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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중전

  • 전시기간

    2005-11-02 ~ 2005-11-11

  • 참여작가

    김근중

  • 전시 장소

    동산방화랑

  • 문의처

    02-733-58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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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풍류화조도新風流花鳥圖:

경계없는 시선으로 바라 본 맥락의 화원花園




장동광(예술학, 서울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1
김근중이 긴 침묵 끝에 화조도를 안고 우리 곁으로 왔다. 그동안 김근중의 화력(畵歷)과 창작의 넓은 보폭(步幅)을 기억하는 이들은 그의 침묵이 무엇을 말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양평의 작업실에서 칩거하다시피 하면서 예술에 관해 사유하는 가운데 철학적 화두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김근중은 인터넷을 통해 선계(禪界)의 고수들과 아주 깊숙한 화쟁(話諍)을 나누고 있었다고 했다. 작업실의 한쪽 벽면에 낙서처럼 쓰여진 “만법이 돌아가는 곳은 하나인데 하나가 돌아갈 곳은 어디인가?” 라는 화두는 그의 현재의 심계(心界)와 고민의 흔적을 보여주는 극명한 단서였다. 이러한 그의 화두와 함께 작업실에서의 반복적 일과들은 오로지 하나의 길에 드리워진 생존의 햇볕이자, 바람이자, 빗물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바로 그 하나의 길은 빈 화폭, 캔버스 위에 그려질 올 오버 페인팅(All-over painting)으로 서서히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의 그림에서는 길이 보이지가 않는다. 꽃밭 속에서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막막함이 우리의 시선을 압박한다. 그의 꽃과 새들은 확대경으로 들여다보듯이 아주 가깝게 포착된 채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필자는 김근중의 이 변화된 화풍이 어쩌면 고전적 숭고미에 대한 향수가 다시금 되살아났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필자의 생각을 반영하듯이 그의 작품 중 일부는 금색으로 칠해진 바탕화면 위에 그려진 그림도 있다. 그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2005년도 11월 동산방 개인전에서는 기존의 작품세계와는 시각적으로 완전히 다른 전통화조화와 민화를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그림을 내놓게 되었다. 비록 작품의 외형적 조건은 달라졌다 할지라도 본인의 작품세계에서의 기본 컨셉은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 그동안 일관되게 추구해왔던 동양정신의 본질에 대한 탐구는 여전히 나의 과제이다. 그동안 작품의 타이틀이 되어왔던 “Natural Being”에서 볼 수 있듯 예술을 통한 나의 관심은 결국은 존재에 대한 물음이요 체화이다.”

이렇게 김근중이 화조도에 천착하게 된 것은 자신의 회화적 근원을 찾아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일에서 출발한다. 그는 일찍이 학부시절 수업기에 꽃을 그렸던 사생의 기억, 대만유학시절 미술사를 전공하면서 박물관에서 보았던 중국 오대시대 화조화와 우리민화에 대한 감동의 순간들, 그리고 작업실 주변에 즐비한 꽃들에 대한 시각적 자극이 큰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무릇 작가의 성장배경과 작업실의 환경적 조건은 창작의 근거를 추적하는 단서가 되기도 하는데, 이러한 측면에서도 김근중 역시 예외가 아닌 듯하다.

“한때 스스로 이런 자문을 한 적이 있었다. 나는 왜 자연식물들이 넘쳐나는 교외에까지 나와서 그런 것과는 무관한 관념의 것을 그리고 있을까? 더구나 대상을 빌리지도 않고 동양회화의 정신을 구현하겠다고 하는가? 정신적 본질은 구체적 형상을 통해서 드러내는 방법도 있는데 하필 머리를 쥐어짜면서 사서 고생을 하고 있을까? 그러나 직접적으로 계기가 된 것은 초등학교 동창이 ‘이해가 되지 않는 그림을 그려놓고서 와서 보라고 하는 것은 작가의 횡포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매우 심각한 그의 말에 작가와 대중과의 소통부재가 단적으로 드러내는 순간을 경험했다. 그래? 그렇다면 나도 형상적인 것을 해보자.”

