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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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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은밀한 소통



박영훈은 모호한 언어를 사용한다. 그는 그것을 모호한 채로 둘 때 폭넓은 ‘시적 지평’을 발견하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의 작품 역시 그렇다. 그의 작품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모호한 경계 혹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의해 환기되는 긴밀한 긴장관계를 역설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형식적으로는 모호함으로 가장했지만, 내용적으로는 아주 단순하고 명쾌한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박영훈의 이번 작업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뉘어진다. 첫 번째 방에서는 점묘 초상화 시리즈가 선보인다. 이 초상화는 가까이에서 보면 수많은 점들의 집합으로 보이지만, 멀리 떨어져서 보면 하나의 인물의 형태로 드러난다. 이 작품은 인물 사진을 캐릭터의 특징만을 강조하여 흑백의 음영으로 처리한 후, 그 위에 무수한 점들을 하나씩 옮겨놓음으로써 완성된다. 점들은 디지털상에서 한 점 한 점 개별적으로 제작된 것으로 각자 크기와 모양이 균일하지 않다. 그리하여 비록 수공성의 회화적 터치는 아니지만, 디지털 프로세스가 담보할 수 있는 휴먼터치에 가장 근접한 점묘가 됨으로써 ‘기계적 아우라’에 대한 현대적 담론을 상기시키기에 이른다. 이러한 그의 점묘는 기존 회화에서 나타난 점묘의 일반적인 메커니즘, 예컨대 어떤 사물이나 인물의 형상의 근원을 제공하는 세부구조로서의 그것이 아니다. 그의 점묘는 인물의 윤곽을 형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물을 은밀하게 숨기기 위한 장치로서 기능하며 이로써 착시를 통한 일루전의 매개체가 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점묘초상화는 시각적 즐거움과 동시에 감각적인 신경을 혼란시키며 자극시킨다는 점에서 옵아트를 연상시키지만, 눈의 착시현상에 의한 ‘움직임’의 인상을 창조하는 옵아트와는 전적으로 구별된다.




점묘초상화 옆에는 그 인물과 관련 있는 숫자 혹은 연도가 들어있는 또 하나의 평면이 짝을 이루어 설치된다. 흰색 바탕에 흰색 숫자, 파란색 바탕에 파란색 숫자 등 마치 색면추상을 연상시키는 이 화면은 점묘초상화와 상반되는 형식미학을 노정한다. 그러니까 점묘초상화가 그 인물이 누구인지를 단박에 인지하지 못하도록, 어느 정도의 물리적 거리를 확보해야만 그 모습을 드러내도록 했다면, 색면회화는 오히려 아주 가까이에서 보아야만 묻혀있듯 도드라진 형상의 디테일을 가늠할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따라서 이 두 가지 방법론은 일종의 상호보족적인 변증법적 관계로 잘 맞물려있음을 알 수 있다. 실상 이런 형식적인 방법론은 박영훈이 평소 생각해 오던 ‘관계'에 대한 그만의 실천적 레토릭이 그대로 반영된 것으로서 내용(주제) 그 자체에 다름 아니다.
어쨌거나 텅 비어 있는 캔버스를 보는 듯 단순해 보이는 그의 작품은 처음에 관자에게 무엇을 보아야 할지 망설이게 할 수 있다. 단순한 것 안에서 다양성을 인식하기 위해서 관람자는 표면을 면밀히 관찰하기도 할 것이며, 때론 관조적 거리를 유지하며 고요의 상태에 빠지기도 할 것이다. 작가만의 고유한 내재적 제스처의 산물인 이 작품들은 아마 가장 적게 말하는 방식을 택함으로써 가장 폭넓은 소통에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는 평소의 믿음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바로 박영훈이 인간과 사물의 관계에서 바라는 내밀한 소통의 방식인 것이다.




