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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신문, 방송을 보면 삶의 가치에서 문화예술의 비중이 날로 커지고 있고 삶의 질적 향상을 위해 많은 관심과 지출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쁘고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막상 자세히 들여다보면 문화의 인프라 격인 순수예술분야에 대한 관심과 지출보다는 흥미 위주 혹은 이벤트적인 예술분야에 관심과 지출이 편중되어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현장에서 순수예술부문은 전반적으로 썰렁한 분위기다. 이러한 이유로 여러 가지를 들지만 그중 일반적으로 “순수예술은 난해하다.”라는 점이 꼽힌다.
미술분야만 놓고 보더라도 이러한 이유는 타당성을 갖는다. 과거 미술은 그나마 그 시대의 문화의 흐름에 맞춰 생활을 풍요하게 했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 삶을 반영하면서 깨달음을 주는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요즘 순수미술은 보는 사람이 곤혹스러워하는 대상이 되었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게 된 걸까? 예술가에게 아니면 감상자에게 그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것일까? 필자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양자 모두 문제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예술가는 자신의 의도를 잘 말해주는 양식을 만들어 내지 못한 것은 아닌지, 감상자는 이를 수용할 수 있는 미적 태도를 갖추지 못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때다.
이번 <해외청년작가전>에 낡은 개념인 ‘양식’을 끄집어내서 ‘양식의 수수께끼’로 부제를 정한 것은 이러한 현실 속에서 양식이 갖는 의미를 통해 현대미술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출품된 다양한 작품을 이해함으로써 이번 전시가 젊은 작가와 감상자 간에 소통 가능한 전시로 자리매김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또한, 미술 자체와는 상관없는 유행 사상들이 작품 주위를 맴돌아 오히려 작품 감상에 혼란을 가중시키는 것이 작금의 상황인지라 작품 그 자체의 본질인 양식에 관한 얘기를 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1)
1) 여기에서 미적 태도는 사적인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대상 그대로를 예민함과 정확성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미적 태도를 통해서만 작품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면서도 부분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성질을 가진 미적 체험을 산출할 수 있다. 김진엽,「미적 체험에 대한 미학적 이해」,『미술교육논총』11집(2001) 참조. Ⅱ“왜 눈에 보이는 세계가 서로 다른 시대, 다른 민족에 의해서 그처럼 서로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어 왔던 것일까. 우리가 실물 그대로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그림들도, 미래 세대에게는 우리가 이집트 그림들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실감 안 나는 것으로 보이게 될까. 미술과 관련된 모든 것들은 전적으로 주관적인 것일까, 아니면 그런 것에도 객관적인 기준들이 있는 것일까.”
2) 이러한 질문은 미술사를 이해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제기할 수 있는 의문들이다. 그만큼 미술은 복잡 다양한 가운데 시대와 민족, 지역, 유파, 개인별로 형식적 통일성이 있다. 여기서 작품이 공통으로 갖는 형식적 통일성을 양식이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 메이어 샤피로(Meyer Schapiro)는 양식에 대해 “개인 혹은 그룹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일정한 형식을 말하나 때로 일관된 요소, 질, 표현 등도 포함한다.”라고 정의한 바 있다.
3) 그렇다면, 형식적 통일성을 유지하는 양식의 성질은 어떠한가.
악명 높은 위조품 작가인 한스 반 메게렌이 50여 년 전에 17세기 화가 얀 베르비어의 작품이라고 내놓은 위작들은 당시에는 진품처럼 보였으나 현재에는 1930년대와 1940년대의 작품임을 분명히 판별할 수 있다.
4) 이는 그 시대의 양식이 당대에 읽혀지지 않더라도 후대에는 분명히 그 당시 양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미술 양식이 어느 시대건 당대의 사회 문화적 규약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곰브리치에 따르면 “미술이 오로지, 혹은 주로 개인의 시각을 표현한 것이라면 미술의 역사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5) 따라서 미술에서의 특정 양식의 탄생은 시대적, 사상적,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지역적 배경 등 모든 요소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반해 18세기 조너선 리차드슨(Jonathan Richardson)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아무도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사람은 없으며, 그 사물의 본질이 어떤 것인가를 아는 사람도 없다는 것은 분명 정확한 금언이다. 이 금언이 진리라는 것은, 인체의 구조라든가 뼈대의 짜임새, 해부학에 무지한 사람이 그린 교습용의 그림과, 그런 것들을 철저하게 잘 알고 있는 사람이 그린 것과를 비교해 보면 당장 나타난다. 양자가 모두 똑같은 생명체를 보고 있지만, 서로 전혀 다른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6) 제들마이어(Hans Sedlmayr)도 “하나하나의 개개인만이 실재하는 것이지, 그룹이나 정신적 집단들은 단순히 이름뿐이다. 자연이란 항구불변의 것이며 다만 서로 다른 형태로 ‘재현’될 뿐이다. 인간의 본성이나 인간의 이성이 단일체이며 불변한다는 생각을 거부해야 한다.”
