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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속의 국가로 성장하기까지 1세기 동안의 한국 미술을 대상으로 기획한 1,800여점 전시
≪한국미술 100년≫전은 광복 60주년을 기념하여 ‘은둔의 나라’에서 세계 속의 국가로 성장하기까지 1세기 동안의 한국 미술을 대상으로 기획되었다. 금년에는 1905년부터 1959년까지의 미술을 다룬 ≪한국미술 100년≫전(1부)이 열리고, 내년에는 1960년부터 2005년까지의 미술을 다루는 ≪한국미술 100년≫전(2부)이 개최될 예정이다. 지난 100년은 고난과 시련으로 점철된 역사였으며, 그러한 사회·문화적 굴곡 속에서 미술 또한 다양한 변화를 거쳤다. ≪한국미술 100년≫전(1부)은 이러한 굴곡의 역사와 함께한 시각문화로서의 미술을 살펴보기 위하여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기준으로 다섯 시기로 나누어 구성되었다. 조선왕조 미술과 근대 미술과의 연속성 및 변모 양상은 1876년부터 1905년까지를 다룬 「전사前史」를 통하여 파악할 수 있다.
1876-1905 : 전사前史 - 근대를 향하여 1876년 개항에서 1905년 을사조약까지의 시기는 조선왕조 말기와 대한제국기에 해당하며, 제국주의 열강의 국내 진출로 전통사회와 서구 문명과의 충돌이 빚어졌다. 가장 큰 변화의 움직임은 독립협회 운동(1896~98)과 대한제국을 수립한 광무개혁(1897)을 꼽을 수 있다.
조선 왕조 말기의 미술은 전통미술의 형식과 내용을 지키면서 시대적 위기에 대응하고자한 일군의 화가들과 명암법, 원근법 등 서양화 양식을 수용함으로써 시대 변화에 민첩하게 반응하였던 화가들로 크게 나뉜다. 서양인의 내한과 사진기의 등장, 외국 박람회의 참가 등 근대적 문명을 경험하면서 공예가 식산흥업의 일환으로 국가적 차원에서 장려되는 한편, 동도서기東道西器적 인식에 입각한 사군자가 많이 그려졌다.
독립협회가 민권사상에 입각한 입헌민주국가를 꿈꾼 반면, 광무개혁은 황제권을 강화하고 식산흥업을 통한 상공업 진흥으로 부국강병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상호 대립된다. 그러나 독립협회와 광무개혁은 국민국가 건설을 목적으로 하였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며 근대국가의 이미지 구축을 위하여 독립문, 원구단 등의 건축물을 세우고, 국가의 상징인 태극문양과 황실의 상징인 오얏꽃(梨花) 문양을 폭넓게 사용하였다.
1905-1919 : I. 계몽과 항일 사이 일본의 반半식민지로 전락하게 된 을사조약(1905)에서 3·1 독립만세운동(1919)에 이르는 기간에는 의병의 무장투쟁, 언론·교육·출판·문학·예술을 중심으로 펼쳐진 애국계몽운동과 3·1 독립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한국미술 100년≫전(1부)의 도입부인 「계몽과 항일 사이」는 국권 회복의 주체를 국민에 두고 국민을 계몽의 대상으로 삼은 “계몽의 행군”과, 일제에 대항한 민족투사들의 저항 행적과 독립을 향한 강렬한 염원을 가시화시킨 “독립의 함성”이라는 장으로 구성되었다. 한편 조선을 방문했던 외국인 화가들의 그림과 그들의 조선 여행기 속에 담긴 스케치 등을 통하여 외국인의 눈에 비춰진 조선을 다시 보는 “그들이 본 조선” 섹션이 특별 코너로 꾸며졌다.
1. 계몽의 행군 계몽운동은 근대적 지식인층이 국민 계몽을 통하여 부국강병을 이루고 문명강국이 됨으로써 독립을 획득할 수 있다는 신념하에 일어난 사회 전반의 실천 운동이었다. 1909년 6월 2일 대한민보 창간호 제 1면에 게재된 이도영의 삽화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만화이자 일제의 강제합방 시도에 저항하는 반일적·계몽적 내용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대한협회 교육부원으로 활동했던 이도영이 그림본을 그려 출간한『도화임본』(1908)과『연필화임본』(1910)은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교과서로서 학교교육을 통하여 서양화법의 보편화에 이바지하였다. 이와 함께 일본 문부성에서 발행하여 국내에서 사용하였던 『고등소학모필서첩』과 화첩 등도 전시된다.
