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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자의 '꽃의 세상'
인간의 손은 참 많은 능력을 지니고 있다.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지 만들어내는 재주를 지녔다. 이 세상의 모든 물건들이 모두 인간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면 그 무한한 능력에 새삼 놀라게 된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지적인 능력보다는 손의 재주 때문이다. 그런데 대개는 손에 주어진 재주를 이용하는 사람은 극히 한정되어 있다. 물론 손의 재주에 대해 필요를 느끼지 않는 직업에 종사하게 되면 평생을 가도 그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조차 알 수 없다.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야 어디 한두 가지랴만, 그 많은 방법 중에서도 그림을 그리는 일은 참 각별하다는 생각이다. 전적으로 손의 재능에 의탁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그림 그리는 행위야 손의 영역이지만 그 손을 사역하는 것은 미적 감수성이고 미의식이다. 미적 감수성과 미의식은 때로 손의 기능을 극단적인 곳으로까지 이끄는 마술적인 힘을 행사한다. 손의 기능이 극단적인 곳에 이르기 위해서는 단순히 기술적인 연마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그림에서 손의 기능을 사역하는 것은 다름 아닌 미의식이기 때문이다. 미의식은 사실적인 묘사력을 극단적인 곳으로 끌어올리면서 동시에 고상하고 고급스러운 감각으로 안내한다. 사실적인 묘사력이 완벽하게 되면 손끝이 아주 민감해져 이로부터 그림은 한층 정밀해지고 밀도가 높아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정밀함과 밀도가 세련미를 불러들이고 세련미는 마침내 예술적인 가치로 변환하는 것이다.
노숙자의 그림은 이런 과정을 거쳐 성립되고 있다. 그는 한치의 의심도 없이 손의 기능을 전적으로 신뢰해 왔다. 고려청자나 분청사기 또는 조선백자를 만든 도공들이 그랬듯이 그 또한 일념으로 손의 기능을 연마하는데 열정을 바쳤다. 예술성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상태에서 손의 기능을 연마하는데 주력하는 것은 자기확신이 없고서는 안 될 일이다. 손의 기능이 숙달하면 과연 예술성으로 보상될 수 있을까 싶은 의구심의 등쌀에 견디기 어려운 탓이다. 설령 기능이 극단적인 곳에 이르면 예술성이 보장된다고 하더라도 그 과정을 감내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손의 기능을 숙달시키는 일에 전념했다. 그러기에 화단과도 거의 절연된 상태가 되었다. 출신 대학 학풍과는 전혀 다른 길을 선택함으로써 자초한 고립이었다.
다행히도 그는 손의 기능을 숙달시키는 데 필요한 대상을 꽃으로 선택함으로써 그러한 고립감에 갇히지 않고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었다. 세상의 꽃들이 피어날 때 보여주는 그 신묘함에 감탄하듯이 그 또한 자신의 손으로 하나 하나의 꽃을 피워내는 즐거움에 스스로 빠져들 수 있었다. 손끝을 아주 예민하게 만들어가면서 꽃술 하나도 놓치거나 허술하게 피워내는 일없이 꼼꼼하게 챙겼다. 그러다 보니 화판에서 피어나는 꽃들은 정말 자연의 꽃들과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닮아 있었다. 그리하여 손의 기능은 꽃을 눈앞에서 지우고도 스스로의 힘으로 익숙하게 꽃을 피워낼 수 있을 정도가 됐다. 진정 손의 기능이 극단적인 지점에까지 이르렀다는 증표인 셈이다.
그가 이제껏 그림으로 옮겨온 꽃이 무려 2백여 종류에 달한다고 하니, 단순한 산술적인 계산만으로도 그 작업량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어디 그 뿐이랴. 꽃을 보지 않고도 능히 그려낼 수 있으려면 또 얼마만한 숫자의 꽃을 그렸을까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눈앞에서 꽃을 치우고도 마치 실제처럼 재현하려면 꽃의 형태 및 색채는 물론이려니와 생리까지도 낱낱이 파악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실제로 그는 수십 년을 꽃 그림으로 일관해 오는 동안 수많은 꽃들을 직접 가꾸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꽃의 형태 및 색채 그리고 생리를 터득하는 데는 그보다 좋은 방법이 달리 있을 수 없는 까닭이었다.
