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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춘의 회화
삶의 메타포로서의 길과 검은 풍경
박병춘의 그 동안의 작업을 보면 한국화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다양하고도 파격적인 형식실험의 면면들이 느껴진다. 예컨대 목탄과 콘테 그리고 파스텔을 먹과 혼용한 인물 군상 그림을 보건대 독일 신표현주의를 연상시키는 격렬한 페이소스와 함께, 욕망과 무의식과 같은 인간 실존의 존재적 불안이 거침없이 표출돼 있다. 그리고 생고무와 청테이프와 같은 오브제로써 먹과 안료를 대신하기도 한다. 특히 검정 생고무를 이용한 일명 고무산수는 전통산수의 필(획)을 고스란히 재현해서 오려 붙인 고무조각들의 재편집을 통해 평면과 입체를 동시에 함축한 산수화를 제시하고 있다. 또한 칠판에다가 백묵으로 그린 산수화에서는 이미지의 덧없음을 주지시키는가 하면, 그림을 벽에 거는 대신에 공간에다가 설치한 작업에서는 작업의 영역을 평면으로부터 공간설치에로까지 확장시킨다. 그리고 일상으로부터 차용한 소재들을 검정의 평면 실루엣으로 처리한 일명 까만 정물 연작에서는 실재와 이미지, 재현된 이미지와 기호로 환원된 이미지와의 관계를 묻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시도들에 대해서 한국화의 범주로 볼 수 있느냐, 없느냐로 의견이 분분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작가 자신은 자신의 작업이 어떻게 분류되든 그다지 마음에 두지 않는 것 같다. 적어도 분명한 것은 이 작업들이 전통적인 한국화 중 특히 수묵화의 연장선에 있으며, 또한 전통적인 한국화를 '지금 여기'라고 하는 현재적 시점으로 끌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그 문제의식이나 감수성이 동시대적인 한국화, 당대적인 수묵화에 접맥돼 있다는 것이다.
더불어 전통적인 산수화를 재해석한 일례로서 흐린 풍경이나 기억 속의 풍경과 같은 일련의 풍경 연작을 들 수 있다. 그 농담이 똑같은 엷은 묵으로 그린 흐린 풍경과 기억 속의 풍경은 서로 통하는 것이다. 풍경이 흐린 것은 기억 속의 풍경, 기억 속에서 불러낸 풍경, 기억으로부터 재생해낸 풍경이기 때문이다. 그 풍경은 과거의 시점 속에 위치해 있으며, 그 과거의 시점을 현재화할 때 그 만큼의 벌어진 시간의 틈을 함축하고 있다. 그리고 그 틈이 흐릿한 풍경으로 나타난 것이다. 하나의 풍경을 기억 속으로부터 끄집어낸다는 것은 그 풍경을 시간 속으로 밀어 넣는 일이다. 그러므로 흐린 풍경과 기억 속의 풍경으로 시작된 작가의 일련의 풍경 연작은, 시간 속의 풍경이나 흐르는 풍경(그 자체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닌, 변화하는 풍경)과 같은, 삶의 풍경에 대해 사념의 연쇄를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객관적인 풍경을 주관적인 풍경, 나의 풍경, 존재의 풍경(나의 실존과 연속된 풍경)으로 전이시킨다.
