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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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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삼전

  • 전시분류

    개인

  • 전시기간

    2005-04-08 ~ 2005-05-08

  • 참여작가

    이재삼

  • 전시 장소

    이영미술관 (이전)

  • 문의처

    031-213-8223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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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밀한 사실, 몰입, 집중, 빼곡함이 전하는 감흥



 이재삼의 회화를 읽는 데는 별도의 독해법이 필요치는 않다. 상징이나 기호 해석 등의 난해한 절차를 밟을 필요도 없다. 거기 어디에도 ‘구름’은 없다. 그의 언어는 매우 ‘상호협약적(conventional)’이어서 추론, 가정, 해석, 상상 등 별도의 인지적 접근 없이도 충분히 먼저 ‘말한다.’

 먼저 말을 건네는 것만 해도 (오늘날과 같이) 난삽한 독백들이 주류를 이루는 시대엔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다. 이재삼의 회화는 오늘날엔 정말 하찮은 것으로 치부되곤 하는 미적 감흥(感興)까지 전한다. 감흥은 마음 내부에 어떤 긍정적인 파동이 생성되는 경험이다. 사전은 그것을 ‘마음에서 즐거움과 멋이 느끼어 일어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것은 일테면 차가운 지적(知的) 동의나 들끓는 이념적 동조 등과는 다른 내적 소통의 성취인 것이다. 어떤 때 이같은 깊은 소통이 성취되는가? 적어도 예술작품에서 그것은 깊은 가치론적 동의와 인지적 만족이 동시에 충족될 때, 훌륭한 주제와 여기에 걸맞는 형식이 겸비될 때, 결과와 그것을 허락한  ‘태도’가 모두 좋을 때 등과 같은 어떤 고도의 통합으로부터 가능해진다. 이것은 예컨대 ‘태도 그 자체만으로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식의 분열적인 인식으론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경험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지난 세기의 후반부 이후 이같은 분열적인 인식에 기초한 편협한 소통이 하나의 미적 규범처럼 권장됨으로써, 감흥이 부재하는 미술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은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재삼의 그림들은 이처럼 오늘날 일반적으로 존중되지 않고 있는 오랜 전통, 곧 높은 수준의 통합을 성취함으로써 우리에게 어떤 감흥의 경험을 갖게 한다. 우선 이재삼의 그림에 베어있는 태도의 측면을 보자.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의 자연, 하나의 사물에 대한 집요하고도 정연한 인지욕구다. 이전 작품에서 얼굴과 말(馬)에 대해 그렇게 했던 것과 동일하게, 이번에는 대나무와 연꽃과 옥수수 밭에 대해 그렇게 한다. 여분도 잉여도 없는 전적인 몰입, 이를테면 바로 그것, 그것의 클로즈업, 그것들의 연속과 반복, 그것들의 군집과 산포가 아니면 안 되는, 혹은 단 하나의 단어로 문장과 페이지를 가득 메움으로써 그 이외의 어떤 다른 것도 허용하지 않는 농밀한 언술, 그리고 그것들을 실현하기 위한 바로 그 재료와 기법, 그 모노크롬, 그 톤의 질서, 그 마티에르가 아니면 안 되는, 결코 시선을 돌릴 수 없는 필연성, 예컨대 ‘오직 목탄으로’에서 나타나는 어떤 화학적 배합의 결과물들도 허락하지 않으려는 단호함, 다른 가능성들에 대한 자의적인 폐기, 이러한 몰입과 집중은 이재삼의 그림을 온통 한 가지, 곧 사실로만 가득한 것이 되게 한다. 그것은 다만 빼곡한 사실들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들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다가오도록 하는 집중을 방해하는 것은 모두 배제되어 있다. 장식도 상황도 없고, 심리적 뉘앙스도 없고, 베일 같은 장치도 없다. 오직 사실들이 캔버스가 비좁을 정도로 가득할 뿐이다. 헌데, 역설적이게도 사실에 대한 이 집중, 이 과도한 선명함은 사실들의 마지막 단계로 나아가는, 오히려 비현실 초월의 세계로 나가는 출구와 같은 인상을 준다. 넘치는 사실들이 아직 아무 것도 명시된 바 없는 또 다른 차원으로의 나아감을 생각하게 만든다.

