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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스펙트럼과 재정의 되는 미술
최근의 전시 경향을 보면 특별한 주제를 중심으로 한 주제전의 성격이 강하다. 이번 전시에서는 특별한 주제를 정하기보다는 비교적 비평적 쟁점을 뚜렷하게 반영하고 있는 작가 9명을 선정 초대하여, 최근 논의되고 있는 비평적 이슈에 대해 점검해보는 기회로 삼았다. 이는 물론 일관성이란 점에서는 취약할 수 있다. 이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특별한 주제를 피한 이유는 자칫 일관성이 불러올 수 있는 경직성을 의식해서이다. 꼭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으나, 대개 일관성은 다양성을 해칠 수 있다. 정형화된 언어로는 붙잡을 수 없는 애매한 것들, 이미 결정된 형식의 안쪽으로는 불러들일 수 없는 사사로운 것들, 그리고 상식과 합리의 이름으로는 명명할 수 없는 것들을 훼손할 수 있다. 그렇다고 주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단지 작가들을 하나로 묶어낸 전제가 없다는 것일 뿐, 각 작가들에게서 나타난 개별 주제만큼은 어떤 주제전의 그것보다도 선명하다. 이런 개별 주제들이 이 전시를 위한 명분과 구실이 되고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현 시점에서의 비평적 쟁점과 이슈를 살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외관상 이질적인 경향들이 우연하게 접합하고, 우연하게 의미를 만들어내는 새로운 지도마저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구영모의 미술관(棺, 館, 觀). 구영모의 미술관은 물론 미술을 위한 관(棺)이다. 이는 미술관과 박물관을 모든 예술작품의 종말이자 무덤으로 본 이탈리아 미래파 예술가들의 아방가르드 정신을 떠올리게 한다. 그 이면에 미술과 예술의 종말에 대한 공공연한 인정이 깔려 있다는 점에선 감각적 현상에 바탕을 둔 예술 이후의 예술을 순수한 사유, 절대 정신, 철학의 형태로 변화한다고 본 헤겔의 예술의 종말론에도 그 맥이 닿아 있다(아마도 개념미술이 이를 실현한 경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장르적 특수성에 천착한 모더니즘 서사 이후의 예술이 단순한 시뮬라크르 즉 가상의 놀이, 가상의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 장 보들리야르의 시뮬라시옹 이론에도 그 맥이 닿아 있다.
이제 예술의 존재의미를 순수한 놀이, 지적 유희, 지적 게임의 형태로 이해하는 태도는 공공연한 현실이 되었다. 그 기원은 레디메이드로써 예술작품과 일상품을 구별할 수 있는 근거를 없애버린 마르셀 뒤샹과, 브릴로 상자로써 일상품과 재현물을 구별할 수 있는 근거를 없애버린 앤디 워홀에게로 소급된다. 이후 예술은 미적 대상물을 겨냥한 오브제 미술에 바탕을 둔 정통미학으로부터도, 그리고 환원주의에 바탕을 둔 모더니즘의 거대 서사로부터도 더 이상의 어떠한 당위성도 끌어낼 수 없게 된 것이다. 대신 예술은 탈미학, 탈예술, 탈미술과 같은 각종 탈(脫)의 놀이로 변질된다. 이는 기존의 어떠한 계보와 계통에도 무관한(그러므로 기존의 계보와 계통을 허무는 계기로서 작용) 이질적이고 무관계한 것들을 접붙이는 서핑과 매핑, 순수한 지적유희, 순수한 인문학적 놀이의 형태로 현상한다. 이처럼 현대미술에 나타난 놀이는 틀에 박힌 삶(지식의 이름으로 수렴되는 선입견과 편견, 합리와 상식을 아우른)에 대한 위반의 계기로서 작용하는가 하면, 모든 굳어진 것들에 반(反)하여 회의의 계기로서 작용하기도 하기도 하고, 마침내는 정착할 곳을 잃은 뿌리 없는 미학을 기정사실화하는 위기의식의 계기로서 작용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미술을 위한 관(棺)을 소재로 한 작가의 작업은 그 이면에서 현대미술과 관련한 변화된 관점(觀)으로도, 그리고 미술관(館)의 형태로 나타난 예술제도에 대한 반성으로도 읽힌다.