성당, 학교, 병원, 공공기관 등 20세기 초에 세워진 서구식 건축물을 통하여서도 근대기에 추진된 계몽 활동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소년』, 『아이들 보이』, 『청춘』 등 우리나라 초기 잡지의 표지화 및 삽화를 통하여 계몽운동에 동참한 고희동, 안중식 등 근대 초기 화가들의 계몽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2. 독립의 함성 “독립의 함성”에서는 오세창이 쓴 <독립선언서>와 우리나라 역대 서화가들의 사료를 집대성한 『근역서화징』및 정종여의 <오세창 초상>이 함께 전시됨으로써 구한말의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이며 민족서화계의 정신적 지도자로 활약하였던 오세창의 업적과 정신을 기린다. 그리고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항거하여 자결했던 민영환의 초상사진, 그가 자결한 자리의 혈흔에서 자란 대나무를 그린 그림, 의병장 최익현의 초상화, 우국지사 김영상金永相이 1911년에 독립을 역설하다 잡혀 옥사한 과정을 담은 <춘우정순절도>, 김구·안창호·안중근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글씨 등이 전시된다. 그밖에 일제 식민정부 관료와 친일파를 비난하는 만화 및 삽화, 독립 만세를 부르는 현장 사진 등을 통하여 우리 민족의 저항정신의 맥을 짚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3. ‘그들’이 본 조선 16세기만 해도 세계지도에 Corea는 조그만 섬으로 표시되었을 뿐이었으나 개항 이후 서양인, 일본인의 내왕이 빈번해지면서 이국적인 조선의 이미지가 국외에 알려지게 되었다. 20세기 초 한국인의 체격을 측정한 사진, 청일·러일전쟁을 겪으면서 해외에 보도되었던 신문 삽화, 조선의 풍속 엽서와 사진첩, 외국인의 조선방문기 등에는 조선에 대한 외국인의 이국적이고 우월적인 시선이 발견된다. 한편 1899년 조선에 와서 고종과 순종의 어진을 유화로 그렸던 휴버트 보스Hubert Vos의 <서울 풍경>과 두 번에 걸쳐 서울에서 개인전을 열었던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 일본에서 우키요에 판화가로 활약했던 폴 쟈클레Paul Jacoulet 등의 판화작품을 통하여 서양인의 눈에 비친 조선의 산천과 풍습을 만날 수 있다. 기생 이미지는 단지 이국의 여인 풍속이라는 차원을 넘어 식민국과 피식민국의 지배/피지배 관계를 성적으로 드러낸다. 일본 미술계의 거두인 후지시마다케지藤島武二, 쯔지다 바쿠센土田麥僊 등이 조선 여행 후에 남긴 여성 그림들은 기생 이미지가 고급미술 속에 스며든 예이다.
1919-1937 : II. 신문화의 명암 1919년 3·1 독립만세 운동이후 1937년 중일전쟁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은 문화적으로 가장 만개한 시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외형적 근대화의 이면에는 조선의 전통문화가 왜곡 폄하되고 서구의 표피 문화만을 소비하는 등 어두운 그늘이 존재한다. 「신문화의 명암」에서는 근대의 무지개를 쫓는 모던 보이·모던 걸의 일상, 국적 불명의 도시, 속된 대중문화를 비판하며 잃어버린 고향·자연·동양으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이념 등이 복합적으로 펼쳐진다.
1. ‘대경성大京城’을 걷다 조선의 서울이자 식민지의 수도인 경성은 청계천을 경계로 일본인의 거주지 남촌과 한인 거주지 북촌으로 이분되어 도시화가 진행되었다. 카페, 레스토랑, 백화점, 영화관, 호텔 등이 밀집한 남촌은 오늘날의 중구, 충무로, 명동에 이르는 진고개 일대를 일컫는다. 반면 종로통에 불과했던 북촌은 전통 한옥과 나지막한 상점들, 어두컴컴한 밤거리로 대변되는 도심 속의 미개발지역으로 남촌과 극도의 대비를 이루었다.
1930년대 초 경성에는 1천개 가량의 카페가 있었으며 북촌인 종로에도 우후죽순으로 카페가 생겨났다. 첨단 유행을 좇는 모던 걸·모던 보이들은 카페에 앉아 술이나 커피를 마시면서 인생과 사랑, 예술을 논하였고, 수입영화에 나오는 주인공의 머리 모양과 의상을 따라하고 도심을 산보하면서 백화점 쇼윈도우의 진열품을 눈여겨보았다. 자동차와 엘리베이터의 기계음은 신세계의 도래를 알리는 경쾌한‘소음’이었다.
