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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훈 조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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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훈의 조각

The Wall Blurs Threshold 안팎을 넘나드는 소통의 벽


현대미술의 지형도가 급격하게 변화하게 된 원인이 여럿 있지만, 그 중에 대표적인 경우로서 탈장르 현상을 들 수 있다. 모더니즘 미술이 각 장르의 내적인 특수성에 천착한 환원주의로 나타났다면, 모더니즘 이후의 미술은 환원주의에 의해 억압된 것들이 복원되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탈장르 현상이 보편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나아가 조각에서 소위 비물질 조각과 경계 위의 조각을 보편화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여러 형태의 개념과 담론들로써 물질이 빠져나간 조각의 빈자리를 메우는 것으로 나타난다. 물질보다는 개념이 표면화하고, 소리와 영상과 빛과 같은 비물질적인 이미지마저 조각에 포섭된 현실에서 돌과 철 그리고 나무를 소재로 한 물질성이 강한 조각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최태훈은 다시 조각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그리고 재료를 자르고, 휘고, 이어 붙이고, 가는 식의 재료와의 직접적인 교감을 통한 물질성의 회복을 그 대답으로 내놓는다. 이는 단순한 물질성의 회복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재료와 몸이 부닥치는 감각성이며, 이러한 감각을 매개로 해서 물질적인 세계와 주체가 만나는 존재성의 복원으로 이어진다. 단순한 이미지나 개념으로는 결코 대신할 수 없는 몸의 습성을 회복하는 것, 표현의 직접성을 회복하는 것에서 조각의 존재 의미를 찾고 있는 것이다.




최태훈의 조각을 관통하는 주제의식은 대략 존재, 우주, 생명, 그리고 근작인 순환에로 이어진다. 먼저, 존재 연작을 보면 마치 외마디 소리를 내뱉듯 절규하는, 뒤틀리고 왜곡된 인체 표현을 통해서 인간 실존의 부조리한 상황을 극화한다. 버려진 나무둥치를 잘라내고, 그 움푹 팬 표면에다가 철물을 부어넣어 굳히는 방식으로 나무와 철을 접합한 것이다. 여기서 버려진 나무는 버려진 인간(하이데거는 인간을 세계에 내던져진 존재에다가 비유한다)을, 그 패인 표면에 뜨거운 철물을 부어 굳히는 행위는 그 원인을 알 수도 치유할 수도 없는 인간의 원초적 상처(트라우마)를 상기시킨다. 그 이면에는 소통 불가능한 세계에 대해 비극적으로 반응한 실존주의의 세계인식이 깔려 있으며, 이는 인간 실존에 공감하는 비장미와 페이소스의 강조로 나타난다.
이어 주제는 존재에 대한 인식에서 우주의 거대담론으로 옮아간다. 원이나 사각형과 같은 기하학적 형상에다가 우주의 상징적 의미를 의탁한 것이다. 이는 그 동안 세계에 대한 인식이 변화된 탓도 있겠지만, 결정적으로는 방법론의 변화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플라즈마 기법이라는 작가 자신만의 독특한 조각 언어를 개발한 것이다. 따라서 전작에서의 구체적인 형상이 사라지고, 대신 재료 자체의 물질성과 함께 소재에 대한 구조적인 접근(실재를 기하학적 형상으로 환원하는)이 강조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플라즈마 기법은 원래 압축된 공기를 이용해서 철판을 절단하는 방법으로서, 작가는 이를 조각에 적용해서 철판의 표면에다가 비정형의 스크래치를 만든다. 더러는 중첩된 스크래치가 철판을 관통하며 헤아릴 수 없는 미세한 구멍을 만들기도 한다. 철판을 마치 가죽이나 팰트 천과 같은 유기적인 소재로 변형시키고, 소재의 표면에다 섬세한 요철과 질감을 부가한 것이다.




작가는 이렇게 변형된 철판 구조물을 벽에 걸거나, 공간에 설치하거나, 더러는 일종의 통로로 재현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그 사이를 지나가게 한다. 이때 철판 구조물 속이나 뒤편에 조명을 설치하여 철판의 표면으로 빛이 새어나오게 함으로써 관객은 마치 중첩된 나뭇잎들 사이로 비쳐드는 빛의 줄기를 보는 듯한(소우주), 그리고 별이 총총한 밤하늘을 보는 듯한(대우주) 우주를 추체험할 수 있다. 이 일련의 과정에 나타난 불과 열 그리고 공기와 금속의 상호작용에 대해서는 마치 원 재료를 혼합하여 전혀 다른 차원의 물질을 추출해내는 일종의 비의적인 연금술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너덜너덜해진 철판의 표면에 난 스크래치는 전작에서의 상처를 이어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상처가 내적 에너지의 직접적인 표출을 견인하는 원동력으로서 최태훈의 조각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이후 주제는 생명으로 넘어간다. 마른 나뭇잎이나 씨앗 그리고 숲 시리즈 등 식물 소재로써 사물들 저마다 가지고 있는 생명의 아름다움에 천착하고 있으며, 이로부터 식물적 사유를 전개해 보여준다. 기법적으로는 전작에서의 플라즈마 기법과, 연장을 이용해서 동판을 두드려 그 표면에다가 비정형의 요철을 만드는 단조 기법, 그리고 일정한 굵기의 철 막대(철봉)를 용접으로 이어 붙인 선조 기법이 두루 적용된다. 그 이면에는 생명의 존엄성에 눈뜨게 한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이 뒷받침되고 있으며, 이와 함께 우주에 대한 관심이 우주를 형성하고 있는 개별 요소들(존재들)에게로 전이된 것으로 보인다.