 물론 바로 이같은 태도, 단일한 것의 극단적인 지각과 인식의 집중, 반복, 연속을 통해 언술을 과도하게 농밀화하는 것에서 어떤 동시대성을 읽어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해석일 것이다. 사실, 포스트모던으로 명명되는 이 시대야말로 그것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과 무관하게 태도 자체를 무한히 존엄한 것으로 여기는, 역사상 그 유래가 없었던 시대 아니던가 ! ‘어느 쪽으로 가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가느냐’가 중요할 뿐이란 게 이 시대의 새로운 도덕성이다. 『미국적 사고의 종말』의 저자 앨런 불름에 따르면, 오늘날 대학에 들어오는 거의 대부분의 학생은 이미 상대주의자가 되어 있다. 이들이 배워온 학습의 전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자신이 전적으로 옳다고 믿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컨대 리차드 로티 같은 사상가를 따르면, “진리는 발견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만들어내야 할 그 무엇일 뿐이다.” 즉, 이미 존재하는 것은 이미 진리가 아니라는 것인데, 그러니 어떤 기준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바를 밝힐 수 있겠는가? 바로 이와 같은 인식론적 맥락 하에서 그저 태도만을 언급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는, 이른 바 태도 자체가 예술이 되는 반전이 가능해졌던 것이다.   

 반면, 이재삼의 그림들은 흐트러짐 없이 일관하는 지향성을 갖고 있다. 바로 그것에 의해 진리 자체를 부인하는 동시대의 방향상실과 반미학을 훌쩍 넘어서는 것으로서의 지향성. 이재삼의 세계에서 자라고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떠올려보라. 빼곡한 대나무 밭, 소나무 숲, 건강한 옥수수 대, 무성한 연이파리들, 그것들 모두는 살아있고, 예외없이 산소를 발생하는 것들이다. 스스로 살아감으로써 동시에 살게 하는 생태계의 상호유기적 컨택스트를 거스르지 않는 것들이다. 더욱 주목해야 할 점은 그것들이 부지불식간 무리를 이루면서 존재하는 방식, 즉 진정한 의미의 관계성을 환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생명은 그 자체가 관계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나무가 숲을 이루고, 옥수수는 밭을 만들고, 연 이파리들이 온통 연못을 덮는 것은 단지 하나의 ‘그림이 될 만 한’ 풍경 이상인 것이다. 그것은 그 같은 방식이 아니고선 자신들의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삶의 필연적인 방식인 것이다. 이재삼의 회화는 단지 자연에 대한 탁월한 시각적 재현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독단적이지 않은 생의 비결에 관한  재현이기도 한 것이다.  

 이재삼의 세계가 매력적인 것은 우선 그 자체로 발언하는 몰입의 태도, 즉 오직 그것에게만 부여되는 특권인 화폭의 전적인 할애, 그리고 목탄과 모노크롬에 대한 깊은 신념에서 베어나오는 어떤 순수성에 관한 굳은 결의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이러한 결의 중 어떤 것도 그 자체를 위한 것은 없다. 이를테면, 몰입, 집중, 빼곡함은 자연과 생명에 대한 깊은 숙고의 결과이자 존경심의 발로로부터이다. 우리는 이재삼의 회화에서 훌륭한 주제와 준수한 형식의, 전심전력하는 태도와 좋은 결과의 건실한 통합이 주는 감흥을 경험하게 된다. 정말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심 상 용 (미술사학 박사, 동덕여대교수)


제목:  이재삼 “숲 사이-너머”

일시: 2005. 4. 8(Fri) - 5. 8(Sun)

장소: 이영미술관/경기도 용인시 기흥읍 영덕리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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