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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석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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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석 마산전
2004. 4. 28 - 5. 4
마산 대우백화점갤러리 Tel. 055)240-6827



흔적, 일상으로의 회귀
:이경석의 후기 "痕迹" 시대


75년에 처음으로 가졌던 개인전의 작품명제가 '인간흔적'이었던 것을 고려할 때, 이번 개인전의 '흔적'까지를 포함한다면, 그의 '흔적'은 개인전 연륜으로 처서 29년을 헤아린다. 여기에다 그의 수학시절과 초기 탐색시대(63~74)를 가산하면, '흔적'의 참 나이는 그의 화업의 전 생애와 맞먹는 것으로 된다.

작가는 이번 이순(耳順)을 기념하는 개인전을 가지면서, 그간의 개인사(史)를 회고하는 짤막한 글을 썼다.
이 글에서 그는 "나는 지금도 '흔적'이라는 주제로 작업을 하고 있다. 돌이켜 보면 내 어린 날부터 보아온 죽음들과 삶의 과정들 그 자체가 내 안에 쌓여지고 그려진 '흔적'인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의 '흔적'의 전 생애는 사실상 그의 삶의 전 과정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고, 그의 삶의 시기마다 다소의 변모를 거듭하면서 오늘에 이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서도 그는 이렇게 회고한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시작된 '흔적' 작업의 10년은 인간의 죽음과 존재에 대한 물음을 인체의 형상들을 통해 '보이는 흔적'을 형상화한 작업이었다면, 그 후의 10여 년은 인간의 내적ㆍ정신적 흔적들을 내 나름의 해석을 통해 흔적화하는 작업이었고, 다음의 10년은 인간과 인간이 만들어낸 미적 흔적, 그리고 역사적 흔적들을 하나로 표현해 보았으며, 그 후로부터 오늘에 이르는 작업은 자연과 인간, 살아가는 일을 관조하면서 마음으로 읽고, '바라보는 흔적'으로 표현하려 노력하고 있다."




그의 생애와 작품에 대한 시선은 '흔적'과 관련해서 전개되어 온, 많지 않은 선례의 하나라 할 수 있다. 8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그에 관한 글을 써온 필자로서, 이번 개인전에 즈음하여 주목하고자 하는 부분은 특히 위 글의 마지막에 언급한 "자연과 인간, 살아가는 일과 관조하는 일을 마음으로 읽고 '바라보는 흔적'으로 표현하고자 한다"는 대목이다. 이 언급은, 그의 개인전 시기로 보아, 97년이후 현재에 이르는, 그의 「후기 시대」의 진의를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이 시기의 강조점으로 '바라보는 흔적'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이는 지난 날 추구했던 '보이는 흔적'과 차별화 하려는 데 뜻이 있다. 그는 바라보는 흔적의 예로서 자연과 인간, 그리고 살아가는 일과 관조하는 일을 마음으로 읽고 보는 것을 제시한다. 그는 다시 이렇게 언급한다. "바람이 나무들 사이로 이야기를 하며 다니는 이른 아침에 산을 오른다. 삼십여분 을 바람소리와 함께 오르면 말없이 늘 그 자리에서 반겨주는, 구부러져 마주하고 있는 소나무들, … 바람에 날리는 잎새들 모두가 내 모습처럼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하고는 스치는 생각을 바람에 실어 보낸다."