이러한 계기로 김근중은 형상적인 것에 대한 강렬한 화의(畵意)를 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머리로 그리는 그림보다는 가슴으로 느껴지는 그런 그림에 대한 열망이 강하게 되살아났던 것이다. 그리하여 김근중은 중국 오대시대의 화조도와 우리나라 민화의 화조도에 대해 본격적으로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결국 대중과의 소통부재에 대한 자각의 결과이기도 했다. 창작생활의 이상과 현실적 괴리감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를 사유하면서 그는 자유롭고 구속에 없는 상태를 표현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김근중은 인간 세상에 존재하는 꽃들의 화원 속에서 순수한 아름다움을 형상화 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다. 다양한 표정의 꽃과 새들이 그의 화면 속으로 들어 온 것이다. 그러나 그 꽃과 새들은 재현된 꽃이 아니며 그의 화조도는 중국 전통 화조도나 민화의 양식에서도 멀리 벗어나 있다. 표현기법이나 재료적 측면에서도 동양화도 서양화도 아니며, 양식적 측면에서도 표현주의도 구성주의도 아니며, 장르적으로도 추상화도 사실화도 아니라는 점에서 김근중의 이번 작품들은 다분히 혼성적이며 가치중립적이다.

“물론 나는 꽃을 그리지만 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꽃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드러내려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여기에서 꽃은 다만 그것이 꽃이어서 꽃일 뿐이다.”



이렇듯 김근중의 작품에 나타난 변화의 양상과 그것의 의미작용들은 조금 더 깊은 비평적 해석을 요구하고 있다.





2
질 들뢰즈((Gilles Deleuze)는『의미의 논리(Logique Du Sens)』에서 지각적인 ‘봄(vision)’에서 출발해서 시원적이고 선험적인 ‘보다(voir)’의 문제를 언급한 바 있다. 지시(significance)와 표현(expression)의 혼동문제에 관한 들뢰즈의 논리는 김근중의 경우에도 유효하다. 들뢰즈의 논리를 김근중의 작품에 구체적으로 적용해 보자면, 그림 속의 꽃들은 실재적인 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선험적으로 보아 온 꽃 모양을 닮은 지시적 현시(顯示)일 뿐 꽃의 향기, 모양, 색채 등과 전혀 거리가 먼 물질적 표현의 한 양상일 뿐인 것이다. 그가 꽃과 함께 그린 새의 경우도 동일한 맥락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의 그림 속 꽃을 ‘봄’ 이라는 지각적 현상이 아니라 그 의미소들이 담고 있는 추상적, 연상적 맥락으로서 ‘보다’ 라는 연역적 개념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김근중이 표현한 꽃과 새의 형태들을 통해 꽃의 미적 자태를 ‘지시’하는 현상보다 오히려 ‘화려함, 속삭임, 무상함, 슬픔과 좌절, 생성과 소멸’ 등과 같은 추상적 연상작용에 빠져들게 되기 때문이다. 만약 그의 화조도가 주체적 동일성을 확보하고 있다면 이러한 선험적 지각작용은 보다 심미적 차원 내지는 감정이입의 단계로 전이될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자신의 작업에 대해 다음과 같은 소회를 피력하고 있다.

“타자들을 의식한다는 것은 바로 그 의식이 자기의 현재를 유지해줄 것이라고 믿는 관념과 다름 아니다. 타자들에게 얽매인 의식으로 작업을 하게 되면 가슴은 차갑고 머리만 뜨거운 결과를 초래해 종내 작품이 생동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또한 당연할 것이다. 타자를 지칭하는 대중의 심미의식 또는 기존의 미학, 철학 등의 이론이란 것도 결국은 그것을 통해 감성을 순화시키고 나아가서 인성의 본래를 회복한다는데 그 가치가 있을 것이지만 그것이 어떠한 것이던 자기의 감성과 교류가 이루어지지 않아 가슴이 생동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본인은 바로 그동안 위와 같은 관념의 장애로 인해 억지로 머리로만 작업을 해왔던 것을 반성하고 가슴으로 그림을 그리려는 것으로 방향을 선회하여 화조화를 선택하게 된 것이다.”