손의 기능이 숙달되고 세련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접근방식에 큰 효험이 있었던 것이다. 손끝의 감각이 세밀하고 치밀하기 위해서는 그를 사역하는 그 자신의 미의식 및 미적 감각이 예민해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쩌면 꽃을 관찰하고 손수 가꾸는 일이야말로 손의 기능을 숙달시키기 위한 선행학습이었던 셈이다. 꽃을 가꾸는 노고는 그림을 그리는 일 못지 않게 희열이 넘치는 일이었다. 신비함으로 가득한 생명의 순환을 직접 목도함으로써 꽃에게 부여된 아름다움의 실체를 터득할 수 있었던 것도 큰 수확이었다. 꽃을 가꾸는 행위는 꽃을 그리는 일과 다르지 않기에 그렇다. 꽃을 가꿈으로써 꽃의 아름다움이 생명의 숨결과 함께 하는 것이란 깨달음이야말로 현실의 꽃을 화판에 옮기는 일이 지닌 내적인 가치를 빛나게 하는 일이었다.
그가 즐겨 그리는 꽃들은 대다수가 들꽃이다. 화초용으로 키우는 꽃도 적지 않으나 대개는 스케치 여행을 통해서 또는 이런 저런 인연으로 들이나 산에서 만나는 야생화들이다. 2백여 종류의 꽃을 그렸다면 그 중에서 화초용으로 키우는 꽃은 그렇게 많지 않으리라. 그러고 보면 들이나 산에서 피어나는 헤아릴 수 없이 종류가 많은 야생화들이 주 대상이었다. 최근 자생적인 야생화 즉 재래종에 대한 일반적인 관심이 부쩍 증가하고 있는 추세는 그에게 큰 힘이 되어주고 있다. 그 자신의 관심이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점에서 위안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 수년 전 예서원에서 출간된 '봄 여름 가을 겨울'-노숙자의 우리 꽃 그림'이라는 화집은 기대 이상의 판매실적을 올렸다. 그만큼 우리 꽃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높다는 증거이다. 이렇듯 우리 꽃에 대한 일반적인 관심을 확인함으로써 더욱 자신의 작업에 확신을 갖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 또한 꽃 그림을 그리기 전에는 우리 꽃에 별반 관심을 갖지 않았다. 하지만 그 동안 하찮게 여겨온 들꽃이 화판 위에 옮겨졌을 때 느끼는 감정은 실로 벅찬 것이었다. 소박하기 이를 데 없는 이름 모를 들꽃들에도 이전에 미처 깨닫지 못한 저마다의 아름다움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에 흥분했다. 그런 희열이 그 자신으로 하여금 더욱 깊이 들꽃의 아름다움에 빠져들도록 만들었는지 모른다. 그리하여 들꽃이 가지고 있는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전하는 메신저가 되도록 자청하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들꽃은 비록 꽃 모양이 크고 화려하지 않을지언정 오밀조밀하여 귀엽고 앙징스럽다. 더구나 한두 송이보다는 무리를 이루었을 때 그 모양은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무리 꽃이 들판을 덮고 있는 모습은 가히 장관을 이룬다. 그렇다. 아무리 작고 볼품없는 꽃일지라도 함께 어우러졌을 때는 풍성한 이미지로 바뀌면서 세상을 한층 아름답게 꾸미고 있다는 깨달음은 또 다른 소득이었다. 들꽃은 그런 일깨움을 주었다. 단지 하루동안만 꽃을 피우고 지는 꽃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은 또 다른 충격이기도 했다. 그토록 짧은 시간만을 허락하는 조물주의 심술에 가슴이 아린 것은 들꽃과의 진정한 교감이 없고서는 안 될 일이다. 들꽃을 단순히 그림의 소재로만 인식하지 않고 그 자신의 삶의 교본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그래서일까. 꽃 모양새가 작고 볼품없다고 여기는 들꽃은 화판에 무리를 이루어 놓았다. 무리를 이루는 작은 꽃들이 하나의 통일된 색채로 번져나가는 모습은 들꽃의 아름다움이 어디에 있는지를 실감케 한다. 다시 말해 그는 그림을 통해 들꽃들이 지어낼 수 있는 아름다움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 자신은 더불어 존재한다는 것은 정녕 아름다운 일임을 깨닫고 있다. 대자연의 모든 물상은 모두가 이런 저런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한마디로 독불장군은 없는 것이다. 울긋불긋 현란한 원색으로 치장한 들꽃들의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것은 초록의 풀들이 있기 때문이다. 초록의 풀들이 없는 가운데 모두 화려한 색채를 뽐내는 울긋불긋한 원색의 꽃들만이 지천이라면 거기에는 정녕 색채의 아름다움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시선을 진력이 나게 만들 따름이기에 그렇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질서란 바로 그런 조화의 묘에 있다.
