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경호의 작업은 어두움과 침묵 속에서 더욱 가능한 것이 된다. 그의 세계를 지탱하는 이미지는 거의 모두 밤의 요인들로서, 고작 창가에서 보이는 보름달이거나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의 그림자들이다. 거기 어디에도 낮의 잔영들, 백주의 소음, 도시적 흥분 같은 것들은 없다. 자극적인 이념이나 선동들은 물론이고, 윤기가 도는 담론의 단초랄 것조차 딱히 눈에 띠지 않는다. 그의 세계는 자극적이거나 현란한 일체의 시,청각적 소란함으로부터 차단되어 있다. 그곳에서 우린 밤의 대기가 만들어내는, 어떤 명상적 단절을 돌아나오는 ‘맑은 침묵’을 듣는다.
나뭇가지와 보름달엔 약간의 미동이 가미되곤 한다. 주기적으로 수면에 가해지도록 되어있는 자극들 때문이다. 예컨대 경미하게 동심원을 그리는 물살로 인해 나뭇가지는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듯 하고, 달은 경미하게 출렁인다. 하지만 실인즉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것이 아니다. 물론 하늘에 걸린 달이 출렁거릴 수도 없을 터이다. 여기에 ‘시적(詩的)’이랄 수 있는 어떤 역설이 개입한다. 사실, 이미지들의 움직임처럼 보이는 것은 전적으로 그 이미지들이 굴절반사된 수면의 움직임일 뿐이다. 즉, 하늘에 뜬 보름달은 작가가 소묘한 이미지가 수면 위에 투사되고 다시 반사되면서 만들어진 이차 이미지인 것이다. 이로 인해 우린 호수에 비친 달을 (호수의 수면에서가 아니라)하늘에서 보게 되는 ‘신비로운 역설’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고경호가 공중에 띄운 달은 너무도 진짜 같아 보인다. 이 ‘신비로움’과 사실성의, 상상과 실사의 우호적인 결합이야말로 고경호의 작업이 지니는 간과할 수 없는 매력이다.
작가의 작업에서 주목해야 할 또 하나는 ‘수면(水面)’이라는 천연의 매체(natural medium)다. 건조하게 진술하자면, 이것은 작가가 감산혼합을 가산혼합으로-즉 색을 빛으로- 변환시키는 동시에 투사된 이미지에 움직임을 부여하기 위해 고안한 일종의 아날로그적 매개 장치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다만 함몰된 웅덩이에 고인 물일뿐, 딱히 매체라 할 수도 없을 그것의 특성을 반영하면서 작가의 소묘는 훨씬 덜 소묘적이며 더 실체에 가까운 것이 된다. 첨예한 윤곽이 부드럽게 풀리고, 이미지엔 매체의 명상적 속성이 고스란히 담긴다. 이런 맥락에서, 작가의 이 천연매체를 혹 맥루한의 통찰을 시적으로 번안하는 장치쯤으로 정의할 수도 있지 않을까!
고경호의 작업을 대하는 것은 언젠가 마음으로 접어두었던 적이 있는, 오랜 세월 잊었던 한 편의 서정시를 대하는 것만큼 다감한 일이다. 그래서인지 조금도 어렵거나 부담스럽지 않다. 여기서 미술을 고차 미,적분 같은 것으로 만든 다음, 그 앞에서 골머리를 쥐어뜯으며 인식의 재무장이나 무장해제 같은 비릿한 담화들이나 불러들이는 관습은 필요 없다. 수많은 형식주의자들과 형식파괴주의자들은 여전히 관객의 시선을 ‘훈련시키는 것’에서 자신들의 미학적 사명감을 확인하려 들 것이다. 하지만, 고경호의 세계는 오히려 자극에 지친 시선들을 쉬게 만든다.
그러한 공허한 지적 너스레와 자가당착 없이도, 아니 오히려 그래서 더 작가의 세계는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힘, 공감을 만들어내는 어떤 울림을 갖는다. 그렇다면, 이 힘의 출처는? 답은 의외로 단순하다.(고경호의 세계에서 어려운 것이라곤 없다) 그것은 그의 세계가 지극히 자명하면서도 오늘날 놀랍게도 많은 정신들에게 망각되고 있는 다음의 사실을 꼭 붙잡고 놓지 않고 있는 데에 있다 : “사람들은 여전히 어떤 ‘큰 이야기(Grand history)’를 듣고 싶어 한다.”
큰 이야기라니? 거대담화(meta-discours)가 와해된 지가 언젠데 웬 시대착온가를 반문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 같은 질문엔 이미 극히 사적인 신변잡기들만을 신봉하는, 예컨대 바스키야의 캐딜락이나 트레시 예민과 동침한 남자들, 요셉 보이스의 비행경력 같은 것들이나 시시콜콜 따지는 포스트시대의 강령이 깊게 침투해 있다. 어떻든, 현대미술이 처한 심각한 딜레머 중 하나는 자신을 넘어서는 모든 이야기를 금기시하고서, 저마다 자신의 사생활만을 (듣는 이도 없이) 읊어대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다시 말하거니와 사람들은 여전히 어떤 ‘큰 이야기(Grand history)’를 듣고 싶어 한다. 신, 진리, 초월, 자유, 해방 같은..... 일테면 자신을 넘어서는 제 3의 초월적인 전망, 그것이 아니라면 자신의 내부에서 결코 스스로 생성해낼 수 없는 존재와 실존의 인도를 가슴에 품고 싶어 하는 것이다.(영혼과 가슴은 마른 빵처럼 메말라버린 사회주의 이념과 유물론자 동지들을 떠올릴 필요는 없다)
고경호의 세계를 지적이거나 정서적 파격을 누락한 미적 시시함에 견줄까? 하지만, 지구촌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바로 그 보름달 밑에서, 그리고 그렇게 을씨년스러운 앙상한 가지들을 응시하면서 과거의 회한에 잠기거나 현재의 역경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삶의 시름을 달래고 애환을 어루만지며, 또 새로이 다가올 날들을 다짐하곤 하는가. 또한 이 모든 것들이 우리 자신들의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누가 부인할까. 고경호의 보름달과 나뭇가지가 우리의 가슴으로 조용하게 다가오는 ‘큰 이야기’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시 서문: 명상(瞑想)과 시(時)로 조율된 작으면서도 ‘큰 이야기(Grand history)’
- 심상용(미술사학박사, 미술평론)
전시작가: 고경호
전시장소: 금산갤러리/ 서울시 종로구 소격동 66 Tel: 735-6317/8 Fax: 735-6319
전시일정: 2004년 11월 10일(수) – 11월 20일(토)
전시시간: 평일_ 오전 10시-오후 6시 30분 / 일요일_ 오전 10시-오후 6시
오프닝 리셉션 일시: 2004년 11월 10일 (수) 오후 5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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