김세일의 탈조각.조각의 본질은 무엇인가. 대략 양감, 질감, 물성, 공간감 정도를 그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가운데 양감 즉 덩어리야말로 그 본질의 핵심일 것이다. 모더니즘 조각은 조각의 이러한 본질적인 국면에서 그 당위성을 찾은 환원주의의 역사를 보여준다. 이후 조각의 본질에 대한 물음은 회의에 부쳐지고, 그 본질에 반(反)하는 형식들이 새로운 이름으로 조각을 명명하기 위해 호출된다. 즉 움직이는 조각, 부드러운 조각, 팽창조각, 압축조각, 그리고 심지어는 공기와 소리, 빛과 영상, 그림자와 같은 무형의 소재를 대상으로 한 비물질 혹은 탈물질 조각으로써 조각이 재정의 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김세일의 작업은 여전히 조각의 본질적인 요소들을 암시하면서, 더불어 조각의 정통적인 개념으로부터 비켜선 탈조각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그의 일련의 작업들 속에는 조각과 탈조각이 하나의 결로 스며있고, 이로부터 고유의 긴장감을 함축해낸다.
전작에서 작가는 철사로 골격을 만든 다음, 그 표면에다가 투명 스카치테이프를 붙여 나가는 방법으로써 그 속이 텅 빈 동시에 그 속이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조각을 만들었다. 내용물이 없는 대신에 표면만 있는 조각을 만든 것이다. 이는 근작에 와서 보다 적극적인 형식을 얻게 된다. 가녀린 철사를 소재로 하여 뜨개질하듯 엮어나가는 방법으로써 마치 비정형의 고치와도 같은 형상을 만들어낸다. 안과 밖이 서로 통하는 망 구조로 된 이 구조물은 엄밀하게는 안과 밖의 경계조차 없다. 또한 외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형상은 임의적인 것일 뿐, 실상 망 구조 자체는 무한정 부풀려질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결정적인 형상을 임의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열려진 체계에 맞닿아 있다. 간혹 작가는 하나의 오브제를 구심점 삼아서 철사로 엮어 나가기도 하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구조물이 그 속에 들어 있는 오브제를 외부로부터 감싸 안는 일종의 집의 형태로 나타난다. 즉 부처를 싸안고 있는 망 구조는 그대로 절이 되고, 물고기를 싸안고 있는 망 구조는 바다가 되고, 짐승을 싸안고 있는 망 구조는 숲이 된다.
김준의 문신. 몸에 새겨진 의식(意識). 문신은 페이스페인팅처럼 신체를 꾸미는 화장술의 일종인가, 아니면 보디페인팅처럼 온몸으로 자기를 드러내고 표현하는 화술(話術, 畵話)의 일종인가. 원하는 신체 부위에다가 간단하게 붙이고 뗄 수 있는 스티커나 판박이 형 문신이 일상적인 소품으로 자리 잡은 이 시대에도 문신은 여전히 금기인가. 적어도 아직은 문신이 사회적 통념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는 것 같다. 김준은 문신을 소재로 하여 사회적 통념을 넘어서 사회적 금기와 대면케 한다.
작가는 온몸에 가득 새겨진 문신을 통해서 일종의 사회적 문신, 사회화된 문신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문신 그 자체보다는 우리 모두의 고정되고 결정된 의식, 다시 말해 삶의 한 형식으로 자리 잡은 의식을 상징하는 형태로서 나타난다. 그리고 그 의식은 아디다스, 스타벅스, 구찌, 삼성과 같은 자본주의와 소비사회의 기호로서, 붉은 악마와 같은 사회적 기호로서, 열린우리당과 같은 개인이 가지고 있는 이념과 신념으로서, 지미 핸드릭스와 같은 팬 동우회에 반영된 취향의 한 형태로서 현상한다. 우리 모두는 어떤 신념, 어떤 기호, 어떤 취향에 길들여진 저마다의 의식화된 문신을 몸에 새겨 넣고 있는 것이다. 이 일련의 작업들에서 작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의식이 그대로 이미 하나의 문신임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 모두의 몸 자체, 의식 자체가 그대로 사회적 문신이고 사회화된 문신인 셈이다.
