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관용
번역에 저항한다
2005. 6. 18 – 7. 10 토탈미술관
예술이 시간과 공간적인 차이를 벗어나 보편적인 이념을 향한다하더라도, 작가는 자신이 처한 그 시대의 사람들의 감성을 읽어내어 작품 속에 반영해야 하는 것이다.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하는 나무가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번역은 어찌 보면 열매만 들여오고, 원작자가 그의 삶에서 그것을 일구기까지의 좌절과 오랜 인내의 과정을 함께 가져올 수 없기에 독자는 자칫 표피적인 것만을 보게 마련이다.
<번역에 저항한다>전은 이러한 태도를 지양하며, 세계의 다양한 미술 문화들이 유입하며 복잡하게 얽혀 있는 현장에서 우리 미술의 정체성과 나아갈 방향을 다시 상기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신선함을 던져주고 있다. 작가들도 입체, 영상, 회화, 동양화 등 장르에 구분없이 미술 현장에서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30,40대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작품들도 그들만의 독특한 시각언어를 구축하면서 현실과 대면하고 있는 다양한 시각이미지들을 포착하고 있다.
아쉬운 점은 전시 구성이 작품들 상호간의 유기적인 연계를 통해 기획의 의도를 암시적으로 드러내어 보는 이로 하여금 자생적인 우리 미술의 움직임을 심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음에도 작품들 간의 연계성이 단절된 듯한 현상을 보임으로써 기획자의 임의적인 판단이라는 비판의 소지를 안고 있다. 이러한 현상들은 작품의 내용들을 4개의 세부주제, 즉 아름다움-탐미론, 움직임-사회적 실천론, 불협화음-현재론, 다름-지역적 차이론으로 나누어 기획의 의도에 접근하고 있는 데, 필자가 보기에 전시된 작품들은 이 주제들을 공유하면서 그 자신의 정체성과 시각을 열어가고 있기에 다소 무리한 분류로 보여 진다.
포스트모던의 아름다움이란 탐미의 시선에서 벗어나 사물들 그 자체의 시선에서 사유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가. 달리 말하면 이론이 아닌 사회적인 실천, 불협화음, 지역적 차이를 수용하는 그 자체가 아름다움은 아닌가. 그럼에도 <번역에 저항한다>전은 우리 미술의 위상을 재정립하는 과정에서 그 의의를 갖고 있다.
서울아트가이드 200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