7) 이러한 학자들의 주장에 근거해서 한 발짝만 더 나아가면, 양식의 변화는 기술이 발달하듯 진보만을 기초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이 서로 다른 결과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미술가는 궁극적으로 형식화된 이미지를 창조한다. 이 이미지는 2차원의 평면이나 3차원의 제한된 공간에서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에 부합될 때까지 만들기를 반복함으로써 나타난다.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는 이러한 과정에서 미술가의 지식과 삶의 철학이 반영되지 않을 리가 만무하다. 따라서 미술가는 세계를 본 그대로를 그리는 것도 아니고 독선적으로 그리는 것도 아니다. 부연하면 미술가 자신이 머무른 시대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개인 양식이 곧 시대 양식을 대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현상은 과거에 비해 현재에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요컨대 미술에는 그 시대의 사회문화의 주요 특성과 작가 개인의 개성 등이 함께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2)E. H. 곰브리치,『예술과 환영』, 차미례 역(열화당, 2003), p.29. 3)안연희 엮음,『현대미술사전』, (미진사, 1999), p.234. 4)로버트 앳킨스,『현대미술의 개념풀이』, 박진선 역(시공사, 2001), p. 146. 5)곰브리치, 앞의 책, p. 29.6)위의 책,p. 36. 7)위의 책, p. 43. 참조. Ⅲ 예술적 시각의 다양성이 용인되는 현대에서 미술 작품은 곧 예술가 개성에 대한 표현으로 볼 수 있다. 현대미술에서 개개의 독창성과 개성적 측면이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강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의 미술은 시대와 민족, 지역, 유파 양식은 거의 사라지고 개인양식만이 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이유로 감상자는 현대미술을 감상할 때 어느 참조할 만한 단서 없이 작품을 감상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부딪게 되었다. 이때 동화될 수 없는 이질적인 요소만 작품에 난무하게 된다면, 어떤 감상자라도 당혹스러워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미술가 간에 서로 소통이 안 된다는 얘기도 이미 통설이 된 지 오래니 일반은 더할 나위 없다.
이러한 국면에서 미술가는 “예의바른 사람이 애쓰지 않아도 편안한 인상을 준다.”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작품에 사용된 형식들은 그 내용 속에 들어가 동화되어서 내용과 하나로 일치될 때에만 감상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예를 들면 인물화에서 형태와 색 등 형식적 관계들만 보인다면 그 인물화는 어디엔가 잘못된 부분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추상미술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추상미술의 걸작품에서 여러 힘의 한 가지 패턴은 고요와 긴장, 경쾌와 중후성이 특수하게 혼합된 상태를 전달해준다. 즉 형태의 의미가 풍부하게 표현되도록 완전한 성변화(聖變化)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빨간 원이나 파란 막대기, 부식된 금속이나 주의 깊게 칠해진 무(無)의 영역들이 두드러지게 눈에 띄게 되면 그것이 그림이든 조각이든 어딘가가 잘못됨이 있음을 감상자는 느끼게 된다.
8) 따라서 미술 작품은 미술가의 정신적 창조활동과 어울린 형식으로 나타날 때 비로소 감상자에게 감동을 전해줄 수 있다. 이중섭의 ‘소’ 그림은 많은 시간 소와 같이 생활하고 관찰함으로써 나온, 그러니까 이중섭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의 노력을 기울여 그렸던 ‘소’였을 것이다. 이를 종합해 볼 때, 예술가의 양식이란 대상에 대한 유일무이한 자신의 관점이자 가치관에서 나오는 것이다. 현대 미학자 볼하임(Richard Wollheim)은 “그의 양식은 그를 보장하는 것이다.”
9) 라고 했다. 작가들은 똑같은 세계를 보더라도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세계의 틀에서 보고 제작하기 때문에 독특한 양식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유명한 미술가의 작품은 작품에 대한 설명이 없이도 곧바로 그 작가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다. 따라서 감상자 역시 작품에서의 형, 색채만 볼 것이 아니라 그 형식이 작가의 이야기를 어떻게 보여주고 있는지를 눈여겨보아야만 한다.
