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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순환적 질서와 구조를 상징하는 조형언어로 생명과 명상의 시적 공간을 창조하는 대형 신작 20여점
빛을 담는 그릇 - 박충흠의 작품세계 이번에 발표되는 박충흠의 작품들은 일정한 크기와 형태로 잘라낸 동판을 산소용접으로 이어 붙여서 만든 금속작업들이다. 작은 네모꼴, 세모꼴의 동판 조각들 수백 수천 개가 모여서 거대한 그릇 모양이 되기도 하고 완만한 곡면을 담고 있는 부조 모양이 되기도 한다. 우선 그것이 집요한 반복노동을 요하는 작업이라는 점이 눈을 끈다. 바깥세상의 리듬으로부터 벗어나 수공업적 노동에 열중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거의 종교적인 구도자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용접작업을 해본 사람만이 아는 매혹 속에 그는 모든 것을 잊고 몰입한다. 적절하게 조절된 용접기 불꽃에 의해 단단한 쇠붙이가 발갛게 달아오르고 녹아 붙는 과정과 그것이 다시 차갑게 식은 뒤에 접착부분에 남겨지는 작업의 생생한 흔적들은 사람을 무아지경으로 이끄는 매력이 있다. 그것은 점토를 한 점 한 점 붙여서 형태를 이루는 소조의 매력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지만, 주조라는 중간단계를 거치지 않고 매순간마다 곧바로 완결에 이르는 점에서 더 직접적이다.
그의 이번 작업들이 이전의 동판 용접작업과 비교할 때 두드러진 차이는 형태가 바닥에서 솟아오르는 것이 아니라 바닥과 분리된 독립적인 것으로 변한 점과, 견고한 표면에 의해 닫혀진 조각이 아니라 내부와 외부가 서로 통하는 일종의 그물구조를 갖게 된 점이다. 그것은 대지로부터 어떤 생명의 에너지가 꿈틀거리며 형태를 만들어낸다고 설정하는 이른바 ‘생명’의 미학으로부터의 탈피를 보여주고 있다. 그릇이나 비행접시 같이 단순한 이 작품의 형태들은 ‘생명’과 같은 추상적인 대상을 표현하려는 것과는 다른 태도에 의해 채택되고 있다. 그것은 정해진 재료의 물리적 조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조건이 허용하는 최소한의 형태를 취하려는 태도이다. 따라서 그것이 그릇인지 비행접시인지는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작품의 ‘의미’는 그것이 표현하고 상징하려는 대상 자체로부터, 어떤 재료를 가지고 작업하는 행위와 그 결과로서의 물체 자체로 옮겨간다.
용접부위를 완전히 메우지 않고 부분적으로 열어둠으로써 조각의 속이 들여다보이도록 한 것 또한 그가 고전적인 조각의 전통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말해준다. 형태의 안과 밖이 단절된 채 가시적인 표면이 그 안의 비가시적인 내부에 뭔가가 들어있음을 암시하고 형용하는 조각에서, 작품의 텅 비어있는 내부를 있는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즉물적인 물체의 조각으로의 전환이 시도되고 있다. 조각을 감싸고 있던 재현과 상징, 일루전의 신화를 벗겨내고 물질로서의 조건에 온전히 작품의 근거를 두고자 하는 것이다.
용접되는 동판 사이사이에 남겨진 틈새들은 작품이 보여주는 볼륨과 매스가 실은 얇은 껍질이며 그 안에는 텅 빈 공간만이 들어있을 뿐임을 스스로 드러낸다. 그런데 이로 인해서 그 틈새로 스며드는 빛이 작품의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게 된다. 잘게 부서지는 빛이 작품 속으로 들어서면서, 이들 작업은 외부의 개입에 완강하게 맞서는 육중한 덩어리였던 예전의 작업과는 전혀 다른 존재감을 갖게 된다. 작품을 조명하기 위한 부차적이고 외부적인 요소였던 빛은 여기서 작품의 중심적 요소로 부상한다. 바꿔 말하자면 여기서 작품은 비어있는 내부에 빛을 받아들이고 담아놓기 위한 그릇이 되고 있다. 그리고 그가 작업실 책상머리에 수집해 붙여놓은 마른 들풀과 같은 가벼움 또한 받아들인다.
그가 보여주고 있는 조각작업은 논리적인 분석과 추론의 결과라기보다는 도를 닦듯이 마음을 비우는 반복적인 작업과정 속에서 서서히 이루어진 것이다.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로 급속히 변화하는 오늘날의 미술의 흐름에 비추어보면 그 변화의 속도는 아주 느리지만 그만큼 더욱 값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안규철│조각가
환기미술관에서는 김환기 사후 30주기전을 맞아 생전 작가의 후진양성에 애정을 기울였던 뜻을 기려 제17회 김세중 조각상 수상자로 선정된 박충흠(58) 작가의 초대전을 기획하였다. 동양적 자연주의와 직관의 세계를 느낄 수 있는 봉우리 모양의 유기적 형태의 조형 작품으로 잘 알려진 박충흠 작가는 서울대학교 조소과와 파리 국립미술학교에서 수학, 이화여자대학교 조소과 교수를 역임하였으며 국립현대미술관과 올림픽 조각공원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는 중견작가이다.
이번 전시는 구리조각을 용접하고 다듬어 형태를 구현하는 방법으로 자연의 순환적인 질서와 구조를 상징하는 대형신작들을 선보입니다. 묵묵히 재료를 다듬고 용접하는 긴 시간과 더불어 조금씩 형태를 갖추게 되는 작품의 과정적 특성은 생명체가 발아하여 생명을 갖고 성장하는 그 모습을 연상시킨다.
이러한 치열하면서도 더딘 긴 과정을 통해 완성된 작품은 전체로서 의미를 가지며 살아 숨쉬는 듯한 특유의 충만된 생명감을 지니게 됩니다. 긴 시간의 흔적과 작가의 매만짐이 어우러진 작품의 다채로운 질감과 표면에 드로잉을 하듯 바늘땀처럼 보이는 빈 공간의 조화로움 또한 작품의 깊이를 느낄 수 있게 하는 매력이다.
이번 대형 신작은 배(杯)형, 반원형과 삼각 구조물 형태를 띠고 있으며, 관람자는 작품의 자유로운 배치 구성과 빛의 각도에 따라 창조된 시적이고 명상적인 조형 공간을 경험할 수 있는 자리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