외형상 근대 도시로서의 위용을 갖춘 경성의 이면에는 남촌과 북촌으로 이분화된 발전상의 기형성 외에도 ‘토막민’이라는 도시빈민의 문제가 있었다. 땅을 파서 그 단면을 벽으로 삼고 양철이나 판자로 지붕을 삼은 토막은 한일합방 이후 꾸준히 증가하였는데, 1934년에 경성시가지계획이 실시되면서 토막민의 이주가 강행되었다. 철거된 토막민 마을에는 새로운 도시형 주거지역과 상공업지역이 건립되었다.
2. 서화에서 미술로 보통학교에서의 ‘도화圖畵’교육 실시와 1920년대 초 서화협회와 조선미술전람회의 설립으로 미술의 내용과 형식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수묵·채색화의 경우 기존의 관념적 산수화에서 탈피하여 실재하는 현실의 자연 경관이나 인간 생활상을 소재로 채택, 이를 사실적 수법으로 그리는 경향이 강해졌다. 일본화와 서양화의 영향으로 사의寫意와 여백 및 필묵의 효과를 중요시하던 것에서 형상의 묘사와 채색 효과에 치중하게 된 것이다. 유화는 일본에서 돌아온 유학생들과 조선미술전람회의 서양화부 출품작들을 통하여 대중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는데, 1930년대에 이르면 수묵채색화가보다 유화가들의 수가 더 많아지는 등 미술의 대표 장르가 되었다. 인체를 미적 주요 대상으로 삼은 근대 조각은 1920년대 초 일본 동경미술학교 조각과를 나온 김복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조각가의 수가 매우 적었고 작품성과도 괄목할만하다고 하기 어려우나 해방 이후 한국조각의 기틀을 마련하였다는 의미가 있다.
3. 조선 색과 동양 미 식민지 시대 미술가들은 서양·일본의 미술 문화에 압도당하면서도 상대적으로 조선다운 것을 찾아 조선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조선다운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해답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한복을 입은 사람들, 초가집을 비롯한 건축물, 빨래하거나 아이를 업은 여인, 관혼상제의 풍속, 한복의 색감 등 조선적 소재들은 외국인의 눈에 포착된 이국적 풍속이었을 뿐이며, 한국인의 삶의 결은 그러한 소재적 취향을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구의 문명사회가 동양의 정신문화보다 우위에 있다는 근대적 가치관에 입각할 때 문명보다 자연에 가까운 조선 이미지는 민족적 열등성을 각인시키는 효과도 있어 일제의 식민문화정책으로 역이용되기도 하였다.
한편 일본의 대륙팽창을 지원하는 대동아주의와 관련되어 동양주의가 문화계에 널리 침투하여 수묵화가 다시 유행하고 불상 등 동양적 소재가 많이 그려지기도 하였다. 복고적 성향이 강한 관변 동양주의와는 별도로 김용준, 김환기 등 반관변 동양주의자들은 동양의 정신문화를 서양의 물질문화보다 우위에 두고 전통을 계승하되 시대적 미감과 연계시키는 방향을 취하였다.
4. 전위의 깃발 아래 1910년대에 서양화 1세대가 배출되고 20년이 지난 1930년대 초, 격렬한 표현주의적 그림으로 개인전을 연 구본웅은 화단에 매우 신선한 충격을 안겨 주었다. 이보다 앞서 1920년대 중반경에 김복진, 안석주를 중심으로 미래파나 러시아 구성주의 양식을 빌어 프로미술 운동이 추진되었는데, 잡지의 표지화 및 삽화를 통하여 그들의 행적을 추적할 수 있다.
구본웅의 <여인>과 사토미 가쯔조里見勝藏의 <女>를 비교하면 알 수 있듯이 한국 근대기의 전위미술은 서구와 일본의 모방과 이식이라는 평가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한국의 자연, 전통 건축과 도자기를 전위로 인식하여 추상화의 자원으로 삼은 김환기, 정치적 이념이나 시국 상황과 무관하게 예술의 자유를 포기하지 않았던 유영국 등의 존재는 한국 추상미술의 긍정적 출발점으로 평가된다. 한편 시인 이상의 모던한 건축지 표지화(1931), 동경미술학교 졸업작품인 이순석의 책표지 디자인(1931)은 한국 전위미술의 첫머리에 놓인다.