8) 루돌프 아른하임, 『예술심리학』, 김재은 역(이화여대출판부, 1995), p. 20. 참조. 9) Richard Wollheim, 'Pictorial Style: Two Views', The Concept of Style(Ithaca and London: Cornell Univ. press, 1987), p. 194. Ⅳ혹자는 이번 전시가 젊은 작가들로만 한정하여 작품 양식이 다소 완성되지 못한 측면이 있지 않겠느냐는 비판 섞인 소리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전시를 통해 여러 양식의 세계를 경험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작가마다 각기 다른 삶의 환경과 학습에 따라 관심과 가치관은 달라지게 마련이고 이에 대한 결과로 작품이 형식적으로 차별되는데, 이번 참여작가들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작가 자신들만의 세계가 고스란히 작품 속에 담겨 전시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작가들의 작품 세계를 통해서 앞에서 언급한 양식의 속성을 이해할 수 있음은 물론, 작품에서 나타나는 양식을 통해 작가의 개성과 그 세계관을 엿볼 수도 있을 것이다.
권남희는 여러 매체를 사용하되 최소한의 형식 요소를 이용하여 삶에서의 소소한 인상들을 작가 특유의 여리고 섬세한 시적인 감수성으로 표현하였다. 시가 소설보다 더 깊은 울림을 가져오듯 미니멀한 공간으로 의미 가득한 공간을 지향한 것이다. 드로잉으로 자아의 모습을 그리고 이를 지우는 행위를 여러 번 반복한 것을 영상으로 담아낸 김송이의 작품은 자아에 대한 문제를 스스로 제기한 작업이다. 자아의 다양한 모습을 그리고 지우는 과정과 그 가운데 남는 흔적은 우리로 하여금 자아 속의 모호함과 불확실성을 생각하게 한다. 김은경의 유화 작업은 어떠한 것이든지 변화하는 과정에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 작가 자신이 생활하면서 겪는 변화는 물론이고 일상의 모든 사물이 변화와 흐름 속에 놓여 있음을 그녀는 사물의 실제 크기를 유지하면서, 꼼꼼하지 않은 형태, 낮은 채도와 중간 밝기의 색상 그리고 살아 있으면서도 사라지는 붓 터치로 상징화하였다.
김제나의 테이프 작업 속의 공간은 3차원 공간에 대한 끊임없는 탐색으로 빚어낸 공간이다. 공간에 대한 다양한 시각들을 포착하고 그 공간에서 느껴지는 딱딱함과 질서, 그러면서도 자유로우면서도 맹렬한 측면을 기하학적인 형태와 선으로 표현하였다. 폭포가 하나의 물방울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듯 하나의 점처럼 가장 작은 단위가 궁극적으로는 모든 만물의 기본임을 아크릴로 이미지화한 민정연은 캔버스 위에 셀 수 없는 작은 점들을 축적해서 가장 큰 단위인 우주적 풍경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박웅규는 계란 노른자를 이용한 ‘템페라’라는 재료를 사용하여 생활주변의 인물이나 사물을 사실 그대로 표현하는 리얼리즘 계열의 작가다. 이번 전시에는 동양적 세계관이 기독교 사상보다 더욱 포용적이라는 판단 아래 유, 불, 선 사상이 담긴 그림을 그렸다.
양희성은 오랜 시간을 두고 캔버스에 아크릴로 층을 입혀 누에고치가 실을 짜내듯 실을 끌어내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작업을 했다. 시간, 정성, 인내는 고전 풍의 화이트와 정교한 뜨개질에 의한 구성을 통해 발현되었다. 전경은 지극히 개인적인 삶에 직면하면서 드러나는 즐거운 감정, 어두운 감정 혹은 혼합된 감정을 드로잉을 통해 동화적이면서 서사적으로 표현하였다. 이 같은 감정은 작품 속 인물들의 모습과 행동에서 나타나는 과장, 변형을 통해 극명하게 나타난다. 정석희는 외국에서 사는 이방인으로서 느끼는 삶의 무게와 자신의 존재감을 사진과 회화를 결합한 이미지와 비디오 영상을 병치시켜 표현하였다. 외국생활의 평범한 일상을 담은 영상 풍경과 그 생활 속에서의 작가의 귀소본능에 관한 회화적 이미지가 서로 반향을 일으킨다.