이번 김근중의 화조도는 다음과 같은 비평적 해석의 여지들을 제공하고 있다. 우선은 그가 민화 혹은 전통 화조화에 대해 현대적 해석을 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민화의 미학적 특질로 주로 논의되는 해학성, 익명성, 구도의 자율성, 2차원과 3차원의 혼재적 구성 등과 같은 미학적 관점을 새롭게 재맥락화하고 있다. 그의 화조도는 꽃과 줄기, 잎사귀를 중심구도에 두고 있지만 이를 명암처리의 단계를 2-3단계로 축소하거나 원근감을 과감하게 배제하여 표현하고 있다. 그는 화면 속에서 앞에 위치한 꽃과 뒤에 자리한 꽃을 단일한 색조로 조율함으로써 사실감보다는 꽃의 형상성을 강렬하게 부각시키고 있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꽃의 형상들은 그의 여러 차례의 색채실험을 통해 얻어진 녹색과 보라색, 혹은 노란색 등 보색대비 혹은 형광색조의 색채적 변형을 통해 더욱 생경하고 야릇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그의 화면이 상당히 민화와 같은 장식성과 평면성, 자유로운 구도 등에 깊이 천착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그의 그림에서 만발한 꽃과 아직 필 듯 말 듯한 꽃봉오리, 목을 숙인 꽃 한송이를 반드시 포치한 것을 보면 그의 화조도가 장식성이나 구도의 자율성 못지 않게 해학성(諧謔性)까지도 아우르려고 하였음을 은연중 엿보게 된다. 정면을 향한 꽃의 화려한 자태가 연상시키는 ‘욕망과 화사함’은 마치 우리 인간사의 색정(色情)과 욕망(慾望)을 대변하는 상징으로 읽혀진다. 복잡다단한 꽃들이 불가에서 말하는 사바세계의 번뇌의 집합체라면, 그 속에서 살포시 고개 숙인 꽃은 마치 세상에서 빗겨나 있는 이단자 혹은 한 철학자의 삶에 대한 고뇌의 몸짓처럼 여겨진다. 이는 어쩌면 김근중 자신의 모습을 대변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는 세상 속에서 모든 욕망과 번뇌를 숙명처럼 안고 살아가는 한 예술가로서 상업적 성공에 대한 기대와 순수에의 열망, 이 양자 사이를 오가는 자신의 숨김없는 모습 그 자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맥락에서 김근중의 화조도는 전통에서 추출한 역사적 숨결을 현대적 어법으로 재구성하면서 자신의 회화적 사유를 표현하는 ‘의미의 화원’으로 변용되고 있는 것이다.

“전통 화조화의 현대적 해석은 민화의 모란과 작약으로부터 시작하였다. 민화에서 가장 많이 다루는 소재로써의 모란과 작약은 예로부터 부귀를 상징하였다. 민화는 익히 알려졌다시피 다듬어지지 않은 무기교의 원시성과 진정성 등 너무도 훌륭한 예술성을 간직하고 있어서 언제보아도 가슴이 열리는 무한 감동을 맛보게 해준다. 특히 본인은 모란이 가득히 덮여있는 병풍식 민화를 좋아한다. 화면을 가득 덮는 올오버페인팅식의 공간구성과 본능을 자극하는 현란한 색감은 이성과 의식으로 마비된 감성을 일깨우기에 충분하다. 화면을 가득채운 것을 왜 좋아할까를 살펴보니, 창작에너지는 넘쳐나는데 그동안 소재없이 관념에 근거한 작업으로 인해 화면 안에서 마음껏 놀아보지 못했음을 꾸짖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몸과 마음이 탈진할 정도로 혼을 바쳐 급기야 몸도 마음도 사라지는 삼매상태를 깊은 곳에서 존재는 간절히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살펴 볼 것은 김근중의 화면에 등장하는 새 혹은 꽃들과 관련한 말풍선의 의미론적 해석의 문제이다. 말풍선은 대개 만화에 등장하는 독백적 요소이며 언어의 텍스트화이다. 다시 말하자면 말풍선은 어떤 등장인물이 홀로 연상하는 바나 상대방에게 들키지 않도록 독려(獨慮)하는 경우에 쓰는 표현의 방식이다. 말풍선은 그 자체가 확장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실화(實話)의 연결체이며 의미의 연장선이다. 그런데 김근중의 화조도에서 말풍선은 꽃과 꽃 사이에 또는 꽃과 새들 사이를 연결하는 역할로 조합되어 등장하기도 한다. 여기서 필자는 꽃과 새의 관계성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는데, 새가 남성적 성징(性徵)을 갖고 있다면 꽃은 여성성의 성징을 의미한다. 즉 목단이나 작약 등의 꽃이 식물로서의 부드러움, 화려함, 연약함, 부귀 등과 관련된다는 점에서 여성성의 문제와 관련될 수 있다면, 새는 동물로서 역동성, 무게감, 이동의 자유함 등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남성적 측면을 보여 준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김근중의 화조도 속의 꽃과 새를 각각 남성과 여성, 땅과 하늘을 상징하고 있는 대상으로 추론한다면, 그의 화면은 결국 이 양자의 상생, 화합, 조화의 지평에 관한 회화적 사유를 전달하려는 의도의 산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말풍선에는 텍스트가 들어있지 않고 텅 비어있다. 이 빈 여백은 곧 무한한 사유의 가능성 내지는 수많은 화두가 부유(浮遊)함을 떠올리게 한다. 따라서 우리가 들을 수 없는 꽃과 꽃, 새와 꽃들의 대화들이란 결국 김근중이 바라보는 우리 인생사의 존재론적 질문에 관한 사유의 빈 그릇이자 채워야 내용에 다름 아닌 셈이다. 이 말풍선에 무엇이 담겨 있을까에 관한 해독은 각자의 화두에 달려있는 것이다. 또한 말풍선과 새의 몸체를 흰색으로 칠하고 그 외곽을 파란색으로 처리한 것은 형상성의 제거를 통한 가상(假想)의 존재성 즉 현실 너머의 미지성(未知性)을 암시적으로 드러내려한 의도로 해석된다.

