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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드, 그 세속의 살(肉)에 각인된 사유의 자취
―한국화가 김남희의 작업세계1. 화음, 그리고 생명
인간의 삶과 시간 자체가 미망의 그림자일진대 누가 그 시간의 벽을 깰 수 있을까, 그러나 김남희는 물감으로 그러한 화두에 대면하고 있다. 대자연의 온갖 법문이 그러하듯, '지금, 여기'의 시-공간이 품고 있는 우주적 섭리를 투명하게 응시하는 일은 바로 무상한 시-공간의 그물망을 넘어서는 첩경이다. 직관하고 응시함으로써만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의 섭리를 체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가장 세속적인 인간 육신의 이미지를 종교적 도상과 상충시킴으로써 의외의 시점에서 시간의 벽을 깨고 있을 뿐 아니라 영원한 니르바나의 세계를 암시한다. 즉 미망의 차안 속에 품고 있는 화음의 세계를 일깨우고, 한 티끌 속에 시방세계 우주가 다 들어와 있음을 설파한다.
그동안의 작업방향과 개인전 토픽을 돌아보면, <누드를 소우주로 보았다>, <천상>, <불공심>, <만다라>, <아뇩다라 샴막 삼보리>, <윤회>, <평상심> 등으로, 대학 졸업 후 15년 이상을 줄곧 불교의 세계관으로 사유해왔음을 엿볼 수 있다. 그만큼 이 작가는 미술계에서 '누드와 불교 이미지' 작가로 알려져 있다. 이번 전시 작품들도 일관된 사유의 자취를 보여준다.
이 작가에게 있어 모든 작품의 모티브는 하나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바로 불교 세계관으로 직관하는 화음이고, 곧 생명이다. 아무런 옷도 걸치지 않은 누드는 모든 인간의 자화상이면서 또한 깨달음 자체, 즉 불성(佛性)을 현시하고 있는 부처와 보살의 도상(Imago)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그의 그림에 등장했던 불교적인 이미지들을 일별하면, 연꽃이나 망고 열매, 진리의 꽃비(花,雨), 코끼리, 염주, 부처나 보살상뿐 아니라, 불화에서 볼 수 있는 경변상탱화(經變相幀畵)의 이미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러한 이미지들은 작가가 희구해온 진리와 열락(悅樂)의 세계에 대한 암시로 읽혀진다. 특히 이 번 전시 작업에 빈번히 등장하는 부처의 눈(法眼)은 작가 자신을 비롯하여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응시와 관조, 투영의 암호이기도 하다.
이렇듯 다분히 관능적이지만 사유의 자취를 암시하며 다양한 포즈로 등장하는 여인 누드들은 불교 도상들과 상충, 습합되면서 또다른 의미층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화면 내의 의미연관은 비단 이미지 운용에 한정된 것만은 아니다. 작가는 다양한 형식 변용과 공간 운용을 통해 자신이 삶과 예술과 종교의 관계성 속에서 터득해 온 일관된 예술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바로 다양한 조형형식은 늘상 하나의 모티브, 즉 생명에 대한 외경심과 무분별(無分別)의 우주적 화음에 대한 희구심으로 수렴되면서 세속적인 육신의 살과 차안의 무상한 시간의 벽을 깨고 있다. 불교에서는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깨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깨야 깨달음에 이른다는 암시를 한다. 이번 작업에는 그동안의 이미지 배경을 털어내고 누드와 선긋기만으로 사유의 자취를 투사하고 있는 작품들도 있어 주목된다.
잘 알려져 있듯이 불가 철학의 핵심인 불이론(不二論)의 일원적 세계관에서는 차안과 피안, 성과 속, 물질과 정신, 찰라와 영겁, 심지어 미망과 깨달음까지도 그 구분을 넘어서는 지점에서 진정한 해탈의 경개를 설파한다. 김남희는 바로 그러한 세계에 대한 사유의 흔적을 나름의 조형언어로 투영해내고 있는 작가이다.
2. 화면의 지층: 물감의 살(肉) 속에 각인된 정신의 살한국화를 전공한 작가로서 김남희는 우리 미술의 전통, 특히 수묵의 깊이와 여백, 채색화의 묘사법 등 뿐 아니라 고구려 고분 벽화나 민화, 그리고 고려 불화 등에 드러나는 이념의 표현방식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보여왔다. 그러한 관심과 연구를 통해 작가는 나름대로의 개성적인 묘사방식과 공간운용을 구현하고 있다.
그는 두터운 한지(삼합지) 위에 일단 먹으로 누드의 윤곽을 드로잉해 올린다. 그리고 채색의 일차적 작업으로 물감을 바탕에 까는데, 이때 다음에 칠할 색을 염두에 두면서 보색관계를 유지하거나 대비되는 색으로 처리한다. 그 위에 또다시 색을 올리고 물기를 조절해가면서 형상을 구체적으로 정리하고, 바탕색을 선이나 면으로 남기면서 윤곽을 위한 긁어내기 방법을 쓰거나 휴지로 닦아내는 등, 상감기법에서와 같은 음각의 효과와 벽화나 단청의 풍화작용에서 느껴지는 것과 같은 효과를 우려낸다.
