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수 이 개 인 전- ‘ 산을 오르다 ’
전시 기간: 2004년 11월 24일(수) ~ 11월 30일(화)
전시 시간: am 10:00 ~ pm 6: 00
opening : 11월 24일(수) pm 5: 00
전시 장소: Gallery ARTSIDE
직접 제작한 실크종이 위에 염색의 과정을 거치고 그 위에 수를 놓는 작업을 통해 산과 숲의 이미지를 재구성하고 작가 본인의 심상을 투영하는 작업을 해온 박수이의 전시가 Gallery artside에서 열립니다.
우리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고 같이 할 수 있는 파티션과 집안을 장식하는 액자 등을 통해 미술작품의 생활화를 꾀하고 있는 박수이의 작품은 실크실과 실크솜 등 실크 원사(原絲)를 주재료로 사용하여 종이의 광택이 살아있습니다. 또한 염색한 실크에 ‘자수(刺繡)’작업을 하여 견고함을 확보하고 자수만이 가지는 고유한 텍스츄어를 살려 고급스러움을 더하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자수의 새로운 조형성을 발견하고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미술작품의 이미지를 다양하게 넓혀보시길 바랍니다.
박수이는 현재 art SPACE ㅁ[mi:eum]의 큐레이터로도 근무하고 있습니다.
‘산은 새로운 세상을 꿈꿀 수 있는 공간이었다.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 처음 오른 산은 인생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전환점을 제시했고, 분명하진 않지만 여러 색채로 각인이 되어 내 마음속에 자리잡았다. 그 때 보았던 아름다운 색채를 떠올리며 산을 찾기 시작했고, 힘들게 오른 끝에 정상에 도달했을 때의 기쁨을 맛본 뒤로 그 감동을 느끼기 위해 산을 오르고 또 올랐다.
그러나 이 때 보았던 색채는 내가 분명히 인지하고 있어야 하는 사실을 그저 아름다움으로 포장해 놓았고 원하는 때에 오면 언제라도 볼 수 있는 평범한 일상의 친구처럼 만만하다고 느끼게끔 만들었다.
나는 항상 그 자리에, 같은 모습으로 아름답기만 한 산이 보여질 줄 알았다. 머릿속에 각인된 색채의 이미지가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심경의 변화와 주변의 상황에 따라 산은 다른 모습과 다른 이미지로 보여졌고, 산을 오르면서 내가 예전에 알던, 쉽게만 생각하던 산이 아니라는 생각에 적잖이 당황하고 부담을 느껴야만 했다. 여러 가지 기후의 악조건으로 정상에 오르지 못했을 때의 실망감을 몇 번 경험하고 나니 산은 더 이상 만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게다가 산에서 길을 잃어 거친 나무숲을 헤치고 지나갈 때도 있었고, 내려가는 길에 미끄러져 다치기라도 할 때는 내가 왜 여기를 왔을까 원망도 많이 해보았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산을 오르는 즐거움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항상 하던 산행이니 해야한다는 강박관념이 자리잡기 시작했고 내가 산을 왜 오르는지 목적은 사라져버렸다. 산행에 대한 상처만이 대가로 남았다. 점차 산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나는 산에 오를 수 없었다.
* 작업과정 *
실크는 곱고도 여리지만 속으로는 아주 질기고 강한 이중성을 지닌 섬유이다. 물성(物性) 이중성을 지닌 실크가 산을 표현하는 재료로 쓰인다는 것은 또 다른 재미를 불러일으킨다. 산 역시 겉으로 보기에는 온화해 보여도 그를 지키는 단단함을 내포하고 있는 외유내강(外柔內剛)의 모습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실크를 잘게 찢고 오려 끈적이는 액체로 종이를 뜨는 과정은 힘겹지만 나에게는 내적인 갈등을 해소하는 작업이었다. 개구리 마냥 웅크리고 앉아 여러 종류의 실크를 하나하나 늘어놓고 배열하며 모양을 만드는 과정은 고되고 지겹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 과정을 거쳐 끈적이는 액체를 붓고 그 위를 흥겹게 두들기는 시간은 그 동안의 힘듦을 보상하기에 충분하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실크가 종이로 새로 태어나는 순간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실크종이 위에 염색을 하고, 배치의 과정을 거치면 그 위에 수를 놓는다. 사실은 수(繡)라는 작업을 할 때마다 갈등했었다. 수를 놓고 난 후의 결과가 수를 놓기 전보다 만족스러우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완성의 단계까지 간다는 것이 너무나 더디고 힘겨워 매번 그만두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작업에 아주 긴 시간을 투자한다는 것이 비생산적으로 느껴질 때도 있었다. 편하게 가고 싶었다.
그러나 고된 과정을 거쳐 수가 놓여진 산이 내 앞에 펼쳐질 땐 나는 피조물을 탄생시킨 창조주의 마음이 이런 걸까 하며 혼자 흐뭇하게 바라보곤 했다. 불평과 만족이 교차하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나의 시각으로 바라본 산의 풍경, 나만이 간직하고 있는 추억이 어린 산의 정경이 펼쳐지는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이 순간도 잠시뿐이었다.
작업을 계속 바라보고 있으면 좌절감이 밀려왔다. 내가 표현한 저 산이 과연 내가 느끼고 경험했던 산일까라는 의심이 들자, 내가 느끼고 상상했던 산의 이미지와 내면의 모습을 표현하는 것이 어쩌면 불가능한 작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작업을 바라보면서 밀려오는 좌절감은 내면에서의 산에 대한 정복욕구의 또 다른 표현이라는 것을 알았다. 산의 정상에 올랐다고 해서 산을 정복했다고 말 할 수 없는 것처럼 작업에 산을 표현했다고 해서 내가 그 산을 다 알고 그렸다고 말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렇게 좌절한 내 모습을 반영하듯 작업에는 산을 형성하는 빽빽한 나무숲이 곧잘 등장한다. 이 숲이 나를 집어삼키기라도 한 것처럼 나를 둘러싸고 있다. 그리고 이를 헤쳐나가기라도 할 듯 산과 숲에는 길이 있다. 어디론가 향하는 길이 꼭 있다. 그 길이 어디로 통하는지는 본인도 알지 못한다. 그저 길이 있다는 것만으로 한 줌 위안을 삼을 뿐이다.
그러나 작업에서처럼 나는 산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산은 결코 나를 자기 안에 가두어두지 않았다. 산은 그저 묵묵히 내 스스로 길을 발견하고 문제를 해결하기를 기다리며 나를 품고 있었던 것이다.
산은 항상 거기에 그렇게 있었다.
산에서 길을 잃고 헤맬 때 느꼈던 당혹스런 마음을 비롯한 여러 가지 감정들과 정상에 오르는 기쁨도 모두 내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인 것이다.
이제는 내가 보았던 산의 이미지를 강박적으로 담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내가 느꼈던 산의 이미지를 담을 수 있는 만큼만 넉넉하게 표현하고자 한다. 길이 있지 않아도 나를 품고 있는 산의 너그러운 모습을 느낄 수 있으면 그만이다. 정상에 다다르지 않아도 산을 느끼며 오르는 것에 만족한다면 어느 때에 산은 내게 정상에서의 기쁨을 선물로 준다. 이 모든 것을 깨닫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다.
이제 산을 다시 오르려 한다.’
- 작가 노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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