삶과 죽음, 영속성과 부패 등의 실존적 주제를 다루어 왔으며, 최근에는 기계, 균류, 해조류 등의 비인간 지능을 탐구하고 인간중심적 사고에 의문을 제기하는 작업을 선보여왔다. 작가는 과학자, 건축가, 조향사 등 다양한 전문가들과 협업하고, 생물학, 기술철학, 환경정의 등 다양한 영역을 넘나드는 폭넓은 연구로 작품의 깊이와 너비를 드러낸다.
전시 제목인 ‘또 다른 진화가 있다, 그러나 이에는’은 불교의 수행법 중 하나인 간화선(看話禪)에서 사용되는 화두의 특성을 차용한다. 이 수수께끼 같은 구절은 아니카 이 작업의 명상적이고 영적인 전환을 반영한다. 이 전환은 초기부터 각종 비인간 생물과 기계, 그리고 협업자들과 함께 작업하며 저자성(著者性)과 인간중심주의에 도전해 온 작가의 작업이 결국 ‘나와 타자의 경계 없음’ 에 대한 탐구였다는 것을 드러낸다.
또한 이번 전시는 한국계 미국인인 작가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선사 인류가 아시아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했다는 가설과 조류(藻類) 및 균류의 이동이 진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가설은 전시의 이론적 기반을 구성한다. 이처럼 물질적, 시간적, 정서적 차원을 아우르는 두 갈래의 탐구는 한인 교포로서 작가의 개인적 여정을 반영하고, 나아가 이주와 상호 연결성이라는 작업의 주제를 부각시킨다.
작업의 전환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신작인 영상 작품 <산호 가지는 달빛을 길어 올린다>(2024)는 죽음 이후를 탐구하는 작가의 대규모 프로젝트 <공(空)>에 속하는 첫 번째 작품이다. 작품은 ‘작가의 사후에도 작업이 계속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에서 출발한다. 아니카 이 스튜디오가 생산한 기존의 작업물을 데이터 삼아 훈련된 알고리즘이 작가 스튜디오의 ‘디지털 쌍둥이’로 기능하며, 공동의 연구와 협업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아니카 이 스튜디오의 유기적인 작업 방식을 반영한다.
또 다른 신작이자 미국 컬럼비아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 미생물학 연구실과 협력한 작품인 <또 다른 너>(2024)는 인간과 비인간 생명체 간의 관계를 탐구한다. 끝없는 환영을 만들어내는 인피니티 미러 형태의 작품 속에는 해양 유래 형광 단백질을 발현하도록 유전자 조작된 미생물이 자라면서 연하게 색을 발한다. 평범한 미생물이 합성생물학을 통해 해파리나 산호와 같은 해양생물의 유전질을 계승하는 과정은 고대의 바다와 현재의 우리 사이의 연결지점에 대한 작가의 관심을 드러낸다.
최근까지 이어지는 연작과 기존 대표작도 소개된다. 튀긴 꽃으로 만들어진 신작 <생물오손 조각>(2024) 연작은 작가의 2000년대 작업에서부터 등장한 튀긴 꽃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이다. 튀겨진 꽃의 기름진 외형과 시큼한 부패의 냄새는 일반적으로 꽃이 상징하는 아름다움과 충돌한다. 유기물로 이루어진 작품의 불안정한 상태는 작가가 작품의 유일한 창작자가 아님을 드러낸다. ‘생물오손’은 물에 잠긴 고체에 미생물이 붙어 자라면서 형성되는 생물막을 일컫는 말로, 인체나 인간이 만든 구조물에 침투해 균열을 일으키는 자연의 힘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최근 선보인 <방산충>(2023) 연작은 고생대 캄브리아기 화석에서도 발견되는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생물인 해양성 플랑크톤인 방산충류를 참조한다. 방산충의 형태를 닮은 모습과 마치 숨을 쉬듯 고동치는 조명,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말렸다 펴지기를 반복하는 촉수는 유기체와 기계의 소통을 상상하는 작가의 ‘기계의 생물화’ 개념을 반영한다.
대표적 초기작 <방역 텐트>(2015) 연작은 2014년 서아프리카 에볼라 유행 당시 드러난 전염병을 둘러싼 공포와 편견에서 출발한 작업으로 방역 텐트를 연상시키는 비닐 텐트에 생물 재해 표지를 연상시키는 패턴과 냄새나 촉감 등 감각과 연결된 오브제가 놓여있다. 작품은 전시장을 법의학 현장으로 둔갑시키며 전염과 위생에 대한 사회적 차원의 편집증과 보건의료 위기 시 소외계층이 받는 큰 타격과 단절에 주목한다.
이 외에 거대한 PVC 구조물로 장내 미생물에 의한 신진대사를 탐구한 <공생적인 빵>(2014), 제국주의적 문화의 전유, 환경 오염, 선주민 문명 소실 등을 다룬 공상과학적 내용의 3D 영상 <향미의 게놈지도>(2016) 등의 초기 작업이 함께 소개된다.
전시를 기획한 리움미술관 이진아 큐레이터는 “지난 10년간 아니카 이의 주요 작업을 망라하고 작업의 큰 전환을 보여주는 신작을 처음 공개하는 전시로, 현재까지의 작품 세계를 톺아보고 앞으로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고 밝혔다.
이번 전시는 중국 UCCA 현대미술센터와 공동기획으로 내년 3월 베이징 UCCA에서 이어서 개최된다. 유수 필자가 참여해 UCCA와 공동 출판하는 전시 도록이 내년에 출간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