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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살무늬에 대한 추억 8인의 선과 드로잉
박물관에서 빗살무늬토기를 보았다. 나는 늘 그 사선으로 내려 그은 반듯한 선들의 자취를 , 그 무늬를 의아하게 생각했다. 빗살무늬토기는 온전하지 못하다. 깨지고 흩어진 파편들을 얼추 주워 모아 본래의 모습을 안타깝게 추억하며 ‘아말감’ 한 흔적으로 처절하다. 아마도 그것이 역사일 것이다. 흙을 빚고 그 무른 표면에 정성껏 선을 새긴 이는 자신의 흔적을 비로소 영구히 각인한 이다. 그의 시간, 몸놀림이 기억되었다. 그 손길, 손의 떨림, 노동이 순연하게 흙의 살과 함께 저장되었다. 선을 그은 그 손은 다 썩어 이 세상 어디에도 없지만 그가 남긴 선은 수 천년의 시간을 이겨 내 눈앞에서 환생하고 있다. 나는 그 손의 온기와 진동, 체취를 안타깝게 찾는다. 토기의 피부 위에 새긴 선은 햇살, 심장의 박동, 알 수 없는 주술적 의미 등으로 기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 토기의 선들은 상상과 몽상을 유혹하고 하나의 선에 대해 마냥 숙고하게 한다.
흙의 말랑한 질감과 부드러운 저항을 밀치고 음각으로 새겨진 선의 여정이 모여 리듬을 만들고 균형과 장식을 보여준다. 몸의 규칙적인 놀림이 고스란히 육화된 이 선들은 어떤 소리를 낸다. 그 음은 사라졌지만, 들을 수 없지만 해독을 기다리는 암호처럼 침묵 속에 드리워져 있기도 하다. 누가 그것을 처음 시작했을까? 선은 반복되고 하단으로 내려갈수록 가파르게 줄다가 그친다. 단순한 선 하나가 그릇 하나를 또 다른 존재로 변화시켰다. 이제 그것은 단순한 그릇이기를 그치고 한 사람의 모든 것을 온전히 간직한 살로 다가온다. 그릇의 피부에 누군가가 여전히 심장소리를 내면서 살고 있다. 선의 생애와 존재의미를 새삼 생각해본다.
박현정, 백지희, 백진숙, 서현진, 윤향란, 이기영, 이성아, 이정아 이 8인은 납작한 화면에 자신들의 몸에서 솟아 오른 선을 보여준다. 나로서는 이들의 그림에서 한결같이 그 선의 미묘한 매력을 만난다. 이들의 선은 저마다 조금씩 다르고 다른 만큼 개별적인 세계를 증거한다. 이들의 선은 단순한 드로잉이나 그림을 묘사하는 데 종속되지 않는다.
어쩌면 그 둘 사이 어딘가에서 부유한다. 아니 선의 또 다른 생애를 꿈꾼다. 이들의 몸에서 식물처럼 자라 나온 선의 감각적인 배열을 만나는 일은 자신만의 감수성과 회화에 대한 이해, 재료에 대한 신체의 놀림, 공간에 대한 해석, 그리고 자기 몸의 신경과 반응, 육체적 경로에서 받아들이고 통과시킨 시간의 자국이 자아내는 체취를 맡는 일이다. 여전히 그림이 하나의 그림으로 자존하는 핵심에 위치한, 깊숙하게 눌려지고 그어진 선, 그렇게 한 작가의 모든 것을 응축하고 전적으로 대신하는 선을 만나는 것이다.
박영택│미술평론가, 경기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