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정보
종이를 이용한 평면, 설치작품 30여점 전시
'결' 과 '쌓음'의 미학
- 종이, 그 친숙한 사물에 대한 사고에 전복 -
전통적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의 문제는 예술가들에 있어서 일관된 관심거리가 되어 왔다. 예술양식의 변천도 크게 보면 결국 대상을 바라보는 예술가의 관점변화에 따른 것이다. 예술가들은 기존에 형성된 관념의 틀을 벗어나는데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다. 일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곧 새로운 예술작품, 새로운 담론의 형성을 의미하게 된다.
이승오 역시 이러한 관점의 변화를 시도한 예를 보여주는 작가로 먼저 언급해야겠다. 종이라는 결코 특별하거나 탁월한 재료를 선택하지 않은 그이지만 이 전시에서 그가 보여주고 하는 것은 바로 관점의 문제다. 보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사물을 바라보는 ‘방향’의 문제인데 이 글에서는 작가가 어떠한 관점에서 나름의 새로운 시각을 형성하고 있는지에 대한 논의의 자리가 될 것이다.
종이, 재료에서 작품으로 이승오의 작품은 과거에나 지금에나 자연미에 대한 성찰로 일관해오고 있다. 대상이 주는 고유의 아름다움에서 굳이 벗어나고 싶지 않기에 그 관심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있다고 보여 진다. 한동안 그는 대상을 재현(모방)한다는 전통적이며 표준적인 질의와 답변을 지속했다. 당연히 그는 ‘그린다’라는 문제에 애착을 보여왔으며, 성실한 묘사의 범례를 보여 왔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재현의 문제는 늘 새로운 차원의 접근 책이 필요한 일이었다. 곰브리치가 지적한 대로 회화의 지속적인 재현을 위해서는 새로운 시각적 리얼리티를 상상하는 일이 중요하게 된 것이다. 그는 1990년대 후반부터 사물의 직접적인 표상이라는 오랫동안의 제작방식을 접고서 새로운 변화를 맞이한다. 그 변화란 일종의 자아발견으로 보아야 하는데, 평범한 종이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물성을 발견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한다.
지난 1997-98년 <개인전 >에서 보여 지듯 그는 종이매체에 관심을 가지고 설치형태의 실험적인 작업을 시도하였다. 여기서 그는 종이의 ‘쌓는다’라는 방식을 처음 선보이게 되며, 이러한 형식실험은 새로운 그리기 작업에 대한 초석을 마련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아서 단토의 지적처럼 예술작품의 외양이 문제가 아니라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발견’으로써 그 의미를 지닌다고 보겠다. 이 때의 발견은 너무 익숙해서 관심을 두지 않는 사물에 대한 가치를 부여하는 일이었다.
그가 바라보는 종이는 일반적인 눈높이에서의 종이가 아니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종이의 쌓음(績)으로 인해 발생하는 두께다. 결국 사각(斜角)에서 종이를 바라본다는 것인데 이러한 사물을 보는 방식을 두고서 정작 작가는, “자신의 기법이 일종의 열등감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다”고 털어 놓는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회화의 방식을 개발할 필요성을 가졌다는 이야기다. 결과적으로 그는 사물에 대한 통상적인 시각의 전복을 시도하게 되었다. 그동안 그는 종이를 이용하여 형상을 집요하게 그려내었다면 이제 종이 그 자체가 작품이 된 것이다.
종이의 ‘결’ 과 ‘쌓음’ 종이는 외부환경이나 조건에 의해 쉽게 변형되는 단점도 있지만 그것이 또한 장점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특성을 연구한 작가는 결과 색감, 그리고 가공의 방법이나 정도에 따라 종이의 성격이 전혀 달라진다는 사실을 깨닫고 여러 가지 기술적인 연구를 시도하게 된다.
작품 제작을 위한 그의 작업 경로는 그리 단순치 않다. 우선 그의 작업은 편집증에 가까울 정도로 수많은 종이의 수집으로부터 시작되어 분류, 불림, 건조, 절단, 가공 등의 여러 단계를 거친다. 또한 단일한 종류만 가지고 작업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형태와 특성을 갖춘 종이를 선택하기에 정교한 작업과정이 뒤따른다.
