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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변적 사유를 통한 삶의 자화경 (自畵鏡) 일반적으로 예술가들은 자신의 작품에서 현실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그 반대의 입장도 있다. 곧 일상세계에서 벗어나 자신을 하나의 우주의 중심축에 놓고 세상을 관조하려는 경우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박도철은 후자의 경우에 근접하는 유형이라 하겠는데, 그간 보여 왔던 다소 사유적인 경향의 작품들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그는 자신의 정서 내에 여러 겹의 작업성향을 보여주고 있다. 세계를 바라보는 데에 있어서 다소 복합적인 시선을 가진 그는, 이번 전시에서 평면회화에서부터 설치, 사진작업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장르를 선보이고 있다.
그의 작업성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장르 간 상호 교차되는 조형적 특성을 십분 고려하면서 접근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다소 복잡해 보이는 그의 작업방식이나 연출의도 역시 잠복된 작가의 정신세계와 연관하여 이해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 글에서는 자연의 도상들이 담긴 평면회화, 수많은 몽당연필을 통해 보여주는 설치조각 작품, 마지막으로 그의 종합적인 조형의식이 담긴 사진매체를 다루면서 그가 지닌 ‘생각의 손’에 접근하려 한다.
그림에 담겨진 생명의 소리 지난 전시에서 작가는 자신을 비추는 거울로서의 자아의 문제를 자화경(自畵景)이란 응축된 용어로 내보였던 적이 있다. 이번 전시는 자신에 대한 사유의 범위, 그 중심대상의 범주를 점차 확대시켜나가기에 이른다. 즉 개별적 존재에 관한 페르소나 persona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제시한 예전의 모습에서 비켜나, 여기서는 점차 자신을 제거해 나가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 동안의 작업에서는 자신(自身)이 중심이 되어 주변세계를 사변적으로 해석하였다면 이제는 꽃과 바다, 그리고 각종 도상들이 등장하게 된다. 일종의 전이된 페르소나라고 보아야 할까.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대체물의 근원은 관념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상 속에서 선택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내면에서 발생한 복합적인 충동은 일반적으로 추상성을 지니기 마련인데 그는 주변의 실생활에서 자아를 찾는다. 그것도 아주 구체적 사물을 통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다소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그러나 오히려 이 부분이 그를 이해하는데 효율적인 접근 책이 될 수 있다. 그의 회화에 등장하는 도상들 - 꽃, 인형, 나무, 바다, 불꽃 등은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이어주는 일종의 영매(靈媒)역할을 하고 있다. 동시에 이러한 도상들은 그의 정신 속에서 작용하는 자연의 생명성에 대한 상징체이며 자신과 상대하는 또 하나의 개별성을 가진 자아로 작용한다.
우선 그의 회화에서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크고 작은 꽃인데, 이 꽃은 전통적인 관점에서 아름다운 대상으로서의 역할을 소화해내지 못하고 있다. 그는 수백 년 간 이어져 내려온 꽃의 해석에서 벗어나 간략한 붓 터치의 흔적으로, 그것도 대략적 이미지만을 제시해 놓는다.
그는 마치 물감튜브에서 캔버스로 바로 가져간 인상파나 더 나아가 신인상파의 방식으로 색채를 해석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그가 대상의 묘사 보다는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그의 목적은 꽃의 형상과 그 꽃의 움직임을 통하여 생명에 대한 숭고함을 드러내는데 있다.
작가는 개화(開花)가 주는 생명의 발아야말로 자연 속에서 다시 자신을 응시할 수 있게 하는 매개체임을 느낀다. 일종의 언어유희적 측면도 있으나 그가 표현한 불꽃도 비슷한 관점에서 다루어진다. 꽃과 불꽃은 별개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를 담는 등가물이 된다. 이외의 작품에서도 보여주듯 진부한 사실에 대한 노골적인 관심은 그의 작업을 환기시키는 주된 요소라 하겠다.
그의 회화는 어수룩하고 단순하며, 심지어 구상과 추상을 오가기도 한다. 표현의 한계를 설정하는 일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그의 회화는 마치 습작과도 같이 뭔가 채워지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미술가들의 일차적 관심사는 대상을 실물과 흡사하게 그려내는 일일 텐데 그의 인물, 풍경, 정물, 그리고 간간이 등장하는 도상들의 표현방법은 어눌하기 짝이 없다.
심지어 추상성이 강한 선묘들의 표현조차 마무리가 덜 된 듯하다. 그러나 그의 시선이 외부세계가 아닌 자신의 내부로 향해 있고, 그 사물에 깃든 생명의 소리를 듣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가 이 같은 절제된 표현형식에 이르게 한다는 생각이다. 그 내면의 소리는 회화와 함께 설치작업의 유형에서도 연계되어 나타나게 된다.
