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2024-11-06 ~ 2024-12-15
조영동
충북문화관,숲속갤러리 전관
무료
043-223-4100
전시서문
충북문화관 손명희
충북문화재단은 2013년부터 충북문화관에서 충북 작고 예술인에 대한 발굴 전시를 지속해 왔다. 충북미술 화단을 견인해온 선배 예술인들의 궤적들이 해마다 쌓이게 되면서 한 분 한 분에 대한 보다 더 심층적 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1920년대부터 1930년대에 출생한 충북을 연고로 한 작가들은 한국 현대미술사를 관통하며 한국 동시대 미술의 선구자적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러나 몇몇 드러난 작가를 제외하고는 탁월한 예술 세계를 일구었음에도 작업 활동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아 작가에 대한 평가 및 조명의 기회가 전무하였다. 늦은감이 있지만 이들 지역 연고 작가에 대한 철저한 미술사적 조명 작업과 위상 정립이 절실한 실정이다.
충북문화관은 2022년에 <이기원 초대전-추상, 끝나지 않은 길> 전시를 통해 서정적, 기하학적 추상회화 작업으로 평생의 화업畵業을 일군 ‘이기원’ 작가를 발굴하였다. 이번 전시 또한 이기원과 동시대 작가로서 1970~90년대 한국추상미술 화단에서 독자적인 추상미술 세계를 구축한 故조영동(1933~2022) 작가를 조명하는 자리이다. 조영동 <본질로 가는 길, Road to the Essence> 초대전은 한국 현대미술사 중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추상미술의 흐름에서 작가가 사물의 근원을 찾아 조형의 원리를 탐색하며 동시에 성스러운 에너지의 발현을 추구한 유작 1) 중에서 50여 점을 선정하였다. 조영동의 추상회화 양식은 조형적으로는 다양한 양상으로 변모를 시도했지만, 가톨릭 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보편의 정신적 맥을 잇는 줄기는 시종일관했다. 이러한 그의 마음속 깊은 주제는 ‘진정한 예술’과 ‘사랑’, ‘철학’이 통용되는 유토피아에 대한 꿈이었다. ‘토양 soil, 인간애 humanity, 종교화 ecco homo’의 추상적 의미의 주제는 그가 추구하는 추상적 양식을 더욱 고양시켰고 한평생 매진할 수 있었던 대 주제였다.
본 전시는 2022년 조영동 작가 타계 후 셋째 딸 2) 의 헌신적인 노력과 협조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노력의 결실로 조영동의 정신적 빛을 선보이게 되는 뜻깊은 자리가 될 것이다.
조영동의 화력畵歷
조영동 작가는 1933년 충북 음성군 생극 시골 마을에서 7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공부를 워낙 잘해서 모두가 서울대 의대에 갈 것을 믿었지만 3) 예술가가 꿈이었던 조영동은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울대 미대에 입학했다. 가난한 시골 농부의 자식으로 공부는 물론 많은 동생도 돌봐야 하는 책임감으로 대학 생활은 늘 빠듯했다. 등록금은 물론 물감과 캔버스를 사야 했기 때문에 극장의 간판을 그러거나 벽화 작업으로 생계를 이어갔고 정말로 돈이 없을 때는 헌혈을 하고 돈을 받아 물감을 사서 작업을 했다고 한다. 4)
1957년 대학 졸업 후 1958년까지 논산 대건고등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10여 년간 대전지역 5) 중고등학교에서 재직했고 1965년 목포 교육대 교수를 거쳐 1967년부터 1984년까지 공주 교육대 교수를 역임했다. 1973년부터 1974년까지 미국 휴스턴대학교 객원교수를 지내고 돌아와 1984년부터 1998년까지 성신여대에 재직하며 누구보다 교육 현장에서 미술교육이 인성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많은 홍보와 교육을 실행한 진정한 교육자로서 사명감을 다했다. 그 밖에도 조영동은 1997년 제13회 재경 충북작가회 전시에 참여하면서부터 꾸준히 충북 작가로서의 활동을 이어갔다.