이러한 방식으로 서로 대비되면서도 튀지 않으면서 바탕과 형상은 화면의 지층을 형성해간다. 그 위에 또다시 큰 붓질로 선을 올림으로써 기존의 형상의 경직성을 풀어내는 효과를 구사하고 있고, 최근의 작업에서는 세필묘사보다 호방하고 거친 붓터치가 보다 강렬하게 노출되고 있다. 그 결과 전통 채색화나 불화의 채색법으로 보면 상당히 도발적이라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정제미보다 파격의 미를 추구하고 있다.
그의 그림들은 동양의 채색화 물감과 먹, 호분 등을 그대로 쓰면서도 나름의 채색 방법으로 독특한 표현방법을 구사함으로써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불교적 이념과 세계관을 적절히 투영해내고 있다. 역시 이념의 필연성이 재료와 표현방법을 규제해왔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남색이나 군청색과 주황색으로 빚어지는 화면의 살(肉)은 바로 정신적인 지층을 반영하면서 이 작가 특유의 개성으로 인지된다.
이제 한 단계 나아가 작가는 선을 긋고 또 그것을 깨는 작업을 시도한다. 푸르고 붉은 주황의 바탕 위에 그어진 파격의 선들은 곡선적인 이미지로 화면 속에 각인된 누드의 실루엣을 보다 강렬하게 받쳐주고 있다. 형상과 형상 없음, 즉 실(實 )과 허(虛)의 밀도에서 볼 때, 형상의 세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작가의 또다른 시도로도 읽혀진다. 이 또한 이념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그동안 불교적인 이미지에 갇혀있던 경직성을 풀어내고자 하는 의도도 내포되어 있는 듯하다. 요컨대 작가는 일관된 모티브를 천착하면서도 양식적인 면에서 나름의 변화를 추구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3. 해체 또는 해탈을 향하여"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명제를 누드로 풀어보고 싶었다. 사람이 평생을 살면서 끊임없이 던지는 이 물음이야말로 누드의 신비로움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고 작가는 말한다.
그래서 그는 누드와 부처를 대면시켜왔다. 일반적으로 전경에는 누드를 후경에는 부처나 부처의 세계를 암시하는 다양한 이미지를 배치하는가 하면, 또 때로는 누워 있는 누드가 곧 관세음보살의 화신이나 진신불로서 와불을 대신하기도 한다. 이처럼 중생과 부처와 보살이 모두 불성으로 현현되는 세계를 응시해왔다.
그러나 작가는 여전히 자신에 대한 실존적 물음 앞에 허허롭기만 하다. 누가 그 답을 쉽게 구할 수 있을까. 화가로써의 한계를 느끼고 한 때 수도자로서의 생활을 결심하기도 했던 그는 지금 지인들로부터 '고명화실'의 '고명주지스님'이라는 별칭을 받을 정도로 여전히 불법의 진리를 깨치기 위해 골똘하고 있다. 그만큼 불교적 명상 수행의 삶 자체가 그의 작업으로 이어진다. 그의 작업실을 방문하여 대접받은 망고나 보리수 잎은 그의 화폭에도 그대로 그려진다.
그러나 이쯤해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깨달음에 대한 집착을 버렸으면 하는 것이다. 누드에 대한 공안 역시 미망의 그림자와 같아서 집착할수록 인간적 허상을 더욱 도금해가는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 그림 속의 상들은 여전히 그림 속의 일루전일 뿐이고, 진정한 상(象), 즉 그 본질은 언제나 상(像) 너머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도상이나 이미지, 즉 의미하는 것과 의미되어지는 것 사이에는 큰 갭이 가로놓여 있다.
직설적인 어법에는 물론 한계가 있지만, 다분히 암시적인 어법에서도 말을 더욱 응축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듯 말을 건네는 화법이야말로 '염화시중의 미소'처럼 불가의 진리 전법에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비단 불교의 종교적인 이념에서 뿐 아니라 그 영향권에 있는 동양의 예술사유에서는 '말보다는 말 너머의 말'(言外之言)에, '형상보다는 형 너머의 상'(像外之像)에 더욱 가치를 두었다.
최근의 그림에서는 작가의 인식 전환과 함께 '의미하지 않는 것'에 대한 비중이 어느 정도 커지고 있는 점을 엿볼 수 있으나, 아직도 너무 조심스럽다. 좀더 과감한 형상의 해체를 통해 오히려 진수에 접근해 가는 계기가 마련되기를 기대한다. 물론 진정한 깨달음의 세계에 이르면 그림 따위를 그리지 않아도 살 수 있겠고, 존재하는 무(無)의 심연을 체득할 수도 있겠지만, 인간이라는 실존적 짐을 지고 있는 한 그것은 요원한 일이기도 하다.
불가에서는 물고기를 보았으면 그물을 놓으라고 한다. 방편에 묶여 자칫 진수에서 멀어지는 것을 경계하는 말이다. 깨달음의 길이 요원하기는 하지만 진정한 평상심으로 돌아와 '지금, 여기'의 마음 한자리 흔적을 응시하는 것으로도, 또 그것을 조형언어로 투사해내는 것으로도 다분히 '종교적인 예술'의 경개라 할 수 있다.
길 위에서 끊임없이 길을 묻고 있는 작가의 구도 여정에 늘 빛이 함께 하기를 기원한다.
장미진│미술평론가, 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