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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ce*c 에서는 2005년도 첫 기획전으로 리메이크 코리아 전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한국 전통미술에 등장하는 대표적 도상들을 차용· 반복하여 현 시대의 인식구조를 통해 재해석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리메이크의 관점에서 소개한다. 리메이크의 과정에서 옛 그림이 지닌 고정된 의미들이 다층적으로 확장되는 변용의 양상이나 시대현상의 메타포로 전통도상이 활용되는 과정, 그리고 현대미술에서의 차용의 의미 등을 전시 작품을 통해 조명해본다.
리메이크란 원작을 차용하여 다시 만든다는 의미로, 영화나 음악에서 흔히 사용되는 용어이다. 일본 만화를 영화 올드 보이로 리메이크 한 것처럼 기존의 작품을 현대적 시각에서 재해석함으로써 그 형식과 내용을 새로운 문맥에서 재탄생시키는 것이다.
시각예술에서 이전의 작품을 인용하여 새로운 방식으로 다시 제작하는 리메이크의 사례는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역사를 지닌다. 르네상스와 신고전주의 미술가는 그리스 미술에 범본과 전형으로서의 권위를 부여하며 부단히 참조하고 인용하였다. 마네(Edward Manet), 피카소(Pablo Picasso), 뒤샹(Marcel Duchamp)에서 최근 레빈(Sherrie Levin)에 이르기까지 많은 현대작가들은 과거 거장들의 작품을 인용하고 작가의 의도에 따라 새롭게 각색함으로써 원작의 원래 의미를 변형하고 확장시켰다. 특히 기존의 이미지를 차용하여 새로운 문맥으로 제시하는 리메이크나 차용(appropriation)의 방법은 원본성이나 오리지널리티의 신화에 의문을 제기하며 포스트모던 시대 미술의 주요한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이번 ‘리메이크 코리아’ 전에 참여한 작가들은 한국미술사에 등장하는 그림들을 작품의 원천으로 삼아 일종의 텍스트로서 참조하고 인용한다. 이들 작가에게 전통 산수화, 화조화, 인물 풍속화, 고분벽화 등은 언제든지 자유롭게 차용할 수 있는 풍부한 저장 목록이 된다. 리메이크 과정에서 옛 그림이 지닌 ‘유일한 원작성’은 새로운 맥락에서 재구성됨으로써 다층적 의미를 획득한다. 새로운 맥락이란 바로 21세기 현재의 시점을 의미한다.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교차하고 고급예술과 대중예술이 넘나들며 고정된 정체성이 와해되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맥락이 리메이크의 과정에 개입하는 것이다. 참여 작가들은 전통의 소재들을 단순히 반복하는 무비판적인 소재주의를 답습하거나 동양적인 정신성ㆍ한국적 정체성과 같은 애매모호한 관념성에 집착하기 보다는, 원작에 동시대적 의미를 적극적으로 투사시켜 원본에서는 기대할 수 없었던 새로운 언어를 현재성의 시각에서 재구조화시킨다. 작가들은 원작을 재구성, 변형, 첨가하는 창조적 주석 과정을 통해 옛 도상의 단일한 의미를 복수화시키고 의미의 가능성을 확장시킨다. 또한 회화, 설치, 비디오 영상 등의 다양한 조형 언어는 전통 도상의 의미를 다층적으로 배가시키는 수단이 된다. 원본의 의미가 현대성의 외피를 입고 새롭게 드러난 것, 원작이 가지고 있던 고정된 의미가 동시대의 맥락에서 새롭게 부가되거나 변형된 것, 이러한 의미의 확장 내지는 의미 전복의 양상을 살펴보는 것은 이번 전시를 관람하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 될 것이다.
전통 산수화, 화조화, 미인도, 인물 풍속화, 민화, 고분 벽화 등은 회화, 영상, 설치 작품으로 리메이크 되면서 새로운 형식과 의미를 지닌 작품으로 재탄생된다. 전통 산수화의 조형성과 내용은 디지털 과정으로 대체되어 새로운 디지털 산수화로 변용되기도 하고, 조선시대 대중의 그림이었던 민화는 21세기 현대인의 욕망을 드러내는 대중소비사회의 기호로 변형되기도 한다. 특히 가부장사회 남성의 시선으로 그려진 전통 미인도는 현대 여성작가의 시각으로 다시 그려지면서 이 시대 여성성을 드러내는 신 미인도로 리메이크 된다. 또한 고구려 고분벽화는 2005년도 서울의 풍경이 대입된 3D 애니메이션으로 리메이크 되면서, 고구려의 우주관과 세계관· 고대 신화의 상징체계와 서사구조는 현재의 시점에서 재맥락화 된다.
메타 산수 ; 산수화의 리메이크김종구는 붓과 먹 대신 현대문명의 상징인 철(쇠)의 가루와 비디오 영상을 사용하여 산수화의 현대적 리메이크를 시도한 쇳가루-산수화를 선보인다. 바닥에 쓰여진 쇳가루 글씨는 수평적 높이에서 카메라 렌즈에 의해 포착되어 높고 낮은 산세들의 풍경들이 투사된 디지털 산수화로 변이된다. 또한 쇳가루 글씨는 세로 7미터 높이의 거대한 캔버스에 쓰여져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면서 시간성이 내재된 새로운 산수화를 연출하기도 한다.