픽셀단위의 연필이 갖는 공간 확장력에 주목그의 연필은 커봐야 5센티미터 내외인 작은 오브제인데, 나무막대기나 가는 파이프에 지점토와 함께 고정되어 전시 공간에 설치된다. 그의 시선에 들어온 연필은 이미 기능적 속성에서 벗어나 하나의 자연 원리를 내포한 발견된 오브제이다. 연필에 입혀진 색채는 화려한 스펙트럼을 연상시키며 빛을 받는 정도나 각도에 따라 발생하는 색채의 진동은 반 고흐의 강렬한 붓 터치를 연상케 한다. 또한 설치방법에 따라 그 방향이 주는 운동감은 생동하는 물고기의 비늘이 되고 움직임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점(點)과 선의 유영, 이합집산에 따른 리듬감은 전시장 가운데에 위치한 일종의 공간 드로잉으로 역할을 하게 된다.
그가 연필을 새롭게 발견한 것은 우연한 일로 인하였지만 중요한 것은 평면회화에서의 색채문제가 이 같이 3차원 공간에서 새롭게 확장 되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의 작업이 입체적이라는 특성을 고려한다면 전혀 색다른 시도는 아닐 것이다. 이번 전시에 처음 선보이는 그의 연필설치는 기존 작업과의 밀접한 연계성을 가진다. 곧 색채의 진동과 사물의 떨림이 그의 평면회화에서 다루어졌다면 연필을 이용한 조각설치작업에서도 이와 유사한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이같은 설치작업에 대한 그의 잠재적 관심은 첫 개인전에서 선보인 고흐의 연구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그만큼 그는 예나 지금이나 색채가 주는 지각심리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즉, 색채와 색채가 만나 서로 융합내지 병치된 모습을 드러내는 등의 상호 관계성에 대한 이야기는 그의 말처럼 색채가 주는 생동감을 자신의 작업 속에 새로운 형태로 불어넣고자 하는 의도를 읽을 수 있게 한다.
이번에 선보이는 연필 설치작업은 학생들이 실제 쓰다 버리는 몽당연필을 장기간에 걸쳐 수거한 것으로, 아이들의 순박함을 대변하고, 수정이 가능하다는 고유의 특성 때문에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일상세계에서 분리된 이 재활용 되어진 연필은 지각자로 하여금 그 본래의 환경에서 이탈된 오브제로 비춰지게 한다. 그는 그림이나 학습의 도구로 기능해야 하는, 즉 응당 그 용도에 걸맞는 위치에 있어야 하는 연필들을 일상 밖으로 끄집어내어 지각의 대상으로, 사유의 대상으로서의 생명력을 불어 넣은 것이다.
그의 작업은 수잔 랭거의 지적처럼 ‘현실로 부터의 타자성(otherness)-작품을 구성하는 음향의 흐름, 사물, 행동, 진술을 함축하는 가상이 갖는 인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 가상적 인상은 연필이 주는 이미지와 관계가 있는데, 연필 자체가 가지는 그 방향성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결국 이 연필은 이미 방향 지시형 타이포그래피가 됨과 동시에 그 지시로 인하여 리듬감, 곧 운율을 형성하게 된다.
이렇게 모인 연필은 어느 하나라도 닮은 것이 없다. 작가는 이 같은 개별성을 발견하고 자연을 이루는 단위로서 그 의미를 부여한다. 결국 연필개체 하나하나의 집합은 마치 화면을 구성하는 픽셀로 적용될 수 있다. 우리가 시각적으로 접하는 그 입자의 단위는 거의 동일한 형태로 인식되지만 그 크기와 농담, 색감, 윤곽 등이 서로 다르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즉, 개별적인 점과 선이 모여 결국 하나의 상(像)이 맺혀지는 것처럼 그의 연필도 마찬가지다. 연필에 새겨진 각종 흔적들의 개별성은 곧 연필이라고 부르는 사물에 대한 하나의 단위요소로 작용하는 것이다.
더욱이 그 연필은 오랜 시간동안 타자에 의해 마모된 사물이며, 그 내면에는 여러 가지 서술적 내용이 함축되어있다. 곧 갖가지 형태의 그림이나 낙서, 그리고 각종 학습행위가 전제되어 있었던 그 오브제는 이제 용도나 의미를 상실한 사물이다. 그러나 그 속에는 이미 인간의 정신활동 과정이 녹아있다는 점을 작가는 상기시킨다.
동시에 이 연필모음은 자신의 외부를 향해 내지르는 심적인 에너지를 대신한다. 그는 이미 점과 선으로 구성된 평면 드로잉으로 자신의 호흡과 심장의 고동소리를 제시해보인 바 있다. 바로 그 점들이 여기에 선보이는 몽당연필이라는 작은 단위로 대체되었으며 외부에 대한 자신의 관조적 입장으로 다시금 다루어지고 있다. 그 연필 하나하나는 생명이 깃든 개체이자 그 생명을 통합하는 근원이 된다. 설치에서 보여주는 이러한 입장은 그의 사진작업에서도 유사한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다.