꽃 그림에서 그는 일체의 회화적인 기교를 배제했다. 전적으로 객관적인 시각에 의지함으로써 사실의 전달에 충실하려 했다. 그 자신의 감정을 담지 않은 채 단지 보여지는 꽃의 형태미와 색채를 그대로 옮겨놓는 일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그림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객관적인 진실을 표현하기 위한 기술적인 완성도를 높이는 일에 주력했고 기대하는 만큼 성과를 얻었다. 자연 그대로의 환경에서 옮겨오는 꽃의 모양일지라도 그 아름다움을 보다 선명히 부각시키기 위해 배경을 비워둔 채 꽃만을 그렸다. 그런가 하면 어떤 경우에는 배경에 추상적인 이미지를 도입, 그 자신의 감정상태를 반영하는 일도 있었다. 단순히 꽃의 아름다움 그 자체만을 노래하는 것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미적 감흥을 추상적인 이미지 속에 담았던 것이다.
제아무리 소재를 실제와 일치시킨다고 할지라도 어차피 현실과는 다른 평면 공간에 놓인다. 이러한 그림의 상황 그 자체가 허구이다. 그러니 그림은 어디까지나 조형적인 해석에 다름 아니다. 실제와 분간할 수 없도록 차가운 이성적인 시각으로 객관화시킨다고 할지라도 꽃의 선택에서부터 화면에 배치하고 구성하는 일련의 작업과정에는 이미 작가의 주관적인 시각이 반영되기 마련이다. 흐트러져 있는 꽃을 보기에 좋게 정렬해 놓는다던가 또는 부분적으로 첨삭을 하는 따위의 과정은 그 자신의 미의식이 관여하는 부분이다. 다시 말해 화판에서 전개되는 행위와 그 결과물로서의 꽃의 이미지는 현실을 빙자하고 있을 뿐 엄연히 다른 세상의 일이다.
그는 바로 이 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마치 현실적인 공간에 놓인 듯한 생생한 꽃의 이미지와 그 정서를 표현하고 있으나 이는 모두 가공의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소재를 아무리 객관화시킨다고 할지라도 결과적으로는 순전히 그 자신의 주관적인 산물인 것이다.
꽃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으며 화폭에서 어떤 위치에 놓이는가, 그리고 전체적인 분위기는 어떤가 따위의 문제들이 그림의 품격 또는 격조를 결정하게 된다. 이는 오직 그 자신의 미적 감각이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이다. 여기에다가 한 가지 더 덧붙인다면 시적인 정취이다. 그림은 어떤 경우에라도 내용, 즉 문학성이 실현되어야 한다. 간결한 운문체로 변환할 수 있는 서정적인 이미지를 표현해야 한다. 꽃 자체도 충분히 아름답고 또 시심을 자극할 만큼 매혹적이지만 거기에 인생의 묘미를 일깨우게 하는 내적인 정서가 없다면 어쩐지 싱겁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다. 이러한 문제를 의식하고 있음인지 그는 배경이나 꽃 주변에 다양한 이미지를 도입하여 서정적인 분위기를 이끌어낸다.