조영동의 중요한 이력 중 하나는 그가 10대 시절에 6.25 한국전쟁의 참혹함을 겪은 후 대학생이 된 후 자신을 신앙의 길로 이끈 친구(훗날 사제 6) 가 됨)를 따라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된 후로 한국가톨릭 미술가협회에서 활동하며 수많은 성화 7) 를 제작하였다는 것이다. 조영동의 작업이 일관되게 삶과 조형의 본질을 찾아 매진할 수 있었던 주요 요인은 절대적 신앙의 맥이 예술의 바탕이 되었음이다. 그는 예술은 치유이고 희망이고 생명이고 인간 존재 이유임을 늘 강조하면서 나약하고, 고통받는 이들의 아픔을 공감하는 반 추상화에 가까운 종교화를 많이 남겼다.
조영동의 예술 세계 - 근원을 찾아서
조영동의 작품 세계는 1950~60년대 주로 대학 시절 스승이었던 장욱진 선생님으로부터 정신적인 영향을 밀접하게 받았다고 유가족은 회상한다. 8)
이어서 1970~80년대에는 한국화단의 추상미술의 열풍 속에서 창작미협이나 서울현대미술제, 아시아현대미술전 등 단체 전시에 참여하였지만, 당시 유행했던 기하학적 추상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점과 색’ 시리즈로 마치 핵분열 과정과도 같은 점들이 묽게 번지는 유동적인 추상회화 계열의 작업을 했다. 이 시기에 그는 미국 휴스턴 대학의 초청 교수를 마치며 미국 생활에서 겪은 인종 차별과 이데올로기 갈등으로부터 크게 실망하게 된다. 그러나 귀국 후, 미술교육이 이러한 사회적 갈등으로 상처받은 인간의 마음을 치유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교육과 화업에 더욱 전념하게 된다. 이때의 그림들은 원초적이고 분석적이며 근본적인 형태로 환원하려는 조형 원리의 기본 단위에 몰입하던 추상의 첫 번째 단계이다.
1980~90년대 작업을 살펴보면 조영동은 이전 작업에서 과감히 탈피하여 표현적인 요소를 제거하며 캔버스를 무수히 파내고, 긁어낸 나이프의 제스처의 흔적들로 가득 채우며 본질을 추구하는 개념 추상 세계 <공-상 空-想> 시리즈에 천착했다. 가필(철점凸點)과 감필(요점凹點) 9) 의 긁어내는 기법으로 손이 내젓는 대로 많이 가중할수록 필치만이 남아 바탕색의 대비에 따라 위 색의 지각변화가 무한하게 달라지는 덜어내고 지우고 깎아 내면 되 고이는 관념적인 공간을 표출하였다. 10)
1990년대부터 말년까지는 둘째 딸을 잃고 난 슬픔과 절망, 인간의 한계 등을 극복하고자 종교적 신앙에 더욱 귀의하며 예술이 고통받는 삶을 치유할 수 있는 일종의 추상 표현주의적 종교화 <토양·생성>, <토양·인성> 시리즈에 몰입했다. 회갑이 지나서도 대담하게 회화의 행위와 과정을 중시한 표현주의적 양식으로 전환은 그가 평생 갈구해온 내면으로의 본질을 찾아 떠나는 여정의 결과물로 나타났다. 무의식적이며 격렬한 행위의 흔적과 물성이 강하게 느껴지는 재료의 사용에서 볼 수 있듯이 순수 예술적 감성의 표출은 기존 관념적 질서의 공간에서 노닐다 오히려 혼돈의 장, 공백으로 유영하는 듯 보인다. 화폭은 역동성과 즉흥적인 행위에서 나오는 서체의 필법과도 같은 추상 이미지가 하나의 장(場)을 구성하며 이전의 관념적인 틀에서 완전히 벗어난 자율성을 획득하게 된다.
나가면서
이번 전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조영동 작가의 평생 과업은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구조의 본질을 찾는 과정으로 가장 밑바닥에 있는 본래의 것, 근원이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 순수조형에서의 본질을 탐구하는 것이었다. 공간(Space)지의 글을 통해 조영동은 ‘어느 작가나 그 나름대로 지속되는 생각과 표현되어 나가는 경향의 줄거리가 평생을 통하여 이어지고, 여러 차례 다른 조건에 의하여 변모된다고 해도 전체로 보면 흐르는 물줄기 같은 맥이 있게 마련이다’라고 의식의 흐름을 강조했다. 조영동은 이처럼 그만의 모양을 찾기 위해 본인 심성의 가장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바른 심경(心莖) 11) , 즉 회사후소(繪事後素)를 갈구하며 그림을 그려 나가는 평생의 작업으로부터 이 줄기를 되찾아 확인하는 길 12) 이라고 했다. 이처럼 조영동의 작품 세계는 외부의 요인에 따라 변화하기보다는 부단히도 자기 내면을 파고들며 성찰한 결실로 나타났다.