낯선 풍경 사진 속 그의 자화경 (自畵鏡) 박도철이 다루는 자연에 대한 관심은 피사체의 선택에 있어서도 동등한 가치를 부여한다. 회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물을 그대로 재현한다는 것이 사진의 일차적인 목표라 한다면 그의 사진 역시 회화와 마찬가지로 정확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지 않다. 카메라는 의도적으로 흔들려져 있고 결과적으로 초점이 흐려진 다소 모호한 풍경을 그는 연출해 낸다.
그의 사진은 친숙한 실제 풍경 속에서 생경한 사물을 만나는 데에서부터 시작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 사물은 우리 주변에서 발견 할 수 있는 친숙한 것이지만 그는 아웃 포커스로 처리하여 대상을 의도적으로 낯설게 보이게 한다. 작가는 전혀 예기치 않았던 사물을 해변이나 대지 위에 위치시켰다. 즉 대상물 원래의 장소성과는 무관하게 놓여진 오브제들은 고유의 기능적 속성과는 상관없이 ‘내던져진 것’이다.
그의 사진이 마치 합성된 것처럼 보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자연을 제외한 중심 피사체는 작가 자신이 직접 촬영현장에 가져가 연출한 것들이다. 가령 사진작업에 등장하는 인형, 황금반지, 우화적 소재의 토끼와 거북 사진 등은 연출에 필요한 하나의 오브제이자 동시에 렌즈를 통해 열어 보이는 또 하나의 우주가 된다. 여기서 그는 친숙함과 낯섦이 만들어내는 불협화음을 자신의 사진에 적극 끌어들인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일종의 균열현상은 도리어 자신이 가지는 삶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항상 그에게 수반되어 나타나는 자연과 자아의 문제, 그리고 우주와의 관계성은 늘 수평적으로 맞물려 있다. 물, 불, 흙이 세계를 이루는 구성요소로 접근한다면 그의 렌즈와 캔버스에는 이 모든 요소가 다 함유된 셈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평면회화와 사진에서는 바다와 불꽃과 대지가 동시에 다루어지고 있어 작가의 개인적 사유를 엿보게 한다.
그는 회화에서 설치로, 다시 설치에서 사진으로 건너오면서도 그 관계성은 여전히 명확하다. 회화에서의 색채감은 연필의 리듬으로, 연필설치의 생명감은 파도의 물결로 대체된다. 그리고 연필의 단위가 주는 입자는 해변 가운데에 하나의 점으로 선택된다. 그리고 사물에 반사되어 나타나는 하이라이트는 마름모꼴이나 육각형을 이루고 있는데, 사물의 최소 단위로써의 도상적 의미를 띤다. 대자연에 존재하는 비가시적인 움직임을 작가는 하나의 점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미 평면회화에서 이와 유사한 도상을 그려내고 있고, 아울러 연필설치 작업에서 자연을 일종의 미립자로 투영한 바 있다. 그가 다루려는 코스모스 cosmos-미시적 세계가 집합된 공간을 다루려는 의지는 <생각의 손>이나 <황금반지> 등의 작품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의 자화경에서의 풍경(landscape)은 사진에 이르러 가상이 아닌 실재의 풍경이 제시된다. 이 풍경은 회화나 사진작업에서 공통적으로 자신의 정체성 문제를 일관되게 다루고 있는데, 세상을 바라보는 존재에 대한 지각이 그의 풍경으로, 혹은 그 풍경 속의 오브제로 대변되고 있는 것이다. 그가 그리는 세계는 논리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서 만들어진 세계다. 그의 작업에 가치를 두자면 이미 형성된 세계가 아니라 새롭게 접근할 수 있는 세계에 대한 상상과 믿음에 기인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와 같이 박도철은 예술이 각 장르에 부여한 개별적인 가치를 동시에 수용하고자 한다. 일견 그의 방식이 작품 제작규범에 대한 기존의 틀을 허무는 일로 비춰질 수도 있겠지만 이번 전시를 계기로 그는 다매체를 수용하는 문제가 자신의 포괄적 해석에 대한 유용한 수단이 됨을 증명해 보인다.
이제 그의 다변적 사유의 작업은 ‘자신을 비추는 자화경(自畵鏡)’의 세계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이다. “예술작품은 세계를 보는 태도를 외형화(外形化)하고 한 문화적 시기의 내면을 표현하며, 우리들의 의식의 흐름을 포착하도록 스스로를 하나의 거울로서 제시한다”는 아서 단토의 해석은 다매체적 표현충동에서 나오는 박도철의 최근 작품세계의 변화를 읽기 위한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감윤조│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