이렇게 여러 공정경로를 거친 종이는 이미 건축자재와 같다. 이어서 건조된 종이와 가공을 위한 도구들과의 힘겨운 싸움이 시작되는데, 종이를 썰어서 쌓아올리기도 하고 때로는 겹겹이 말아서 표현하기도 한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그의 작업은 엄밀히 평면이라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종이의 쌓음과 요철의 정도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연출되어 오히려 회화와 조각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당연히 그의 작업은 많은 양의 종이를 필요로 하는데 다행히 그의 환경은 온갖 종이에 노출되어 있다. 그리고 이 종이들은 그의 교사신분과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다. 가령 평가 자료로 활용되는 OMR 카드용지, 미술시간에 쓰이는 색도화지나 스케치북, 심지어 버려진 각종 교과서 등도 그에게는 더없이 훌륭한 재료가 된다.
동시에 이 종이들은 마치 섬세한 제품이 생산되기를 기다리는 날 재료와 같다. 이 종이들은 제 나름의 용도와 역할이 끝난 무기력한 생명들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물질이 변화해나가는 과정이다. 그 변화의 과정에는 생명의 거듭남이라는 의미가 부여된다. 이내 사라지거나 재생지로 활용될 운명에서 예술작품의 지위로의 새 생명을 얻게 된 것이다.
1998년도 <동아미술제> 수상작 <적 績> 역시 버려진 도화지와 신문지 등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그는 이를 다시 접착제로 굳혀 가공한 다음 묵직한 철제 프레임에 고정시킨 오브제로 올려놓았다. 몇 개의 단순한 색채와 면의 분할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두꺼운 종이의 결과 결 사이에서 발생하는 리듬감이 주축이 되고 있다. 여기서 그는 하나의 형상을 담는다라기 보다는 종이라는 생 재료를 그대로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대지에 볏단을 쌓아놓은 모습을 연상시키는 이 작품은 기하학적이고 추상적인 요소를 다분히 포함하고 있으나, 자연의 형태를 기본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초기의 관심사가 그대로 이어짐을 알 수 있다. 이렇듯 비록 예전작업에 비해 형상이 매우 거칠게 다루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그는 형상에 대한 굳건한 신뢰와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그가 한동안 작품의 대상이 되는 자연을 분석적으로 바라보았다면 이제는 자연에 대한 통합적인 시각을 열어 보여주고 있다. 대지가 주는 마티에르는 종이의 결로 대체되었으며, 구체적인 사물은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로 단순화 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를 잘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사물의 단순화라는 그의 관점은 향후 전개되는 작업과정과 긴밀히 연계되어 있어 더욱 흥미롭다.
종이작업의 전개그의 작품은 거리를 두고 보는 것과 가까이에서 보는 것 사이에 현저한 지각적 차이를 준다. 특히 그의 색채를 바라보면 우리 눈에는 마치 오일이나 아크릴 같은 재료로 인식된다. 실제로 그 역시 인쇄된 종이 고유의 색상단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눈에는 일종의 채색된 화면으로 보이는데, 일종의 착시현상에 노출되는 것이다. 이를 두고 작가는 자신의 종이를 ‘안료화’하였다고 설명한다.
작품 <결2003>은 색채와 질감이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상당한 일루젼 효과를 가져다주는 작품이다. 시지각적 유희를 가져다주는 이 종이의 단면은 마치 윌렘 드 쿠닝Willem De Kooning을 연상시키는데, 초기의 비교적 단순한 색조에서부터 출발한 종이기법은 이제는 다채로운 방식으로 전개되기에 이른 것이다. 가령, 색상이나 종이의 결이나 두께의 조절, 종이 표면의 가공의 정도나 수준이 보다 정교하게 변화되었다. 또한 종이의 질감과 양감, 그리고 리듬의 변화에 이르기까지 자유로운 표현이 더해져서 일종의 생동감, 생명력이 지배하는 회화공간으로 유도되고 있다.