그러면서도 때로는 아주 차갑게 묘사하여 시각적인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그리하여 정서적인 부드러움이나 여유가 없이 마치 식물도감의 그림처럼 묘사하기도 한다. 이러한 방식에서는 자료적인 가치를 우선한다. 꽃 하나 하나의 온전한 형태 및 색깔을 명료하게 보여주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참으로 교육적인 가치를 우선한다는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이에 반해 대체로 무리 꽃을 보여주는 작품에서는 함께 어우러지는 조화미와 더불어 통일된 형태미에서 오는 정서적인 풍요로움을 맛볼 수 있다. 가령 배경에 거친 붓 자국을 남긴다든지 몽롱한 안개처럼 또는 꿈결이나 바람결 같은 이미지를 첨가한 작품은 그림에 감정의 표정을 담으려는데 기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표정이 담기든 꽃의 형태 자체를 무너뜨리는 일은 없다. 언제나 온전한 사실적인 꽃의 형태를 중심에 두고 그 주변에 표정을 덧붙이는 식이다.
이처럼 배경에 추상적인 이미지를 도입하는 것은 또한 회화적인 공간임을 상기시키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그 자신의 존재성을 드러내려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꽃의 형태적인 순수성 및 그 아름다움만을 노래하는 것으로는 때로는 지루할 수도 있기에 그렇다. 어쩌면 그런 의무감의 속박에서 벗어나 꽃과 함께 하는 삶을 통해 느끼는 여러 가지 감정, 그 속내를 풀어내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이 있다. 그가 배경에 추상적인 이미지를 도입한다던가, 단색조의 평면적인 이미지로 처리하는 데는 꽃의 형태미를 보다 선명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보이기 위한 의도가 은닉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인지, 어떤 경우에도 꽃의 형태 및 색깔이 탁해지거나 모호해지는 일이 없다. 꽃의 색깔과 모양에 따라 아주 신중하게 배색이 결정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꽃과 조화를 이루면서도 꽃의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더욱 상승시킬 수 있는 색채 또는 추상적인 이미지가 결정된다는 뜻이다. 그래서인지 어느 작품에서나 어떤 꽃이나 형태가 명료하면서도 단아하며 자기표정이 선명하다. 꽃 하나 하나에서 기품이 느껴지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꽃에 그 자신의 인격미를 실현하고 있음을 말한다. 이제 꽃은 단순히 그림의 소재에 그치지 않고 그 자신과 희로애락을 함께 하는 동반자적인 관계로까지 발전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꽃은 어느 새 의인화되어 있는 것이다. 무언가 자신을 얘기하고 싶어하는 듯하다. 이는 거꾸로 말해 꽃의 속닥거림을 듣고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냥 자연스러운 모습 그대로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얘기를 들려주고 싶어하는 꽃의 내면적인 정서를 표현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그림의 정서는 꽃과 더불어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필경 친구처럼 다정다감하게 말을 건네는가 하면, 때로는 꽃에게서 위로를 받는 따위의 상대적인 존재로서 인식한 결과이리라. 달리 말해 이는 꽃에 인격을 부여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꽃 자체도 어느 새 인격적인 존재로서 탈바꿈하고 있는 것이다.
그림이란 최종적으로는 인격의 표현일 수밖에 없다. 그림을 데리고 더 이상 갈 데가 없는 지점에 이르면 마침내 인격미가 피어오른다. 그림을 통해 정신 및 감정이 순화되고 고양되면서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뛰어 넘는 경개, 즉 정신적인 아름다움이 전개되기 마련이다. 그가 오랜 동안 갈고 닦은 묘사력은 인격미를 불러들이고도 남음이 있다. 그는 속된 표현으로 꽃 그림에 관한 한 '도가 튼' 것이다. 그런 경지를 넘어서면 이제는 평안하고 고요하며 맑은 정신세계가 드러나게 된다. 그는 이 지점에다 자신을 세우는데 성공한 것이다.
우리는 그가 그린 꽃 그림을 통해 그 자신의 존재를 보게 된다. 아름다운 꽃만을 전면에 드러낸 채 그 자신은 온전히 숨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림 속에 담긴 그의 존재성을 간파하기 어렵지 않다. 고려청자, 분청사기 그리고 조선백자에 구현된 아름다운 예술적인 가치는 곧 이름 없는 도공의 인격임을 부정할 수 없듯이 말이다.
신항섭│미술평론가
* 이번 전시에 맞추어 노숙자작품집 <꽃의 세상>이 미술시대(172쪽 45,000원 / Tel. 723-2664~5)에서 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