박병춘의 근작은 '길이 있는 검은 풍경'을 주제로 하고 있으며, 이는 흐린 풍경과 기억 속의 풍경 연작과 함께 전통적인 산수화의 재해석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전작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클로즈업을 통한 근접시점으로써 시야가 미치는 풍경의 범주가 전작에 비해 현저하게 앞당겨지고 좁혀졌다는 점이다. 이는 대상을 집중시키는 시각적 효과를 낳고 있으며, 그렇게 집중된 길이 화면의 전면에 부각되는 구도로서 나타난다. 대개 전통 산수화에서 길은 산수의 일부분으로 그 속에 묻혀있거나, 거의 시선을 끌지 못하는 부차적인 형태로 한정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작가는 그렇게 묻혀있거나 부차적이었던 길을 풍경의 전면에 내세운다. 전작이 풍경과 주체와의 사이에 설정된 일정한 거리감으로부터 사색의 구실을 찾아낸 것이라면, 근작에 나타난 근접시점은 작가가 풍경의 실재에 바짝 접근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 길들을 보건대 가로로 누운 길도 있지만 대개는 세로로 서 있는 길이 많다. 그리고 원근법을 적용하여 화면의 전면으로 올수록 점차 넓어지고 있다. 길의 실재를 느끼기에 충분한 큰 그림들에서 길은 마치 그림 속의 화면 바깥으로까지 연장된 듯한 느낌을 준다. 그림 앞에 선 관객으로 하여금 마치 실재하는 길 앞에 서서 풍경 속으로 사라지고 있는 길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길 안에 서서 그 풍경 속의 일부로 참여하고 있는 듯한 추체험을 가능케 한다. 이렇듯 화면 외부로까지 확장되는 시야는 관객으로 하여금 그림을 그 자체 불완전한 단면으로서 받아들이게 한다. 그리고 그 불완전한 부분을 스스로 보충하려는 심리가 자기 내면으로부터 작용하고, 이는 그대로 관객으로 하여금 작업의 일부로서 참여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는 일종의 미학적 장치랄 수 있는 이러한 현상은 전통적인 소통미학에 있어서의 상호소통성에 접맥돼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통적인 산수화에 나타난 여백의 개념을 화면을 벗어난 실재의 공간으로까지 확장시키려는 작가의 의도와도 통하는 것이다.
그림 속의 길은 길의 실재를 추체험하게 할뿐만 아니라, 길이 거느리고 있는 상징성, 삶의 메타포에 대한 사색으로 우리를 이끈다. 화면의 전면에서 연장된 그림 속의 길은 화면의 보이지 않는 뒤쪽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그렇게 사라지는 길은 하늘과 길이 맞닿은 지점에 지평선을 남긴다. 그 지평선이 높게 그려진 그림 속의 길은 아득한 느낌을 주고, 대개의 풍경화와 마찬가지로 화면의 아래쪽에 치우쳐져서 그려진 지평선은 시각적인 안정감과 함께 쉽게 공감을 끌어낸다. 여기서 길은 지평선이 숨기고 있는 비밀을 드러낸다. 지평선은 그 자체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길이 끝나는 자리, 하늘과 길이 맞닿는 자리에 불현듯 지평선이 생겨난다. 그러므로 지평선은 길의 잠재태, 길이 숨기고 있는 가능태라고 말할 수 있다. 모든 길이 끝나는 자리, 하늘과 길이 맞닿는 자리, 길의 안쪽으로부터 불현듯 지평선이 솟아오르는 자리는 심연처럼 아득하고 무의식처럼 멀다. 그리고 실재와 허구, 실상과 허상, 존재와 부재가 맞닿아 있는 경계를 드러낸다. 이처럼 그림 속의 길은 그 길이 사라진 화면의 보이지 않는 뒤쪽, 있음과 없음이 합쳐지는 지점에 대한 사념을 불러일으킨다.
그 길은 검은 풍경 속을 가로지른다. 그리고 야트막한 둔덕과 그 표면에 난 잡풀들과 덤불들이 길의 가장자리를 따라 마치 울타리처럼 길을 둘러싸고 있으며, 하늘과 길이 맞닿은 자리에 하늘을 향해 서 있는 키 큰 나무가 서로 어우러져 검은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검은 풍경이란 여백으로 남겨진 텅 빈 길과 하늘(때때로 엷은 묵이 가해지기도 한다)이 먹으로 그려진 검게 드러난 풍경과 대비를 이루는 것에 연유한 것이다.