더욱이 3D를 이용한 디지털프린트로 나타난 실사에 가까운 정교한 이미지는 이러한 문신이 함축하고 있는 사회적 컨텍스트, 사회적 아이콘을 더 효과적으로, 그리고 더 설득력 있게 어필되게 한다. 한편, 이 일련의 출력물들에 나타난 피부의 질감은 설핏 보기에 실재의 피부를 닮아 있지만, 사실은 단순한 닮은꼴을 넘어서는 이질감 내지는 이물감을 느끼게 한다. 시각적인 피부를 넘어서 촉각적으로 만져지는 피부를 느끼게 한다. 그러니까 피부보다 더 피부 같은 이미지,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이미지를 통해서 정작 신체를 결여한 순수한 표면질감을 실현해내고 있는 것이다.
박윤영, 그 날 픽톤 호수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캐나다 밴쿠버의 픽톤 농장에서 엽기적인 살인사건이 벌어졌다. 총 69명의 여인들이 살해당하거나 실종 됐으며, 호수에서 발견된 여인들의 사체 중에는 픽톤 농장에서 사육하는 돼지의 그것과 똑같은 DNA가 검출된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작가는 이 소식을 라디오를 통해서 듣는다. 그리고 작가는 이것을 생각의 씨앗 삼아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를 전개시켜나간다. 그 이야기 속에서 꿈과 현실, 가상과 실제, 사적 내러티브와 공적 내러티브는 그 경계를 잃는다. 이질적이고 무관계한 내러티브들이 하나의 결로 짜여지면서 방만하고 정교한, 이율배반적이며 오리무중인 한 편의 잘 짜여진 텍스트로 재구성된다.
작가는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바라보고 있는 그것이 그 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그 자리에는 내가 생각하는 그 이상의 무엇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적고 있다. 이 말은 ‘우리가 말을 할 때 실제로는 더 많은 것을 말한다. 왜냐하면 의식 뒤편에 있는 무의식이 말을 하기 때문이다’는 자크 라캉의 말을 연상케 한다. 우리가 현실과 실제 그리고 리얼리티로 알고 있는 것은 언제나 부분적인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사태의 전체가 아닌, 일면만을 지각하고 인식할 뿐이다. 박윤영은 이렇게 지각된 부분과 미처 지각되지 못한 부분을 하나의 결로 짜낸다. 이렇게 엮여진 텍스트는 문자 텍스트로서, 그리고 그림 텍스트로서 나타난다. 그 관계는 상호 보충적이기도 하고, 전혀 이질적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내용은 현실에 맞물려 있는 것이기도 하고, 현실로부터 동떨어진 것이기도 하다. 족자나 병풍의 형식을 빌린 작가의 먹그림 속에는 이처럼 의식과 무의식, 살해욕구와 정화의식, 욕망의 무분별한 분출과 금기의 경계를 넘나드는 마치 수수께끼와도 같은 단서들이 하나의 정경 속에 펼쳐져 있다.
여락의 주검에 대한 예의. 국도를 달리다 보면 길 위에 죽어 있는 고양이나 개의 주검들을 곧잘 볼 수 있다. 인간과 더불어 살거나 인간 가까이 사는 탓에 더 자주, 더 쉽게 목격되는 주검들이다. 거의 인간화되리만치 인간과 삶을 함께 해온 저들의 잦은 죽음은 그러므로 모순이고 아이러니다. 저들의 죽음은 나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저들의 죽음은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모든 죽음이 경이롭다는 말은 진실일까. 만약 누군가가 저들의 죽음을 낱낱이 기록한다면, 저들의 주검을 일일이 수거하여 사람이 죽을 때와 마찬가지로 망자를 달래기 위한 장례의식을 치러준다면 어떨까. 아마도 모든 죽음이 경이롭다는 말은 다름 아닌 의식을 치러주는 그에게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실제로 모든 죽음이 경이롭지는 않다. 하루살이의 죽음에서 나의 죽음을 보고, 고양이와 개의 죽음에서 나의 삶을 보고, 타자의 죽음에서 내가 존재하는 이유를 보는 공감의 소유자에게만 모든 죽음이 경이롭다. 주검들을 수습하고, 장사지내고, 그 과정을 낱낱이 기록하는 여락의 작업은 이런 타자의 죽음을 매개로 한 공감의 존재론적 인식에 그 맥이 닿아 있다.