5. 노라의 후예들 20세기 이전에는 기녀 이외의 여성을 그리는 전통이 거의 없었던 반면 1930년대에 이르면 조선미술전람회 동서양화부 출품작 중 인물화의 60% 이상이 여성인물화였고, 특히 동양화부에 출품된 인물화의 80% 이상이 여성인물화였다. 이 통계는 여성에 대한 인식과 시각의 변화를 증명해준다. “노라의 후예들”에서는 근대기에 그려진 여성 인물화들을 펼쳐보임으로써 여성에 대한 사회인식의 변화와 여성 스스로의 변화상을 밝히고자 하였다. 특히 유교적 여성관을 거부하고 사회라는 공적 공간에 뛰어든 신여성들을‘노라의 후예들’로 기리는 장을 마련하였다.
1937-1945 : III. 모던에서 황민으로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1938년 조선에 국가총동원법을 공포하고 ‘대륙병참기지화’정책을 추진하였으며, 이를 효율적으로 시행하기 위해 황국신민화 정책과 내선일체를 시국 이념으로 강조하였다. 수많은 친일 협력단체가 창설되고 시국간담회가 개최되어 일제의 전쟁수행을 적극적으로 지원함에 따라 조선미술계도 점차 일제 식민통치의 선전교화 수단으로 악용되었고, 미술계의 관변화와 친일화가 심화되었다.
1. 예술가의 방 “예술가의 방”은 국권을 상실한 나라의 화가, 조각가, 사진가 등 예술가들의 내면을 조명하기 위하여 꾸며졌다. 예술가의 자화상, 창작의 산실인 작업실, 예술가가 그린 예술가 등을 통하여 자기만의 내밀한 공간에서 인간과 사물, 자신과 세계를 응시하는 예술가의 초상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윤동주의 <자화상>, 서정주의 <자화상>, 이상의 <거울>등 시인들의 자기 고백적 시와 월북화가 정종여가 쓴 <나의 그림>이라는 시를 예술가의 초상들과 함께 전시함으로써 피식민국의 예술가가 겪었을 고뇌와 절망, 희망과 극복의 의지를 전달하고자 하였다.
2. 전시체제와 미술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비상 전시체제에 돌입하였으며 조선의 미술계는 일제의 침략전쟁을 지원하는 도구로 전락하였다. 일본인 화가들을 중심으로 전쟁미술전람회와 각종 시국전람회가 개최되었고, 침략전쟁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활동에는 조선인 유력자나 각종 친일 단체 특히 대중적 영향력이 큰 문화예술 분야의 지도급 인사들이 대거 동원되었다. 김기창, 심형구, 김인승, 김경승, 윤효중 등은 경성미술가협회, 단광회, 조선남화연맹 등의 단체에 소속되어 활동하였고, 반도총후미술전람회, 결전미술전람회 등 전쟁을 선동하는 전시에 출품하였다.
1945-1953 : IV. 광복과 분단 1945년 8월 15일, 35년간의 식민 상태가 끝나고 해방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해방의 환희도 잠시, 미군정 하의 한국에서는 민족과 반민족, 보수와 혁신, 좌우의 이념대립이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곧이어 1950년 6월 25일 한민족을 둘로 가른 전쟁이 시작되었다. 냉전체재의 산물인 한국전쟁은 수많은 사상자와 전쟁 피해를 남겼으며, 1953년 휴전에 따른 남북 분단의 상황은 반공·반미의 대결, 실향과 유랑의 역사를 초래하였다.
1. 되찾은 산하 해방의 환희는 새로운 이상국가 건설에 대한 열망으로 직결되었으며, 시대적 열기를 드러내는 도상으로 청년상과 군상이 많이 그려졌다. 이쾌대의 <군상-4>와 <해방고지>, 문신의 <고기잡이>를 통하여 이 시기에 많이 그려졌던 청년 군상 계열의 경향을 짐작할 수 있다. 김만술의 <해방>은 몸을 결박한 밧줄을 푸는 광경으로 민족의 해방을 은유한 조각이다. 1948년작인 정종여의 대규모 병풍 그림 <독수리> 또한 전사, 용맹, 권위를 상징하는 독수리를 통하여 해방 직후의 분위기를 드러냈다. 그밖에 박문원을 비롯한 미군정 하 좌익 미술인들의 활동을 잡지 표지 및 삽화를 통하여 소개하였다.
