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기
아시아 현대미술 프로젝트
시티_넷 아시아 2005 10. 5 - 11. 20 서울시립미술관
아시아담론은 지구의 절반을 타자화 하는 망령된 신화이다. 중동과 인도문화권,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동북아시아 등 각기 다른 정체성을 하나의 이름으로 구겨 넣는 아시아 담론의 허구성에 비해 동아시아 담론은 우리에게 좀 더 구체적으로 다가온다. 오랜 역사를 거쳐 각축해온 한중일과 대만의 만남은 그래서 더욱 각별하다. 동아시아 각국의 변화는 또 다른 질서를 구축하고 있다. 노골적인 중국의 팽창주의는 지역 패권을 발판으로 전지구적인 대결국면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미 19세기부터 아시아담론을 역설하며 제국의 패권을 부추겨왔던 일본이 최근 들어 우경화의 길을 걷고 있다는 점 또한 주변국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중국과 일본에 비해 한국과 대만의 입지는 매우 애매하다. 동아시아 전체에 한류를 전파하면서 동시대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계기를 무마하고 있는 한국은 여전히 지구상 최후의 분단국가로서 4강의 위력을 실감하고 있다.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고 있는 대만 또한 중간에 끼어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아시아라는 불가능에 가까운 믿음에 비해 동아시아 4개 도시의 화두는 좀 더 가깝게 다가온다. 각 도시들은 나름의 색깔을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중국 아닌 중국, 상하이는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는 중국 현대사회의 역동성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상하이 작가들은 자본주의적 질서가 그 어느 도시보다도 먼저 자리 잡은 특별한 도시 상하이에서 21세기 중국의 혼란을 체험하고 있는 허리세대들의 현실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확연하게 자극적이었다. 엉성한 프레임구조의 키네틱 공룡의 모습 속에서 중국사회를 옥죄어 오는 세계화의 단면을 읽어냈다고 말하면 지나치게 도식적일지 몰라도, 시험관 속의 태아라든지, 유방 절개수술을 한 무용수 등 역동하는 현실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이들의 면면은 사회의 격동으로부터 추출한 예술적 도발을 가늠하기에 충분했다.
중국작가들의 요란함에 비해 일본작가들의 단정함은 도시별로 체감 온도가 다른 감성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냈다. (다분히 인상비평의 혐의가 짙은 말이지만) 흔히들 하는 말로 일본 작가들 작업은 ‘약하다’라는 속설에 담긴 함의를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 작가들 특유의 세련된 단색조의 색감과 형상표현을 절제하고 명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려는 관행들을 이번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을 통해서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은 특정 큐레이터의 취향 탓이었을까? 꼭 그렇지 만은 않은 것 같다. 말끔하게 다듬은 작품들에서 아방가르드로서의 예술적 저항을 읽어낼 수 없었다. 깔끔한 표면 재질감으로 단장한 단색조의 평명 회화들, 정연하게 푸른빛으로 공간을 채운 설치작품들, 땡땡이 무늬나 나프탈렌 소재 신발들의 반복들과 더불어 기하학적인 공간미학에서 명상을 끄집어내고자 하는 작업들을 대하면서, 문맥에 접근하기 보다는 작업의 외형을 훑어보며 국가와 도시 전체를 슬쩍 건드리고 지나가면서 인상비평을 뇌깔였을 서울 사람들의 감성을 상상했다.
타이페이에서 보내온 ‘느림’ 메시지는 미국과 중국과 일본 사이에 존재하는 동아시아의 한 거대도시에서 보내온 ‘동양적 성찰’이다. 타이페이 작가들은 매우 역설적인 경계에 서 있다. 나는 대만 작가들의 느림의 미학을 대하면서 자꾸 딴생각이 났다. 대만이 우리에게 무엇이었던가? 우리는 수천만의 인구가 공동체를 꾸리며 살아가고 있는 대만을 독자적인 정체성을 가진 공동체로 인정하고 그들의 문제로부터 한반도의 명운을 성찰하는 데 매우 각박하다. 대만의 정체를 인정하기 안/못하는 한 한반도의 정체 또한 소수자에 불과하다는 점을 망각하고 있는 우리는 얼마나 경박한가. 서울의 이야기 ‘우리시대의 아이콘’을 보면서도 대만 생각이 났다. 동시대의 번다한 문화적, 예술적 생산물들을 통해 온갖 짬뽕 아이콘들로 가득한 동시대의 단면을 보여준 서울 작가들을 보면서 중국과 일본에 낀 대만과 한국 생각이 났던 것은 아마도 “시티_넷 ‘동’아시아 프로젝트”가 “미필적 고의에 의한 ‘동’아시아 담론 비판”을 시도했기 때문일 것이다.
서울아트가이드 200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