최태훈의 근작들은 순환이라는 주제를 형상화하고 있다. 존재에의 인식이 우주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고, 이는 우주를 이루는 요소들과 그것들이 내재한 생명의 비밀에 닿아 있으며, 그리고 그 비밀이 우주의 생성원리이며 운행원리인 순환으로 현상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주제의식이 돌이켜보면 작가의 작업에서 순차적으로 나타난 것이기는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론 서로 맞물려 있는 개념의 덩어리이다. 각 개념들이 서로 구분할 수 없는 상호 포괄적이고 상호 내포적인 관계에 있는 것이다.
근작에서의 특징적인 점은 전작에서 부분적으로 적용되던 선조 기법이 본격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작가는 철 막대로 사각의 프레임을 만든 다음, 일정한 길이로 자르고 휜 스테인리스 스틸 봉을 이어 붙여 만든 비정형의 유기적인 문양들로서 그 사각의 안쪽을 채운다. 전작 중 특히 숲 시리즈에서의 마치 서로 얽혀 있는 나무 가지들을 연상시키던 형상이 자연의 순환원리를 표상하기 위해서 더 추상화된 기호로 변질된 것으로 보인다. 작가는 이렇게 만든 사각의 프레임을 기본형으로 하여, 벽이나 병풍처럼 공간에 설치하기도 하고, 속이 빈 사각의 통로를 재현하기도 하고(통로 자체는 미로와 함께 통과의례를 상징하며, 프레임 속의 잔가지들을 뿌리로 읽으면 대지 혹은 땅덩어리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 밖에 임의적인 구조물들을 축조하기도 한다. 그 이면에는 사물의 구조적이고 구축적인 특질에 맥이 닿아 있는, 일종의 건축적인 멘탈리티가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부연하면, 작가는 벽 형태의 구조물을 통해서 일종의 벽 조각(Wall Sculpture)을 시도한다. 천장이 높은 공간 속에 저 홀로 우뚝 버티고 서 있거나, 공간을 가로질러 길게 누워있는 거대한 벽 자체는 사람들 상호간의 소통을 가로막고 있는 불통의 벽이며, 타자에게 가 닿을 수 없는 소외의 벽을 상징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프레임 안쪽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어서 불통의 벽을 넘어 타자와 서로 통한다. 나와 네가 서로 통하고, 안쪽과 바깥쪽이 하나로 열려 있는 벽(그 자체로는 불완전한 벽)을 통해 작가는 타자에게 손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프레임 안쪽의 문양은 설핏 보기에는 무질서해 보이지만, 사실은 만(卍)자의 자형을 빌려 현재진행중인 기(氣)의 운동성과 함께 우주의 생성순환의 원리를 상형한 것이다. 실제로 그 형상은 마치 바람개비인(만자 형상의) 양 유기적인 덩어리를 이룬 채 휘돌아가는 거대한 회오리를 연상시킨다. 개별적인 존재보다는 유기적인 전체에 인식의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그럼으로써 우주 속의 모든 존재가 시작도 끝도 없는 무한정성의 운행회로 속을 관통해 흐르는 (덧없는) 존재임을 떠올리게 한다.
더불어 선조 기법에 의한 이러한 일련의 작업들에서는 평면성이 두드러져 보인다. 사각의 프레임 속에 선(線) 조형을 부가한 작가의 방식은 마치 사각의 평면 위에 드로잉한 회화에다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허무는 평면성이나, 안과 밖이 서로 통하는 열린 구조 등이 양감 곧 덩어리에 바탕을 둔 전통적인 조각 개념과는 일정한 차이를 견지하고 있다.




그리고 근작도 그렇지만, 최태훈의 조각이 갖는 미덕은 직조(直彫)로부터 나온다. 캐스팅이나 몰딩과 같은 간접 방식이 아닌, 재료에 곧장 달려들어 재료를 직접 조형하는 과정에서 유래한 내적 에너지, 힘, 고유성이 느껴진다. 직조의 경우에는 당연하게도 재료 자체의 물성이 더 잘 드러나 보이는 법이다. 그렇다고 해서 작가의 조각에 나타난 물성이 원 재료 자체의 물성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은 아니다. 그러기는커녕 특히 플라즈마 기법에서 보듯 재료 본래의 물성을 상당할 정도로까지 변질시켜 내놓는다. 마치 새까맣게 탄 철의 숯을 보는 듯한 그 물성의 변질 과정에서는 일말의 화학적인 반응마저 느껴진다. 또한 시각과 촉각이 서로 스미는가 하면, 내부와 외부를 관통하는 공간 해석이 돋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철 재료(철판이나 철봉)를 자르고, 휘고, 두드리고, 열을 가해서 변형시키는 재료와의 직접적인 대결(이는 어떠한 매개도 없이 주체와 세계가 직접적으로 만나는 것과도 통하며, 그의 조각이 존재론적 인식에 깊이 연루돼 있음을 말해준다)을 통해서 전통적인 조각을 현재의 시점으로 옮겨놓는 데에 뚜렷한 성과를 보여준다.


고충환│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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