작가가 짐승들의 주검들을 수습하고 예를 갖추는 과정 속에는 화장(火葬)과 토장(土葬), 그리고 풍장(風葬)과 같은 인간의 장례절차가 모두 들어 있다. 이를 통해서 작가는 하늘에게, 땅에게, 바람에게, 결국 자연에게 그 넋을 되돌려주는 것이다. 이렇게 짐승들의 사체가 산화되고, 썩고, 풍화된 자리에는 다시 풀이 자라고, 사람들이 그 풀 위에 쉴 자리를 편다. 이 장대하고 스펙터클한 존재론적 퍼포먼스를 통해서 작가는 개념 이전과 이후의 존재, 의미 이전과 이후의 존재와 만난다. 산 자와 죽은 자, 존재와 존재가 만나는 이 관계 속에서 작가는 존재의 주검을 증언하는 목격자이며, 존재의 주검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무당이다.
오창근의 이중자아. 오창근은 영상작업을 마치 거울처럼 사용한다. 관객으로 하여금 일종의 디지털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대면케 함으로써 자기반성을 유도하는 초상작업이다. 이 일련의 작업들에서 작가는 카메라에 포착된 관객의 모습을 해체시키고 재조립한 일종의 디지털화된 초상화를 보여준다. 이때 관객은 카메라가 자신의 모습을 정확하게 반영할 것이라는 기대와는 다르게, 시시각각 변형되어 나타나는 또 다른 자신의 영상을 목격하게 된다. 그러니까 관객은 자신의 일상적이고 총체적인 모습 대신에 마치 모자이크 퍼즐처럼 분절되고 파편화된 이질적인 모습을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관객이 기대하는 모습이 단일 주체로 대변되는 근대인의 주체의식을 반영하고 있다면, 정작 스크린에 투영된 자신의 모습은 다중 주체로 대변되는 탈근대인의 주체의식을 반영한다. 관객은 각각 근대인과 탈근대인으로 나타난 다른 주체, 차이나는 주체들 사이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이로써 작가의 초상 작업은 고정된 실체로서의 주체를 회의하게 만든다.
이처럼 분절되고 파편화된 다중주체가 근작에서는 이중주체 혹은 이중자아의 형태로서 나타난다. 디지털 거울 앞에 선 관객은 이중적인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즉 자신이 완전한 모습으로 포착된 정지 화면과 함께, 자신이 한낱 움직이는 윤곽선의 형태로 변환된 화면이 중첩되는 것을 본다. 말하자면 관객은 정지 화면 위에 움직이는 윤곽선이 포개진 형태의 자신을 목격하게 되며, 이는 마치 자아가 분열되는 과정을 형상화한 듯한 인상을 준다. 여기서 관객은 전작에서와 마찬가지로 정지된 화면의 완전한 모습이 나인지, 아니면 그 형태가 텅 빈 움직이는 윤곽선이 나인지에 대한 정체성의 혼란에 빠진다. 질 들뢰즈는 주체란 우리가 막연하게 주체라고 부르는 내용 없는 이름(허명 虛名)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아마도 주체란 작가의 작업에 나타난 모자이크 퍼즐처럼 부분들의 우연한 집합이거나, 또는 움직이는 윤곽선에 나타난 것처럼 흔적들의 재구성이 아닐까. 주체란 사전에 주어진 것이라기보다는 사후적으로 재구성된 것이다.
