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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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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부터 이끌어온 자연과 신화적 요소를 바탕으로 하여 최근의 연작으로 새로운 변모를 시도
자연과 신화, 시간의 연기를 위한 제례

임효의 근작 『생성과 상생』



임효가 83년 첫 개인전부터 지금까지 탐색해온 회화의 화두는 자연이었다. 83년과 86년 모색시절 화제로 삼았던 설악산ㆍ지리산ㆍ치악산을 비롯해서 설악산벽ㆍ용바위벽ㆍ홍도의 벽과 같은 산과 암벽은 그가 즐겨 그렸던 자연의 품목들이었다.
그러나 90년 3회 개인전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성녀ㆍ신목ㆍ한밝산ㆍ개천대도와 같은 요소들은, 자연의 연장선상에서, 그가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도입한 신화의 요소로서, 그 후 「전설」, 「고뇌해탈」, 「그림 굿」으로 이어지는 동기가 되었고, 이어서 태양ㆍ달ㆍ새ㆍ인간ㆍ꽃ㆍ탑ㆍ정자ㆍ소나무로 화제가 확장되고 오늘에 이른 것으로 볼 수 있다.

줄잡아 90년 제 3회전부터 2001년 제 11회전에 이르는 신화의 요소들은 「부(符)-자연에서, 1992」, 「무위자연-1994」, 「무위자연-유희, 1995」, 「무위자연-무심」, 「무위자연, 1996」, 「어머니의 품, 1999」, 「해는 저서, 1999」, 「산하, 2001」, 「관폭도, 2001」를 통해, 요약된 필법체나 날카로운 부조의 선, 아니면 투박하고 굵은 인태글리오의 묵선, 나아가서는 선념과 발묵과 무거운 침묵이 각인된 선들을 대동하고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고유의 문화의식을 고무시킨 바 있다.




신화의 요소들은 그가 90년대 초반이래 개안하고 발전시켜 온, 이를테면, 자연의 내심(內心)이라 할 수 있다. 그것들은 보이는 외관으로서의 자연을 거두고 작가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은유해 내고자 했던 기표의 품목들이라 할 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 신화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기존의 전설적이고 역사적인 맥락의 것들이 아니라, 그 스스로가 만들어 낸 ‘자연 상태’ 또는 ‘동심의 세계’를 뜻한다. 다시 말해서, 그의 신화는 자연을 모태로 생성해낼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럽고 순연(純然)한 세계의 사물들이다.



자연은 저의 신화적 모태입니다. 자연이 가르쳐준 진리의 깨달음은 순화이고 순응의 철학이며 생의 철학입니다.

신화는 인간사의 단도적ㆍ직시적ㆍ암시적, 그리고 시위적 미감을 압도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린 동심의 세계를 자연의 세계로 받아들이고, …자연에 반하고, 어린이의 순박함에 반하고, 사람의 진실에 반하며, 이것을 그림에 융합시킬 수 없을까 생각합니다.




- 작업노트




작가에게서 신화는, 따라서, 자연과 별종의 것이 아니라 자연의 본질적인 모습이자, 또다른 이름이다. 나아가, 그는 자연과 신화의 본질을 생성윤회라고 생각한다. 그가 생각하는 생성윤회의 세계는 시간과 역사의 순환을 근거로 한다. 일체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생성되고 변화를 거듭하므로써, 자연으로서의 외관과 자질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그가 지금까지 끊임없이 작품의 변화를 추구해 온 것도 이처럼 생성윤회가 추진되는 시간과 역사의 순환을 화론의 근간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그의 십수회에 걸친 개인전을 일별할 때, 변화가 충일하되, 같은 것을 반복해서 그리거나 보여 주지 않았던 것이 이를 잘 말해 준다.








그가 생성윤회를 작업으로 실천하는 데에는 우리 고유의 문화유산의 요소들이 크게 작용하였다. 수묵이라고 하는 재료는 물론, 강한 선과 천연 채색의 현란하고 강열한 빛깔을 도입했다든가, 부적과 같은 민속신앙과 토속적 샤먼 등 다양한 굿거리를 찾아 나섰던 것이 바로 그러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의 작품세계를 생성윤회의 맥락으로 엮어내게 한 것은 흙과 한지의 초자연적인 힘이었다. 이 두 가지는 그가 자연과 신화를 일구어 낼 수 있는 실로 커다란 촉매였다. 그 가운데서도 한지는 자연과 신화의 본질 그 자체에 진배없었다.



한지는 수묵과의 만남을 용이하게 하므로써 마음을 끌었고, 이에 의해, 다양한 표현은 물론, 에디션작업이나 도자기, 더 나아가서는 석고판에 의한 한지의 부조 이미지에다 수묵채색으로 드로잉하므로써 판화와 회화를 종합하는 전환점을 마련하여습니다.