상당부분 형식적인 요소가 강조된 듯하지만 실상 그의 작품에는 늘 자연의 형상이 드리워져 있다. 가령 그의 화면에는 하늘, 들판 그리고 구릉을 담는 광활한 대지가 등장하고 있으며 때로는 도시-세련된 외관이 아닌 다소 개발이 덜 된 듯한 도시다-의 풍경이 담기기도 한다. 이러한 자연대상을 표현함에 있어 그의 시점변화도 논의될 만하다. 그가 종이의 측면을 바라보면서 표현의 범위를 넓힌 것과 같이 화면을 구성하는데 있어서도 시점의 변화를 줌으로써 작품의 다양성에 기여하고 있다. 가령 작품 <적績 1999>의 경우, 부감법(俯瞰法)을 구사하여 자연의 풍경을 담은 작품이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다 본 것과도 같은 땅의 모습을 그린 이 작품은 뚜렷한 형상을 부여할 필요가 없이 면과 면, 결과 결을 드러내어 자연이 만들어낸 마티에르에만 접근한 모습이다. 들여다보면, 그 안에 남겨진 여러 가지 자유로운 흔적들이 갖가지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일반적으로 구체적인 형상에서 벗어날 때 보다 자유로운 표현적 외도가 가능해지게 되는 것이다. 가령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특정한 사물이나 대상을 지칭하지 않고 주위의 사물과 함께 융화되어버리는 형상이 있다. 곧 재즈 음악에서의 ‘스캣(scat)'과도 같이 그 흐름을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얼버무리는 테크닉이 동원되기도 한다. 이러한 요소는 그 자체적인 의미보다는 화면의 한 구성방식으로 십분 활용되는 예가 된다.
이와 함께 그의 작업에 등장하는 요소가 부분의 절단과 통합방식이다. 그는 화면의 필요한 부분만 선택하여 이어 붙인다. 또는 축소 조정하기도 한다. 이렇게 선택된 부분들 간에는 상호적인 유기적 통합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같이 무한확대와 축소가 가능한 형태로 제작되는 방식은 마치 잭슨 폴록의 방식과 유사하다. 임의의 부분을 잘라내거나 선택할 수 있는, 그래서 어느 부분을 잘라 배치하여도 작품의 생명이 연속되는 올 오버 페인팅의 속성과 닮아있다.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대작 <적績 2004>과 형식면에서 유사하다. 가로 폭이 약25미터에 이르는 이 작품은 마찬가지로 주어진 전시공간 여건에 따라 자유자재로 연출할 수 있다. 그러나 작가는 이러한 방식이 추상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철저한 구상적 발상에서 나온 것임을 밝힌다. 즉, 그는 사실회화에 몰입할 당시에도 화면의 부분 부분을 잘라 하나의 화면을 만들었던 점을 회상한다. 곧 전체 화면에서 필요한 부분만을 선택하여 프레임화 했던 방식이다. 바로 이 같은 방법이 축적된 종이작업에서도 연계되어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근래 들어 한국적 미감의 표현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우연성’의 요소를 자신의 작업성향에 추가한다. <결 2004>은 종이와 함께 흙을 용해하여 굳혀 만든 작품이다. 이러한 경향의 작업들은 마치 전통 분청사기에서 드러나는 색채와도 닮아있다. 마치 백토나 황토에서 얻을 수 있는 고졸한 맛을 풍긴다.
정리해보면 작가 이승오는 몇 가지 관점에서의 조형방식을 구현한다. 우선, 종이를 통한 설치와 평면의 유연한 연출을 들 수 있다. 이와 함께 색채와 선이 만들어내는 일루젼 효과와 시점의 변화를 통한 화면구성 방식의 다양화가 거론될 수 있겠다 이어서 화면의 선택에 따른 올 오버 페인팅적인 성향, 우연성을 통한 질박한 미감을 구하는 작업이 병행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제작방식의 중심에는 우리 미술의 정체성이라는 문제가 잠복되어 있었다고 보여 진다. 그가 종이 쌓기를 통하여 얻고자 한 의도도 결국 우리의 미감에 맞는 회화를 상상하고 발견하는 일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민화의 방법적 전환최근 들어 작가는 새로운 한국적 미감을 만들어내는데 골몰하고 있다. 그가 우리 전통적 인 아름다움과 관련하여 접근한 것이 다름 아닌 민화작업이다. 민화의 독특한 조형성은 다양한 형태로 현대 미술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어왔는데 이승오 역시 기존의 종이기법을 통하여 새로운 차원으로 해석된 민화를 제시해 보인다.