이부록의 워바타(Warvata). 영화 <비디오드럼>은 가상과 현실 사이에서 길을 잃고, 현실 속에서 마치 악몽과도 같은 가상을 겪는 인격체의 한 전범을 보여준다. 그리고 단지 기기의 조작만으로 적지에 폭탄을 투하하는 전투기조종사는 동시대를 가상의 시대, 시뮬라크르의 시대로 본 장 보들리야르의 가설에 동의하게 한다. 그는 어떠한 양심의 가책으로부터도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전쟁을 게임처럼 즐기기조차 한다. 그에게 전쟁이라는 현실은 한낱 모니터에 나타난 그래픽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가하면 내가 마음으로라도 어떤 사람을 해하게 되면 그 악한 마음이 씨앗이 되어 전세계를 피로 물들일 수 있다는 ‘나비효과’는 가상과 현실이 상호 작용하는 고전적 메커니즘을 이해하게 한다. 이제 우리는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사라진 시대, 마치 그림자처럼 가상과 현실이 겹쳐진 시대를 살고 있다. 이부록은 일종의 이중그림 장치인 렌티큘러(보는 각도에 따라서 그 이미지가 달라져 보이는 장치)를 통해서 이처럼 현실에 중첩된 가상, 현실이 은폐하고 있는 욕망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이면 읽기와 행간 읽기에 연이어진 독법(讀法)의 또 다른 한 버전을 제안한 것이다.
작가는 이를 전쟁이라고 본다. 즉 작가는 현실의 이면에서 전쟁을 읽고, 일상의 행간에서 전시체제(戰時體制)를 읽어낸다. 교실의 칠판에 비상구표지판이 겹쳐 있는가 하면, 도열해 있는 전경들을 배경으로 해서는 사격 표지판이 포개져 있다. 작가는 현실에 잠재된 전쟁, 살인과 폭력과 같은 욕망을 지시하기 위해서 가상의 인격체를 뜻하는 아바타(Avata)를 변형한 워바타(Warvata)를 불러낸다. 일종의 전쟁 캐릭터인 워바타는 동시대가 사실상 전시체제 하에 있음을 증언하기 위해서 호출된 것이다. 말하자면 은폐되어져 있거나 공공연한 개인에 대한 감시와 통제, 억압과 폭력의 계기들을 일종의 전쟁상황으로 극화한 것이다. 나아가 전쟁은 스펙터클 소사이어티를 위한 매뉴얼, 정치와 사회는 물론이고 일상과 심지어는 오락과 같은 놀이마저도 지배하는 매뉴얼이 되었다. 워바타는 이처럼 일상 속에 유포된 잠정적인 전쟁의 계기들을 채집하고 드러내 보여줌으로써 전시체제의 풍경으로 변질된 일상을 말해준다.
정진아의 분변학(糞便學). 유쾌한 똥싸기. 정진아는 합성수지로 똥의 형태를 만든 다음, 그 위에다가 화려한 천으로 장식한다. 그리고 천의 표면을 스팽글과 같은 반짝이 무늬로 치장한다. 그런가 하면 똥 형태의 표면을 색색의 타일로 치장한 것도 있다. 작가는 이러한 똥 오브제에다가 ‘분예기’(糞藝記)라고 명명하는데, 대충 똥의 예술적 가능성이나 미학적 의의를 묻는 말일 것이다. 화려하고 장식적인 부드러운 천을 소재로 한 형형색색의 똥 오브제들이 우호적이면서도 유혹적인 인상을 준다. 이렇듯 똥을 유혹적인 오브제로 보는 이면에는 신체로부터 분비된 모든 저급한 물질에 수반되는 감각적 쾌락과 욕망에 대한 공공연한 긍정이 놓여 있으며, 짐짓 진지한 태도와는 거리가 먼 키치적이고 팝적인 가벼움의 미학에 그 맥이 닿아 있다. 프로이트는 똥을 유아기에 나타난 성욕의 무의식적 발현으로 보는데, 작가는 이러한 프로이트의 입장에 공감하고 그 가치를 복원한 것이다. 그리고 진리와 진실, 초월과 숭고와 같은 거대담론이 회의에 붙여진 사실을 인정하고서, 저급한 물질, 덧없는 욕망, 사사로운 담론들로써 이를 대체한다. 작가는 이 모든 일들을 똥의 이름으로 수행하고 실천한다.