우리는 이번 전시에서 작품에 어떤 매체를 사용했건, 그 작품이 크건 작건 그리고 그 작품이 평면이건 입체건 영상이건 간에 모든 것이 단순히 시각적인 힘으로서의 형식이 아닌 하나의 양식으로서 작가의 본질적 의미를 나타내는 것을 직감할 수 있다. 그 작품의 시각 패턴은 전설적인 에피소드로부터 그리고 주위의 일상으로부터 또한 작가의 내면세계로부터 가져온 테마들이 양식으로서 발현되어 보이는 것이다. 이상에서 양식은 작가의 내면에서 우러나는 웅변이 형식과 만나 형성된 ‘일체(一體)’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일체’, 즉 양식이 있는 작품을 통해 진정한 예술을 만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모쪼록 이번 전시를 통해 현대미술에서 가졌던 ‘난해한 인상’을 벗어내고, 이후 생활 속에서 ‘미술가와의 만남’이 자주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서민석│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큐레이터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은 2002년부터 세계 각국에서 한국미술의 새로운 영역을 구축하고 있는 젊은 작가들의 축제인
해외청년작가전을 마련해 오고 있다. 올해로 네 번째를 맞는
해외청년작가전은 오는 6월 10일부터 6월 26일까지 17일간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제4전시실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에는 권남희, 김송이, 김은경, 김제나, 민정연, 박웅규, 양희성, 전경, 정석희 등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에서 활동하는 젊은 작가 9명이 참여해 지금까지 외국 현지에서 쌓은 기량을 국내 관객에게 선보인다. 이들은 재외한국문화원, 국내외 미술평론가 및 큐레이터, 국내외 예술가 등으로부터 전 국가를 대상으로 작가추천을 받아 미술전문가의 심의를 거친 후 예술의전당이 최종 선발하는 방식을 통해 발탁되었다. 이 전시는 만 45세 미만의 한국인(교포 포함)으로 외국에서 2년 이상 미술작품 활동을 한 자에게 참여기회가 주어진다.
이번 전시에는 작금의 미술동향인 회화의 강세를 반영하면서도 이국적 이미지로 빚은 다양한 기법의 회화작품들이 출품되어 국내미술계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어 줄 것으로 기대된다. 전통적인 방식인 템페라, 유화, 아크릴을 이용한 작품에서부터 최근 새로운 개념의 방식인 드로잉, 테이프, 영상매체를 이용한 작품에 이르기까지 우리와 ‘코드가 맞는 새로운 미술 세계’를 만나 볼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번 출품작들과 전시 전반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현대미술에서의 ‘양식’의 개념과 그 의미에 관한 이론적 접근이 이루어졌으며 이와 함께 ‘전시 설명’과 ‘작가와의 대화’ 등도 마련하였다. 전시공간도 작가 개개인의 특성과 그들만의 표현양식이 제대로 조명될 수 있도록 작가 개인별 공간체제로 구성되어 관객들은 작가마다 색다른 표현 세계를 감상하면서 미술의 가치를 음미해 볼 수 있다.
2005 해외청년작가展 “양식의 수수께끼”
2005. 6. 10(금) - 2005. 6. 26(일) (오프닝: 6. 9(목) 오후 6시)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제4전시실
주최 : 예술의전당
참여작가 수 : 9명
국가별 참여작가 및 출품작 부문
미국 : 김송이(영상), 전 경(회화), 정석희(영상), 김제나(회화 설치), 양희성(회화)
영국 : 권남희(설치), 김은경(회화)
프랑스 : 민정연(회화)
중국 : 박웅규(회화)
부대 프로그램
- 전시설명 : 전시기간 중 매일 오후 2시 / 제4전시실
- 작가와의 대화
6. 10(금) 오후 3시 : 김제나, 양희성
6. 11(토) 오후 3시 : 권남희, 김송이
6. 17(금) 오후 3시 : 박웅규, 정석희
6. 25(토) 오후 3시 : 김은경, 민정연
※ ‘작가와의 대화’는 주최 측의 사정으로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개관시간
10:00 - 20:00 (매표마감 19:30) 평일, 주말 동일
입장료
일반 2,000원/ 초, 중, 고교생 1,000원(10인 이상 단체 50%할인)
※ 무료입장 : 부모동반 미취학 아동, 장애인, 국가 유공자
문의
Tel. 02) 580-1518 / 1523, Fax : 580-1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