두 번째 방에서 보여진 설치작품은 인간복제에 관한 메시지를 가시화하고 있다. 양의 복제가 인간복제로 이루어지는 혁명적 사건은 그에게 있어 인류 최대의 위기로 여겨진다. 그는 인간의 정신성(spirituality)의 최전선에 선 작가로서, 이 위기상황에 내재된 인간의 구조적 모순들을 해결할 수 있을 지에 대해 회의에 가득 찬 시선을 보낸다. 작가는 먼저 거울과 같은 효과를 내는 수 백 장의 얇은 수퍼미러를 사용, 음각하듯 양의 실루엣을 만든다. 한 장 한 장의 수퍼미러는 마치 복제된 세포처럼 양을 구성하는 조직이 된다. 수퍼미러가 지닌 메탈릭한 색채와 질감은 세련되고 강력한 기계적 감수성을 물씬 풍기며, 이는 곧 이어질 인간복제가 야기하는 탈인간화에 대한 일종의 경고를 의미하게 된다. 또한 양의 이미지는 디지털로 복제된 인간 이미지로 이어진다. 즉 하나의 인간 형상이 갤러리 공간의 어디에선가 불쑥 튀어나와 수많은 인간 형상으로 증식되어 징그러울 만큼 꼬물거리며 움직인다. 그것은 그저 인간과 같은 형상적 유사성만을 보여주기 위해 검은 실루엣으로 표현되며, 자신이 만든 분신에 자신이 발목 잡히듯 모두 하나의 끈으로 연결된다. 그것들은 하나의 개체가 다른 하나의 개체로 자동 복제되는 것 같은 인상을 주며, 마치 등뒤에서 스물거리며 기어다니는 섬뜩한 벌레처럼 기이한 익명의 존재들로 부각된다. 지금까지 신의 영역으로 금기시되어 오던 인간복제는 어쩌면 인류역사의 진화를 의미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그것이 가져다 줄 폐해가 그것의 필요성 이상으로 훨씬 심각한 양상으로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조형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박영훈의 작품은 아이디어에 근간한 현대작가의 작업이 그렇듯 매우 분명한 개념 설정과 더불어 확고한 재료의 선택 그리고 높은 완성도를 지닌다. 이처럼 박영훈을 포함한 오늘의 젊은 작가들은 아이디어를 조직하고 재료를 가공하는 일을 작업의 가장 주요한 관건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따라서 아이디어가 사유의 차원으로 상승되기까지는 지난한 자기 실험과 단련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아이디어는 재료와 쉽게 만나 새로운 방식으로 처리되고. 그것은 그 작가만의 고유한 조형개념의 탄생으로 치부되는 경향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들은 진리가 무엇보다 새로움에, 재료를 조직하는 새로운 방식에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이는 20세기 초반부터 작금에 이르기까지 불변의 진리처럼 되어버린 아방가르드의 미적 확신의 표현이다. 그러나 이런 작업 경향은 형식과 그 재료에 대한 아이디어의 산발적인 번뜩임이 작품의 핵심(본질)을 대표하는 것처럼 과장되어 드러날 수 있다는 점에서, 작품이 부여할 수 있는 다차원적인 내러티브와 풍부한 메시지를 가려버릴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올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월드시네마’ 부문 첫 회고전의 감독으로 선정된, 내 영화사전에도 어김없이 거장으로 자리매김된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영화들은 오늘날의 작가들에게 시사할만한 핵심적 화두를 던져준다. 그는 진정한 예술이란 향유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철학적 사유의 대상이어야 함을 영상을 통해 철저히 보여준다. 예컨대 그의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진정한 예술이란 단번에 완벽한 이해를 요구하며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체험과 연륜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되어지는 것이며, 복합적이고 중층적으로 해석가능한 것이어야 하고, 어쩌면 절대로 해석가능하지 않은 비의적인 것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심장하게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는 박영훈과 같이 내밀한 소통을 통해 인간과의 화해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젊은 작가뿐 아니라 예술을 통해 정신적 진화를 꿈꾸는 모든 이에게 해당되는 묵시적 메타포가 아닐까?

유경희│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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