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정보
노암갤러리 기획 동감-끝나지 않은 즐거움展을 갖는다. 이번 전시는 1970-80년대에
미술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4인의 작가들이 동양화의 형식과 개념을 어떻게 현대적으로 소화하여 그 표현 영역을 다양하게 확장시켜주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전시이다. 이번 전시를 통해서, 동양화가 그 재료와 형식의 한계를 넘어서 시각예술이라는 보다 커다란 무대로 아무런 문제없이 진입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하고자 한다.
同 感
-
끝나지 않은 즐거움Sympathy - Endless Pleasure
하계훈│미술평론가
19세기 말을 전후하여 동양 문화권의 나라들은 서구문화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양쪽 문화 사이에 확연히 드러나는 이질감을 충분히 소화해내지 못한 까닭에 아직까지 몇몇 어색한 개념들을 유효기간의 제한도 없이
유통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우리의 의식 속에 고착된 몇 가지 관념을 낳았는데 그 한 예가 회화를 동양화와 서양화로 구분하는 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다분히 재료와 형식 중심의 개념으로서 정작 작품을 창작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라고 볼 수 있는 작품의 주제나 창작의 주체 등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에서는 회화 형식과 재료에 대한 편협한 관념에 얽매여 보다 넓은 표현과 사고를 방해하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특히 동양화에 대한 보수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의 경우 최근에 들어서 종래의 이분법적 회화개념뿐 아니라 미술 영역에 새롭게
도입되는 다양한 매체들의 홍수 속에서 지나치게 형식논리와 재료의 순수성을 고집하며 시장의 관심에서도 조금씩 멀어지게 됨으로써 그 존재의 위기감을
느끼는 상황까지 가기도 한다.
이번 전시는 1970-80년대에 미술대학에서 소위 동양화를 전공한 4명의 작가들이 동양화의 형식과 개념을
어떻게 현대적으로 소화하여 그 표현 영역을 다양하게 확장시켜주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전시다. 이번 전시에 참가하는 작가들의 손에 의해 동양화는 그
재료와 형식의 한계를 넘어서 시각예술이라는 보다 커다란 무대로 아무런 문제없이 진입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받고 있으며 동양화와 서양화의
장르구분이 작가에게 부과하는 심리적 구속감을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석철주는 원래 16세부터 청전 이상범 문하에서 그림을 배웠으며 남들보다 조금 늦게
대학을 마치고 1980년대 초부터 수묵산수 뿐 아니라 채색화에서부터 아크릴을 이용한 회화를 거쳐 지금의 독특한 표현방식을 개척해왔다. 아크릴
물감을 화면에 바르고 그것을 다시 물로 닦아내면서 단색으로 전통적인 산수화 화면을 만들어내는 그의 최근 작업은 표현 재료와 형식에 있어서 동,
서양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그는 어릴 적부터 꾸준히 수련해 온 전통회화 기법을 기초로 다양한 재료의 속성을 철저하게 파악함으로써 자신의 화면에서
고도의 표현의 자유와 자율성을 확보하고 있다.
이번에 출품한 작품들은 아크릴 물감을 이용하여 바탕색을 바르고 그 위에 흰색을 덧씌운 후
물을 넣은 에어 건과 평붓으로 표면의 물감을 지워가며 바탕을 드러내는 형식으로서 새로운 느낌의 전통산수화를 연상시킨다. 이렇게 제작되는 그의
작품들은 작가의 창작의도와 시간에 따라 상태가 달라지는 물감과 물의 자율적 상호작용이 혼합되어 오묘한 효과를 낸다. 수다스럽게 여러 가지 색을
사용하지도 않았지만 관람자의 눈앞에 펼쳐지는 파노라마적인 작품은 자연 풍경의 화려함과 장엄함, 그리고 신비로움을 느끼게 해준다. 작업의 특성상
물감의 건조상태를 민감하게 파악해야 하므로 작업에 수반되는 긴장감과 절제, 그리고 육체적 노동의 양은 보통의 작가들보다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다.