충북지역 작가로서 누구보다 시대의 명리에 영합하지 않고 순수 예술 행위와 고귀한 정신으로 인간 생명의 근원과 본질에 다가가고자 끊임없이 노력했던 조영동의 예술 업적은 이제라도 재평가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또한 쉼 없는 창작에 대한 열의와 노력은 후학들에게 좋은 귀감이 될 뿐만 아니라 충북 화단을 구성하는데 큰 자양분이 될 것이다.
ㅡㅡㅡㅡㅡㅡ
1) 유족(대표 조윤신)은 2023년에 조영동 작가의 뜻에 따라 유작을 조영동 작가가 교수로 재직했던 성신여대에 200여 점이 넘는 작품을 기증하였고, 또 190여 점에 달하는 종교화 시리즈는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에 기증하여 2024년 3월 기증작품 전시회 <에체 호모>(‘24.3.23~7.28)가 개최되었다.
2) 조윤신(성신여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독일로 유학, 이후 스페인 남편을 만나 현재 스페인에 거주하고 있으며 아버지의 작품을 알리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
3) 딸 조윤신 블로그 인용 https://blog.naver.com/newspainpato
4) 유가족(조윤신)과의 대화(‘24.3.23.) ’헌혈을 하고 나올 때 머리가 핑 도는 순간 눈을 감고 한동안 앉아서 손에 쥐어진 돈으로 물감을 사서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생각하면 희열이 느껴지곤 했다‘고 한다. 또한 아버지는 고모(여동생)들에게도 항상 공부해야 한다고 할 정도로 배움에 대한 열정과 여성의 사회 진출에 대해 세계관이 남달랐다고 한다.
5) 1960년대 조영동은 대전지역에서 교사로 재직하며 많은 예술 활동을 했기에 대전 미술사에서도 중요한 작가이다. 특히 대흥동성당에서 수요문화모임으로(오기선 신부와 더불어 이남규, 이지휘, 이종수, 최종태, 남용록 등) 예술에 대한 열정과 사랑을 신문이나 주보지에 기고하며 활동 영역을 넓혀 나갔다고 한다. 출처, 대전시립미술관, ≪대전미술 아카이브≫, 1960년대 대전미술의 활동들 ‘수요동인회’ 송미경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사 글 인용
6) 도판 이미지
7) 조영동은 2015년 한국교회 성미술 발전에 공로한 기여로 제19회 가톨릭미술상 특별상을 수상했다. 한국가톨릭미술가협회 부회장을 오래 역임하면서 서울주교좌 명동대성당 ‘김범우 초상’, 연풍성지 황석두 루카 성인화, 충북 제천 배론성지의 ‘돌아온 탕아’ 및 2015년에는 절두산에서 돌아가신 순교자 김진구 안드레아 초상 등 많은 성화를 제작했다.
8) 사진 1(장욱진과의 사진). 조영동과 스승 장욱진의 관계는 부모와 자식 이상으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아버지 조영동은 항상 스승의 댁에 찾아가서 많은 대화를 통해 스승의 도인 같은 화가의 정신적 세계를 만나 자신의 삶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말씀을 자주 하시곤 했다고 조윤신은 밝혔다. https://blog.naver.com/newspainpato
9)<조영동 작 空-想>, ≪공간 Space≫, 1986, 8. 229호, p. 79.
10) 조영동은 이때 나온 작업 과정을 거치른 대지를 상대로 묵묵히 땅을 갈고 있는 농부의 호미질에 비유하곤 했다.
11) 여기서 조영동은 심경의 한자를 적지 않아 적확한 뜻을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필자는 작가가 마음속에 있는 근본, 심오한 길 또는 줄기의 느낌을 표현할 것이라 짐작하여 줄기 경자로 표현했다. 글을 읽는 이의 뜻에 따라 다르게 해석해도 좋을듯하다.
12) <조영동 작 空-想>, ≪공간 Space≫, 1986, 8. 229호, p. 78.
FAMILY SITE
copyright © 2012 KIM DALJIN ART RESEARCH AND CONSULTING. All Rights reserved
이 페이지는 서울아트가이드에서 제공됩니다. This page provided by Seoul Art Guide.
다음 브라우져 에서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This page optimized for these browsers. over IE 8, Chrome, FireFox,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