'바라보는 흔적'이라는 언급은 그가 과거에 지녔던 수동적인 흔적개념을 버리고 이 세계를 능동적으로 보기 위한 적극적 개념으로서의 흔적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과거에 탐색했던 흔적들은 모두가 자신의 기억 속에 각인된, 실존으로서의 고뇌에 찬 것들이었다. 아주 어렸던 시절 6. 25전쟁 당시, 부서진 탱크를 초등학교 주변에서 목격했던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아버지와 할머니, 동생과 형을 차례로 여의었던 아픔들, 대학시절 한일 회담 반대 데모로 한달 간의 교도소 생활과 군으로의 강제징발이, 그가 스스로 '시간으로부터의 흔적'이라고 언급할 만큼, 마음 속에 지금도 강열하게 남아있다. 그가 75년 이후, 80년대의 개인전을 통해서 본격 탐색했던 해체된 비극적 인간의 형상들은 그의 의식 속에 잔존해 있는 시간의 흔적들을 인출하고 형상화한 것이었다면, 이어서 90년대에 모색했던 우리의 전통 건축문화의 맥락과 망자를 위한 제례의식의 표정들은 모두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흔적의 제 품목들에서 인출해냈던 것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 그가 이순의 나이에 이르러 생각하게 된 것은, 일체가 시간 속에서 명멸하면서 흔적으로 잔존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흔적들을 이해하는 것은 수동적인 인출(Pulling-out)에 의한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현재와 미래를 향한 '투사'와 '앞먹임(feed-fore)'을 통해서라는 것이다. '바람에 날리는 잎새들 모두가 내 모습처럼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이며, 이러한 생각을 바람에 실어 보낸다'는 언급이 바로 이 경우라 할 수 있다.
흔적의 적극적인 면으로 눈을 돌리게 된 것은 기억 속에 잔존하고 있는 과거의 것들에 주목하는 일을 중지하고, 일상의 현실에 주목하므로서였다. '만상이 모두 내 모습처럼 보인다'는 말은 바로 일상의 세계에 주목하는 것이며, 일상의 것들을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것(retention)'의 흔적이자 기호로서 읽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의 「후기 시대」는, 이처럼, 흔적을 새롭게 다루고자 하는 데서 마련되었다. 그의 후기 시대의 흔적관은, 전기 시대처럼, 기억 속의 사물들을 그림에다 반추해내기보다는 무엇인가를 적극적으로 자신의 캔버스에다 현전시키는 '대리자(subsitute)'로서의 흔적을 강조한다. 예컨대, 뱀이 기어간 흔적이 뱀이라는 무엇을 시사하듯이 흔적은 적극적으로 사물을 현재의 시간 속에 현전시킬 수 있고, 따라서 우리는 일체의 사물들을 시간과 흔적에 의해 인식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발상의 변화는 기억에 주목했던 훗설의 입장을 데리다가 비판했던 것을 상기시킨다. 훗설이 기억을 단순히 우리가 사물들의 정보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했던데 반해, 데리다는 기억속에 보유된 사물의 흔적이 세계를 현전시킬뿐만 아니라, 흔적을 통해서 앞질러 사물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pro-tention) 주장한다. 데리다의 이러한 생각을 근자의 이경석이 공유하면서, 특히 자신의 흔적을 통해서 세계를 보고자 한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에게 있어 만상이 내 모습처럼 보이게 되는 것은 흔적의 적극적 기능을 간파한데서 연유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후기 시대의 이경석은, 따라서, 흔적을 세계이해의 근본개념으로 용인하고 새로운 시작이자 자신이 딛고 설 회화론의 중심개념으로 정립하고자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이전에 확립했던 회화양식을 버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재검토하고 재확인하고자 함 또한 잊지 않는다.
그의 근작들은 종래의 드리핑에 의한 착색과정과 삼각, 사각, 원, 격자, 빨강, 녹색, 흰색의 띠에 의한 이차원 패턴을 견지하면서도, 격자형식보다는 방사형 구조를 보다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전향하고 있다. 내부에는 응축되고 포만된 패턴의 분자 배열을 빌려 핵과 주변, 그리고 외곽의 순으로 구조화하는 한편, 그 바깥을 무색의 회색조가 채우고 있는 것 모두가 상징적이고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이 표정들은 일체의 흔적들이 적극적으로 구성해낸 일상 세계의 구조도라 할 수 있다.

그의 근작들은, 현재에 관한 한, 양식적인 측면보다는 정신적인 면에서 새로운 변화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믿어진다. 기억심상을 형상화하는 과정으로 읽혀지던 그림들이 이제는 적극적 형성활동의 대리자로서의 흔적에 의해, 이를테면, 일상의 사물들을 그것들의 근원에서부터 붙잡아 내려는(archi-peindre) 구조적 맵시로 읽혀진다. 이러한 전향은 마치 전기 시대의 비트켄슈타인이 언어의 추상구조에서 떠나 일상언어의 세계로 시선을 돌렸던 것과 진배없다. 이 점에서도 또한 이경석의 작품세계가, 향후, 보다 다양한 변모를 기도할 것으로 믿어진다. 이번 개인전은 그러한 전망을 예고하는 정신적 징후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김복영│홍익대 교수, 미술평론가








이번 전시회는 회갑을 기념하여 화집『흔적』(239쪽)과 글 모음집 「바람소리 그리고 흔적」출판기념회를 4월 14일 오후 5시 30분, 전시장에서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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