예술가의 천재성과 작품의 탁월성은 아직까지도 예술가와 예술에 대한 사회적 효용과 가치를 설명해주고 있다. 그러나 어느 예술분야이건
간에 영감에 의존한 순간적인 천재성의 섬광에 의존하는 창작행위는 점점 지속적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작가에게 성실한 노력과
집중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덕목으로 요구된다. 그리고 그 바탕위에 작가의 예술적 감수성과 천재성이 발휘되어야 한다. 석철주의 작가로서의 근면성은
그의 작업실이 좁게 느껴질 정도로 가득 찬 작품의 양에서도 짐작할 수 있으며 다작에 수반되기 쉬운 태작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그의 작업의
진정성을 짐작할 수 있다.
문인상은 초창기의 강렬한 채색화에서 점차 모노톤에 가깝게 정리된 화면으로 이행해오는
작품의 표현적 편력을 거쳐 지금의 작품이 탄생되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개인적으로 1980년대 광주를 현장에서 체험한 작가로서 당연히 화면
안에 수반되었던 강렬한 감정의 표현이 초창기의 작품에 선명한 색으로 묻어 있었으나 그 메시지는 지나치게 직설적이지도 않으며 한풀이식 원망이나
고발이 담겨있지도 않았다. 삶의 퇴적층이 점차 두껍게 쌓여가고 직설적 메시지를 능가하는 은유적 표현의 힘과 지혜가 늘어가면서 그의 화면은 낮은
목소리, 그러나 결코 약하지 않은 목소리의 은은한 호소력을 담아내고 있다.
최근의 그의 화면에는 기존의 상품화된 물감이 아니라 작가
자신이 자연의 재료를 응용하여 직접 만들어내는 염료를 사용하여 전통적 화법을 응용한 은은한 배경을 만들어내고 그 위에 커다란 민들레라는 야생화의
실루엣을 먹으로 그려내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는 화면의 뒤쪽으로부터 자연 염료를 되풀이하여 채색하여 전면의 화면으로 배어나오는 기법을 통해
화면 위에 은은하고 오묘한 자연색의 내러티브를 조성한다. 한눈에 쉽게 들어오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문인상의 작품에서는 한국화적 전통에 대한 존중과
화가로서의 성실한 노동이 커다란 화면을 메움으로써 작품의 무게를 더하게 해준다.
배경에서 우리의 전통화법을 응용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정작
주요 모티브로서의 민들레는 붓과 먹을 이용한 방법이 아니라 테이프를 이용한 윤곽의 트리밍과 우리가 마당을 청소할 때나 쓰는 것으로 알고 있는
싸리로 만든 붓을 이용하여 갈필의 느낌과 먹물 뿌리기의 느낌을 주고 있어서 배경과 중심소재 사이의 표현기법상의 대조를 이룬다.
우리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문인상은 작업 초기에서부터 영웅적 존재를 드라마틱하게 다루거나 대상을 미학적으로 탐닉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로 살아가면서도 자기존엄성을 쉽게 버리지 않는 인물과 대상을 애정 어린 눈으로 관찰하여 온 것을 화면에 담아내고
있다. 이번에 출품된 커다란 민들레 그림들도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해보면 별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으면서 들판의 잡초처럼 자라지만 강한 생명력을
보여주는 이 꽃의 속성에서 스러지지 않는 범부의 저력과 생명력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김지현은 화면의 크기를 훨씬 뛰어넘는 삶의 근본적인 주제를 다룬다. 그는 동판을
이용하여 인체의 얼굴과 손발 부분을 표현하기도 하고 화면 위에 한지를 이용한 저부조 형식으로 인체와 해, 달, 꽃 등의 자연의 이미지들을
표현함으로써 이 세상 모든 공간--하늘, 육지, 물(바다)--에 존재하는 다양한 생명체들이 빚어내는 음과 양의 원리, 생성과 진화 그리고 소멸
등의 순환성, 그 속에서 서로 화합하는 조화 등을 보여준다.
김지현의 작품에서는 이미지의 표현에 있어서도 민화 속의 이미지를 연상시켜주는
전통적인 것과 중국 상형문자를 조형적 요소로 도입한 표현 등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두드러지면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이미지는
거대한 날개와 무대 위에서 어떤 춤동작을 하다가 멈춘 순간을 보여주는 듯한 인물의 실루엣에 가까운 모습들이다. 무용에 관심을 갖고 있는 작가답게
그의 화면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긴장한 발끝과 힘을 모은 손끝 하나하나에서 화면 속으로 향하는 작가의 감정이입을 읽을 수 있다.