작가의 똥 오브제들은 개념으로 분화되기 이전의 물질 자체에 대한 유아의 인식단계(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코라 chora)에, 유아가 상상계로부터 상징계로 편입하는 과정에서 억압한 무의식적 욕망(자크 라캉의 오브제 a)에 접맥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선과 악, 미와 추, 자연과 문명을 구분하는 모든 이분법적 구분을 넘어서는 미하일 바흐친의 양가성과 카니벌리즘의 개념과 통한다. 바흐친은 고상하고 이상적이고 추상적인 모든 것을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차원으로 격하하고 저속화하는 카니발의 그로테스크 리얼리티로부터 민중의 진정한 계급성과 생명성을 본다. 그리고 양가성이야말로 이를 가능케 하는 핵심적인 요소라고 본다. 작가의 똥 오브제들은 이처럼 그 속에 양가성을 함축하고 있으며, 정의 내리기와 경계선 긋기에 바탕을 둔 체제 전복적인 전략을 함축하고 있다.
홍성철의 재현할 수 없는 나. 나, 자아, 에고, 이드, 주체... 이는 단지 에고이즘과 나르시시즘을 증명하기 위해서 호출된 이름들의 목록에 지나지 않은 것일까. 그 이름들에 대한 집착은 모든 것들을 어김없이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려 놓고야 만다. 그럼에도 자기 자신을 향한 물음들, 자기 반성적인 물음들은 재현에 대한 회의를 되돌려 줄뿐이다. 홍성철의 작업 속에는 이처럼 나 스스로는 결코 나를 볼 수 없다는, 나는 나를 재현할 수 없다는 재현에 대한 회의가 들어 있다.
작가의 영상에 포착된 관객은 자신의 실체가 아닌, 자신의 잔상을 본다. 자신의 움직임 하나하나는 순간적인 과거 속으로 편입되고, 그 순간이 포착한 이미지를 보는 것이다. 지연된 자기, 연기된 자기를 보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결코 현존하는 자기를 볼 수가 없다. 언제나 과거 속에 편입된 자기를 확인할 수 있을 따름이다. 과거로 되돌려진 시간의 왜곡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자기, 시간의 역류를 통해서만 볼 수 있는 자기, 잔상과 흔적을 통해서 재확인하고 재구성해낸 자기는 부재를 통한 존재의 증명에 그 맥이 닿아 있다. 즉 존재 자체로는 존재를 증명하지 못하고, 대신에 존재의 부정인 부재를 통해서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다. 작가는 각각 컬러와 흑백으로 반전된 반복 영상을 내보내는데, 이 역시 존재와 부재간의 모호한 경계를 강조한다.
그러므로 관객은 현존하는 나와 순간적인 과거 속에 편입된 나와의 사이에 벌어진 차이를, 틈을 인식한다. 그리고 회의에 빠진다. 나는 영상밖에 있는 현존하는 자인가, 아니면 영상 안쪽에 보이는 순간적인 과거 속에 편입된 자인가. 나의 실체, 나의 의미는 끊임없이 지연되고 연기될 뿐, 그 궁극적인 실체와 의미는 끝내 붙잡을 수 없다. 나는, 나라는 실체와 의미는 그 자체로서 닫혀질 수가 없는 것이다. 지연된 자기, 연기된 자기의 모습을 보여주는 작가의 영상거울은 ‘나는 내가 아닌 곳(내가 부재한 곳)에서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생각할 수 없는 곳에 존재한다’ 는 자크 라캉의 전언을 재확인시켜준다.
한국미술평론가협회 주최 학술 심포지움일 시 : 2005. 7. 28 오후 1시-5시
장 소 : 포스코 빌딩 4층 아트홀
주 제 : 비평의 위기-미술비평과 전시기획 사이
발제자
다니 아라타(미술평론가, 우쯔노미야 미술관 관장, 일본)
인 슈앙 시(큐레이터, 중앙미술학원 교수, 중국)
이 준(미술평론가, 삼성리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한국)
이원일(큐레이터, 제5회 광주비엔날레 아시아 담당 큐레이터)
윤진섭(미술평론가, 호남대 교수, 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