2. 전쟁, 그리고 전후풍경 전쟁이 휩쓸고 간 폐허와 전쟁민의 삶이 그림과 사진을 통하여 재현된다. 1·4후퇴 이후 한동안 인적이 끊긴 폐허로 변한 도시, 대도시의 언덕과 공터에 급속히 증가한 판자촌 달동네, 역전 앞의 지게꾼과 날품팔이, 구두닦이 고아, 여성 가장과 소녀 가장, 양색시를 비롯한 미군 문화 등 캔버스와 렌즈에 포착된 고통과 불안, 빈궁의 역사를 재확인 할 수 있다.
3. 실향·이산·유랑 1946년 후반부터 좌익계열의 미술가들은 지하로 잠입하거나 북한으로 넘어갔으며, 전쟁을 전후로 하여 월남·월북 미술가들이 증가하였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이중섭의 작품은 실향과 이산의 역사에 대한 절절한 증언이다. 김용준, 최재덕, 이쾌대, 배운성 등 월북작가들의 작품과 함께 폴란드에서 유럽 정통판화를 배워 북한에 정착시킨 함창연이 독일과 빈 미술제에서 수상한 판화 작품 <밭갈이>와 <화전민>이 소개된다. 또한 1950년대 초 레핀아카데미의 교수로 북한에 파견돼 평양미술학교 설립에 관여하면서 북한 미술의 근간을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던 변월룡의 그림도 볼 수 있다. 조양규, 전화황, 김세용 등의 작품에서는 일본과 소련 등지로 흩어진 유랑과 이산의 민족사를 확인할 수 있다.
1953-1959 : V. 냉전의 그늘 1953년 8월 15일 정부의 서울 환도로 3년에 걸친 전쟁은 휴전되었고, 남한의 이승만 반공체제와 북한 공산체제의 대치로 냉전 체제가 고착되어갔다. 전후 폐허의 한복판에서도 재건의 의욕은 다시 일어났다. “관전과 민전”에서는 이러한 재건의 의지가 대한민국미술전람회를 통해 제도권 미술로 자리 잡게 되는 상황이 그 밖의 단체전 참여 작가들의 작품과 함께 전개된다. “세계 속으로”에서는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꿈꾸며 세계를 향해 눈을 돌린 작가들의 작품 경향을 살필 수 있다.
1. 관전과 민전 대한민국미술전람회는 전후 미술계 최대의 행사였다. 국전 초기에는 전후의 재건 의지를 살려 새로운 경향의 미술을 수용하려는 진취성도 있었으나 1950년대 중반을 넘어가면서 불공정 심사 문제, 국전을 둘러싼 힘의 분배 문제로 끊임없는 잡음이 일어났다. 국전이 자연주의 계열의 보수적 인사들에 의해 독점되어가자 1950년대 후반에 이르면 이에 반하는 단체들이 결성되었다. 모던아트협회, 현대미술가협회, 창작미술가협회, 신조형파 등의 단체들은 창조와 조형 정신의 회복을 강조하면서 제도권 미술 일변도의 화단에 변화를 꾀하였다.
2. 세계 속으로 1950년대에 이르러 미술가들은 처음으로 일본을 거치지 않고 유럽이나 미국과 직접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였다. 많은 미술가들이 해외 진출의 꿈을 실현하였는데, 남관, 권옥연, 김환기, 한묵 등 중진 미술가들 대부분이 파리를 선택한 반면, 전성우, 김정숙 등 극소수 젊은 학생들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들의 유학과 해외 전시 체험은 민족주의 미술론이 담론의 중심을 차지하던 미술계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었다.
1950년대 국내 미술계에 폭넓게 소개된 나라는 미국이다. 뉴욕 근대미술관에서 기획한 사진 순회전인 ≪인간가족전≫(1957)에는 30만명의 인파가 몰렸을 뿐 아니라 향후 국내 사진계의 진로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같은 해에 열린 ≪미국현대 회화 조각 8인작가≫전(1957) 은 동시대 미국 현대작가들의 작품전으로 국제현대미술의 동향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며 한국의 젊은 미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 부대행사
ㆍ개막축하퍼포먼스 소리공연 : 1930년대를 가다
8. 12(금) 3:10 p.m. 주현관
ㆍ한국근대영화제
8. 12 17:00 어화
8. 13 13:00 자유부인 / 16:00 돈
8. 14 13:00 자유만세 / 14:00 피아골 / 16:00 하녀
미술관 대강당
공동주최 : 국립현대미술관, 한국영상자료원
ㆍ릴레이강연회 관람객과 떠나는 근대이야기
9. 3 김현숙(미술)
9. 10 황종연(문학)
9. 24 이효인(영화)
10. 1 윤인석(건축)
오후 2-3시, 미술관 중앙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