이렇게 검은 풍경으로 나타난 박병춘의 그림은 흔히 그렇듯 먹의 농담을 조절하는 방법으로써 사물의 세부를 묘사하고 그 음영을 나타내 보인 그림들과는 다르다. 그렇다고 먹을 균일하게 적용하는 방법으로써 마치 실루엣과도 같은 평면으로 대상을 환원한 그림도 아니다. 작가는 현장에서 화첩에다가 모필 사생을 할 때와 마찬가지로 똑같은 농담의 붓질을 중첩시켜나가는 방법으로써 사물을 나타낸다. 물론 이때의 붓질은 그냥 주어진 면을 채운다는 식의 기계적인 과정이 아니라, 사물의 생김새를 따라 일일이 그린 획들이 중첩된 것이다. 그러니까 풀과 덤불을 중첩시켜 그린 결과가 마침내는 평면이나 실루엣처럼 보일 뿐이지, 사실은 이런 식의 환원주의와는 무관한 다른 차원의 그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그림에서는 우선 단조로운 평면으로 환원된 사물이 눈길을 끌지만, 자세히 보면 그 검정색의 단면 속에 풀들과 덤불들의 세부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작가는 대상의 세부와 음영을 드러내기 위해서 먹의 농담을 조절하거나, 농담에 변화를 주지 않는다. 이를테면 때때로 길이나 잿빛으로 드러난 하늘과 같은 넓은 면이나, 그리고 디테일 한 묘사를 하기 이전의 숲이나 덤불의 전체 면을 엷은 담묵으로 처리할 때를 제외하면, 어떠한 농담 상의 조절이나 변화도 찾아볼 수가 없다. 말하자면, 전작에서의 흐린 풍경이 똑같은 담묵으로써 대상을 그려낸 것이라면, 근작에서의 검은 풍경에서는 똑같은 농묵으로써 대상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는 먹그림을 이루는 여러 요소들 중에서 특히 획(필)이 두드러지게 하며, 작가의 그림을 중첩된 획으로 그려진 먹그림으로 정의하게 만든다. 이로써 작가의 근작에서는 넓은 면으로 드러난 하늘, 길 등의 빈 화면과, 똑같은 농담의 먹이 중첩된 검은 수풀과의 대비가 현저하게 느껴지며, 이로써 흑과 백과의 대비가 비교적 뚜렷하게 부각된다. 그만큼 단조롭고 심플한 외경과 함께, 그 외경이 함축해내고 있는 사물의 디테일 한 세부와의 대비가 작가의 근작을 특징짓고 있는 것이다.
박병춘의 그림은 무엇보다도 철저한 현장에서의 모필 사생에 바탕을 두고 있다. 화첩에다가 그린 모필 사생은 그림을 확대할 때에도 거의 여과 없이 그대로 적용된다. 화면이 커지고, 사물을 묘사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더 디테일해진 것을 제외하면 거의 화첩 그대로의 생생한 현장감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은 흑과 백의 대비가 두드러져 보이는, 검은 평면과 실루엣으로 환원된 화면으로서 어필되는 첫인상과는 달리, 보면 볼수록 그림이 비롯된 지점 즉 실제의 풍경과 그 현장 속으로 빨려들게 만든다. 실제로 그림 속의 나무들을 보면 그 하나하나의 종류를 알아볼 수 있다. 그것도 그냥 일반적인 나무가 아니라, 현장사생을 할 당시의 대기와 습기 그리고 바람과 몸을 부대끼며 호흡을 섞던 바로 그 나무가 생생하게 느껴지고 전달된다.
작가의 근작에서는 일종의 환원주의에 바탕을 둔 추상적 평면과 함께, 실경의 사생에 바탕을 둔 생생한 현실감이 하나로 뒤섞여 있다. 선명하게 드러나 보이는 모호한 이중성, 접점, 경계에 대한 인식과 성취야말로 작가가 검은 풍경 연작에서 일궈낸 성과라고 할 만하다.
고충환│미술평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