- 작업노트




근작 「생성과 상생」의 배경은 이렇게 해서 가능했고 그의 작업사에 있어서 또하나의 변신을 기도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변신에는 작년과 재작년에 걸쳐 인도 여행에서 체험한 '시간'의 개념이 큰 역할을 하였다. 그는 인도의 허물어져가는 옛 성벽에서 시간의 무상함과 거기서 저며오는 에너지를 새삼 느낄 수 있었고, 이어서 년전 포천의 인민당사의 잔해에서 목격했던 포탄의 흔적과 묵은 세월의 이미지를 치례로 되새김할 수 있었다.

거기서 그가 경험했던 시간개념은, 이를테면, 토템이라든가 선사시대 암각화에서 느낄 수 있는 생성의 에너지와 서로가 서로에게 삶의 힘을 부여하는 상생의 가능성이었다. 시간을 통해서, 생성은 물론, 상생의 가능성을 엿본 것은 그의 작업이 단순한 손작업이 아니라, 회화의 윤리적 이해를 염두에 둔 포괄적인 작업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생성과 상생」은 이렇게 해서 이루어졌다. 이 작품들은 시간을 작품 속에 적극적으로 불러들이고, 시간의 흔적들로서 사람산ㆍ사각ㆍ묵필ㆍ적색을 차례로 부각시키려는 시도를 보여 준다. 시간을 작품으로 불러들이는 데에는 그가 일찍이 창안한 '우림수묵'과 '드림수묵'이 두드러진 역할을 하였다. 전자가, 우리의 전통적인 발효음식의 생성과정을 수묵으로 재연하는 절차의 하나로, 수묵을 한지에 그려 물속에서 발효하는 숙성과정을 밟는 것이라면, 후자는 여기에다 우리의 전통한복의 천연염색과정을 재연하는 절차로, 수묵으로 물먹은 한지를 물들이는 선염의 절차라고 할 수 있다.

이 절차들에 의해, 그는 닥나무를 직접 원료로 우림수묵을 한 한지 판위에, 드림한 한지를 중첩시켜 발효의 과정을 밟는 한편, 물을 조절해서 화면의 그라운드를 만든 후, 재차 선과 이미지 요소들을 드로잉하거나 도침으로 질감을 설정하는 마무리작업을 하였다. 마무리작업은 마치 우리가 조상에게 바치는 제례의식처럼 선을 긋고 설채하는 등, 혼신의 힘과 정성으로 치루어졌다. 뿐만아니라, 그가 마무리작업 후에 후속작업으로 실시한 들기름과 콩댐에 의한 도장작업은 장판지와 같은 한국의 온돌문화의 선례를 반복한 것이며, 옻칠역시 염색된 한지의 탈색을 방지하고 색감의 발효성을 높이 하고자 하는 우리의 옻칠문화의 선례를 도입한 것이다. 그는 이렇게 하므로써, 그의 작업이 우리의 선례 의식(儀式)을 현재로 순환시켜 과거의 시간을 현재로 연기시키고자 하였다.

그의 근작들은, 요컨대, 상생의 윤리를 실현하려는 시간의 연기(延期)작업임에 틀림없다.



나의 작품세계는 궁극적으로 생성과 상생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신화가 만들어진 것은 인류사를 생성하기 위해 쓰여진 상생의 이야기듯이, 서로를, 못쓰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잘 살게 하며 이를 생각하고 교훈으로 삼아서 좀더 나은 세계, 신의 세계로 들어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작업노트







그의 상생을 위한 연기시도는 우리 선례문화의 유산들이 안고 있는 허다한 인연(因緣)의 고리들을 함축하고 있다.

여기서, 근작들의 표정은 과거 우리가 생존을 위해 격돌하고 갈등했던 온갖 비극적 이야기의 파편들이 화면의 지층에 숨어 그 일부만이 표면을 뚫고 모습을 드러내는 듯한 자태를 보여 준다. 마치 풍상을 안고 버티고 서 있는 토벽의 표정같이, 많은 부분들이 닦이고 씻겨 나가 일부만이 남았으나, 남은 일부가 전부를 증언하고 포효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 준다. 그는 그의 필선과 이미지와 기호들로 하여금 화면의 저 깊은 곳에서 발효되고 거기서 우러나올 뿐만 아니라, 거꾸로 그러한 표면의 깊이 속으로 물들여지는 이중작업을 시도하므로써 이러한 결과를 창출해 내고 있다.

그의 필선들과 화면의 전체는, 그럼으로써, 시간의 연기를 위한 시도의 일단면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그가 종래 그가 추적해온 자연과 신화, 나아가서는 생성과 상생의 윤리를 새롭게 정착시키려는 의지를 시간의 연기를 통해서 현전시키고자 함을 반증하는 것이다.



김복영│미술평론가, 홍익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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