거의 실물
오브제에 가깝게 한지로 만들어진 날개(실제로 한 작품에는 실제로 새의 날개를 부착하였다)는 화면 속에 네모나 원 또는 육면체로 구획되는 작은
화면에 부착되어 금방이라도 그 도형을 낚아채서 날아오를 듯하다. 삶에 대한 긍정적 시각과 음양의 조화, 자연의 순환이 표현된 도형을 안고
날아오르는 현상을 통해 작가는 무용수의 도약과 예술가로서의 황홀한 비상을 꿈꾼다.
도약과 비상이 이루어지고 난다면 결국 화면에 남는 것은
동작을 멈춘 인간의 모습뿐이다. 이 모습이 어쩌면 꿈꾸는 작가의 모습일 수도 있다. 이러한 과정으로 화면을 단순화해가면 김지현의 관심의 한
가운데에는 인간이, 그리고 그 인간의 본질적인 사고와 명상 그리고 경쾌한 비상의 꿈이 그의 주된 관심사임을 추론해낼 수 있을
것이다.
김창호는 광목천에 음식물이나 광물질 등을 묻혀서 그 천을 땅속에 일정기간 동안
묻어놓음으로써 형성되는 곰팡이의 얼룩과 찌든 자국들로부터 작품의 실마리를 풀어나간다. 이러한 작업과정은 작가의 기획된 의도가 체계적으로
개입되기보다는 우연성에 의존하여 이미지가 틀을 잡고 작가의 마음속에 연상작용을 불러일으킨다. 다다 예술가들의 생각처럼 작가가 무의식적 이미지에
의존한다면 그것은 욕망을 선행하지 않는 ‘순수한 삶’을 창조하는 가능성을 암시해주는 것일 수도 있다. 작가 스스로가 조형의식을 구속과 억압의
장치로 느끼던 것처럼 그의 작업방식은 이러한 억압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유효한 방법이 될 수 있다.
김창호의 작품 제작방식같이 우연성에의
의존은 자칫 예술의 무정부주의적 해체와 작가의 존엄성을 부정하는 현상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서양미술사에서 장 아르프나 마르셀 뒤샹같은 작가들도
이러한 무의식과 우연성에 의존한 작품을 제작한 적이 있다. 오랜 동안 쌓인 먼지 층에 나타나는 형상을 그대로 화면의 요소로 이용하거나 던져진
도형들의 배열을 그대로 선택하여 화면을 구성하는 이들의 작업은 김창호의 숙성된 광목천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다다
예술가들이 작가의 노동을 최소화한 것이 비해 김창호는 선택된 우연성을 적극적으로 작가의 창조적 욕구와 결합시킨다는 점에서 그들과
차별된다.
김창호는 자신이 다루는 재료들의 물성과 그 재료들 사이의 우연성을 매개로 한 상호작용을 작가의 삶에 대한 의미천착의 도구이며
과정으로 이해하며 그것을 창조적 태도로 발전시킨다. 이에 비하여 다다 예술가들은 창조적 욕구에 대한 회의적 태도를 결국 창조보다는 부정과 거절을
통한 예술적 무정부주의로 가는 길로 선택하였으며 초현실주의로 입양된 일부 작가들을 제외하고는 오늘날 예술적 담론보다는 정치사회적 또는
심리분석학적 담론으로 작품들이 해석되는 경향이 있는 것도 김창호의 작품과는 다른 궤적을 만든다.
2002년 개인전을 계기로 어느 평론가와
가진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작업을 순환적인 농사일에 비유하기도 하고 존재의 흔적이나 생성과 소멸을 읽는 허무의식의 소스로서 인식하기도 하였다.
그가 어떻게 이야기했건 간에 작가의 발언의 진정성을 증명하는 것은 결국 작품 그 자체이며 그런 의미에서 작가는 말로써 이야기하기보다 작품으로써
이야기하기를 선택하여야 할 것이다.
후원│㈜현우조형예술연구소
참여작가│김지현, 김창호, 문인상,
석철주
기획자│최재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