그는 종이 쌓기의 기술적 숙련을 바탕으로 보다 풍부한 서정성을 갖춘 민화의 요소를 선보이기에 이른다. 앞서 작가가 종이의 면을 결합하여 색채의 일루젼을 여는데 성공했다면 여기서는 민화에 나타나는 선을 일종의 트릭처럼 제시한다. 마치 단층구조와도 같이 절삭된 종이단면은 이리저리 구부려져서 일종의 작은 형틀이 되고, 그리지 않은 선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시각에는 마치 그려진 것처럼 보여 지게 된다. 다시 말하면 종이의 표면이 아닌 측면이 드로잉의 주체가 되는 셈이다. 이전의 다른 작업과는 달리 민화작업에 이르러서는 종이는 곧 민화의 선묘를 이끌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된다. 결과적으로 그의 선묘는 그려진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라 하겠는데, 민화에서 발견되는 다소 어눌하고 덜 숙성된 듯한 맛을 전달하는데 효율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결국 민화에서 드러나는 속성들, 가령 특출한 기법이나 화려한 기교를 수반하지 않음으로 해서 발생하는 편안함을 추구하려는 작가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동시에 꾸밈없는 서민적 삶을 반영하는 민화의 정신과도 매우 적절히 연계되고 있다.
또한 민화에 즐겨 등장하는 해학과 풍자적인 요소는 그의 작업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특히 화조화나 동물화, 호랑화 등의 표현은 민화의 미감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해석을 보여준다. 곧 세부적인 묘사를 과감히 제거하여 단순화시키는 방식으로, 그의 이러한 단순미는 천진하고 넉넉한 민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며, 사물을 더욱 단순화시켜 인공적인 표현행위를 가급적 절제하고자 하는 그의 의도를 느낄 수 있다. 작가는 이 같은 자신의 작업에 대해 대교약졸(大巧若拙)이라는 단어로 함축한다. 자신의 작업에서는 미성숙과 어수룩함이 중시된다는 말이다. 그래서인지 최근의 작품들은 마무리가 덜 된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데, 이러한 결과는 예전의 정교한 사물의 묘사와는 대조적으로 여유로움을 읽을 수 있게 한다.
아울러 그의 민화는 닮음과 닮지 않음의 경계에 서있다. 그의 작업의 기초는 기존의 민화를 차용함으로써 시작되지만 그 작업결과는 이미 원본을 떠나 있다. 실제로 작가가 제작한 민화의 결과물만을 놓고 보면 독립적인 가치를 지닌 작품으로 인식된다. 즉 그 연관성을 유추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인데, 이에 대해 작가는, 닮아 있으면서도 닮지 않았다는 것은 있음과 없음을 동시에 말하는 것으로 이것이 우리의 미감이라고 덧붙인다.
그의 작업을 되돌아보면 철저한 그리기에서부터 출발하여 실험적 종이 쌓기 작업을 거쳐 새롭게 구성한 민화작업에 까지 이르게 된다. 얼핏 보면 여러 경로를 거친 것처럼 비추어지지만, 그의 작업에서 자연미에 대한 일관성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리고 사물에 대한 호기심과 분석, 그리고 구축성이 그의 작업을 뒷받침하는 조형요소가 될 것이다. 지금껏 작가가 보여준 바에 의하면 그의 인식과 보는 방식은 유동성을 가진다. 사물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본다는 그 시각적 유동성은 고정된 바라보기 방식을 거부하고 종이를 즉물적으로 접근한다는 데에서 그의 특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묘사의 대상으로서가 아닌 실재의 종이를 통한 형상의 구축은 그 종이의 익명성을 개성적인 오브제로 끌어올리는데 기여했다고 보아야겠다. 결국 종이작업의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었다고 하겠는데, 그의 의식 변화에 따라 또 다른 변화의 개연성이 항상 잠복되어 있다고 보여 진다.
달팽이가 지나간 길에는 진액이 남겨지듯이 그는 결코 적지 않은 양의 흔적을 남겨놓았다. 그가 남긴 흔적은 자신의 구체적인 삶과 관계된 시각적 다변화를 정확히 보여주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우리가 확인 해볼 일은 그가 다루고 있는 종이의 적층(績層), 그 ‘흔적’이 암시하는 무한한 가능성이다.
감윤조│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큐레이터
장소: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5전시실(3층) Tel. 02) 580-1515
- 개관시간 : 11:00-19:00 / 관람요금 : 무료
주 최 : 예술의전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