정선과 김홍도 산수화의 일부분을 차용하여 대형 캔버스에 확대하는 작업을 해온
정주영은 이번 전시에서는 정선이 그린 <백악산>의 실경 작품 속 봉우리 부분을 확대하는 작업을 선보인다. 작가는 정선이 재현한 작품의 특정한 곳- 예를 들면 봉우리의 일부분이나 바위 등- 을 선택하고 그 곳을 작가의 시각에 밀착시켜 자연의 외형보다는 그 기운을 전달한다.
여성성의 새로운 표상들 ; 미인도와 화조화의 리메이크이순종은 조선시대 신윤복의 미인도를 회화와 영상작품으로 리메이크 하여 여성성의 본질에 접근한다. 이순종은 남성의 시각으로 그려진 전통 미인도의 성적 정체성을 여성의 시선으로 재맥락화한다. 작가는 여성이 지닌 성과 속, 영과 육의 이중적 속성을 신윤복의 미인도에서 발견하고 이를 섬찟하면서도 아름다운 모호한 여성 이미지로 리메이크한다.
써니 킴은 십장생이 수놓아진 한국 자수화를 배경으로 교복입은 여학생을 배치한 회화 작품을 선보인다. 자수화는 여성의 공간에서 주로 생산ㆍ유통되는 그림이다. 패턴화되고 잘 짜여진 자수화 구조는 유니폼을 입은 여학생처럼 일정한 영역 내에서 규제되는 여성성의 세계를 환기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재미교포인 작가에게 십장생의 동물들은 문화적으로 익숙치 않은 초현실적인 이미지로 인식되어, 여학생의 환상 속 이미지들로 표현된다.
전통 화조화를 참조ㆍ인용하는
장희정은 꽃과 새, 나비와 풀 등의 무늬가 프린트된 기존의 레디메이드 천 조각들 위에 이미지들을 지우거나 다시 그리는 과정을 통해 꼴라쥬 화조화를 창출한다. 여성의 규방에 장식되어 행복과 안락을 상징해 온 화조화의 고정된 의미는 그의 작품에서는 천조각의 해체와 재구성, 반복과 지우기의 과정을 통해 단지 의미 없는 기호들로 재배치된다. 대량생산되는 천을 재료로 한 장희정의 리메이크 화조화는 고급예술과 상업예술, 팝아트와 전통예술의 범주를 넘나든다.
현대인의 욕망과 대중소비사회의 기호 ; 민화의 리메이크김지혜는 민화의 책거리 그림을 리메이크하여 대중소비사회 현대인들의 욕망을 기호화한다. 책과 일상용품의 집합, 구획된 공간, 자유로운 시점, 오방색의 사용이라는 민화적 코드를 사용하는 작가는 현대인의 소비욕망을 표상하는 명품라벨, 보석과 의상 등을 첨가하여 일종의 세상 만화경을 연출한다. 또한 전시장 내 거대한 기둥을 단청색의 오브제로 감싸고 인터넷이나 문자 메시지에서 사용되는 이모티콘을 그려 넣음으로써 일상의 기호와 전통도상을 결합한 <이모티콘 기둥>을 선보인다.
뮤직 비디오 아트 디렉터이자 단편영화감독이기도 한 영상작가
김태은은 사대부들의 부와 명예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민화의 평생도를 현재의 지점으로 끌어온다. 그는 돌잡이, 글공부, 장원급제 등 평생도에 등장하는 이미지에 현대인의 모습들을 대입시키면서 입시교육, 입사 경쟁, 호화결혼 등 현대인들의 욕망과 상실을 표현한다.
21세기 벽사 ; 고분 벽화의 리메이크 임영길은 고구려 고분 벽화를 리메이크 하여 이를 3D 영상작업으로 제작한다. 작가는 테라리움이라는 가상공간에 2005년 서울시의 풍경을 설치하고 테라리움 용기의 4방면과 지붕형태의 4방면에 고구려 벽화에 등장하는 신화상의 동물들을 등장시킨다. 임영길의 리메이크 고분벽화는 벽사나 기복신앙 등 고구려의 우주관과 세계관을 공시적 관점에서 재맥락화 한것이다.
이외 고가구와 영상을 오버랩 시킨 영상 설치작업을 해온
류재하는 이번 전시에서는 과거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하는 고가구에 현대 부산물인 모니터를 결합하고, 여기에 상감청자 문양, 고대 벽화나 암각화에서 보여지는 형상, 서구 거장들의 작품 일부, 현대인의 얼굴 등의 영상이미지를 꼴라쥬 형식으로 첨가한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정적인 것과 동적인 것, 서구와 전통, 과거와 현재가 복잡하게 교차하는 그의 꼴라쥬 영상 설치 작품은 혼성의 현 시대를 은유하고 있다.
이번 전시 작품들은 한국미술사의 흔적들을 보유함과 동시에 원작에 대한 부언과 주석달기, 개입에 의한 리메이크 과정을 통해 원작이 간과하고 있거나 미처 드러내지 못한 부분들을 현재의 시점에서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전시 작품의 출발은 과거에 있으나 작품 속에 현대인의 삶의 의식과 동시대성을 은유하는 등 현 시대와 사회 속에서 과거의 그림들을 재구성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복수화를 실현한다.
Remake Corea
2005. 1. 20 (목) - 2005. 3. 26
opening : 2005. 1. 20 (목) 오후 5시
써니 킴, 김종구, 김지혜, 김태은, 류재하, 이순종, 임영길, 장희정, 정주영
후 원 : (주) 코리아나 화장품, 한국문화예술진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