“존재에 대한 물음을 위해 꽃을 기본으로 하여 여러 가지 장치를 시도하고 있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새와 꽃을 함께 놓았으나 말풍선을 도입한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어찌 보면 꽃과 새들이 무언의 대화를 하는 듯이 보이기도 하는데 이것은 인간만이 대화를 한다는 관념을 비틀어 버리는 것이기도 하고 나아가 꽃들이 무슨 대화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게 한 직접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그런데 말풍선을 만들고 나서 가만히 살펴보니 작업을 하는 동안 몰입이 되면서 근심과 걱정이 사라지고 나 자신본래의 정체성이 발현이 되어서 그런지 저절로 흥이 나고 유머가 생겨서 말풍선이 만들어 지게 된 다른 면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러한 것을 통해 예전의 서민들이 흥과 신명으로 그림을 그렸을 때 해학과 유머가 저절로 발현되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이제 앞으로 무엇을 또 도입할지는 나도 모른다. 되어가는 데로 지켜볼 것이다. 다만 보는 이가 어리둥절해져서 의문에 휩싸임과 동시에 그냥 유쾌하게 웃을 수 있도록 말이다. 그렇게 해서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의 꽃과 만나도록 하고 싶다. 꽃도 살고 나도 살고 너도 살고 모두가 화쟁(和諍)으로 살 수 있도록...

김근중의 이전 근작들이 보여주는 화조도의 특징은 ‘동양정신의 본질탐구와 풍류의식의 발현’으로 집약되지 않을까 한다. 여기서 풍류의식은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자유, 파격, 일탈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면서도 격조와 예술적 행위가 동반된 낭만적 의식으로서 상류층의 문화적 일탈을 의미해 왔다. 풍류의 직역이 ‘바람의 흐름’인 것처럼 봄바람, 가을바람에 따라 마음가는대로 물로, 산으로 흥취에 따라 일상을 훌훌 털어 버리고 자연으로 나가는 것이 풍류였던 것이다. 거기에는 남성과 함께 미모의 젊은 여성이 함께 동행하는 것이 기본이었고, 대체로 음악과 시조가 따라 다녔으며, 정신의 일탈을 가능하게 하는 술과 취기(醉氣)도 용서되었다. 이 한자어 풍류는 ‘멋’이라는 설명하기 어려운 한글의 의미로 번안되기도 하였는데, 필자는 김근중의 그림에서 이러한 우리 겨레 특유의 풍류의식의 한 단층을 목도하게 된다. 꽃과 새와 말풍선을 통해 김근중이 그려낸 이 신풍류화조도는 전통에서 일탈한 해학성과 풍류의식의 현대적 변용이며 자연과 인간이 교감을 나누는 소통(疏通)의 화원에 대해 말하고 있다. 꽃이 말하고 새가 화답하는 화원이 우리 인간사의 합 부분이며 전체일 수 있다는 그의 예술적 사유는 진정 무엇에 힘을 얻고 있으며 과연 어디로 향해 가려는 것일까?




3
1990년도 금호미술관에서 열렸던 김근중의 첫 개인전은 고구려와 돈황 벽화를 연구하여 그것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내는 작업이었다. 이후 1993년 국제갤러리의 전시와 1996년 유나화랑, 1999년과 2000년 일본 겐지다끼갤러리 전시까지에 이르기까지의 작품들의 경향은 도상학적인 형상을 강하게 부각시킨 추상회화였다. 그는 이후 보다 미니멀한 추상성에 치중하여 명상적 색채와 질감표현에 몰두하게 되는데 이러한 경향이 2002년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마니프아트페어를 기점으로 2002년 겐지다끼갤러리, 2003년도 동산방화랑, 2005년 코엑스국제아트페어까지 이어졌다. 이제 그는 화풍의 변화적 분기점에 서서 전통 화조도의 현대적 해석으로 새로운 변신을 시작하고 있다.

이러한 화풍과 작품주제의 확연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김근중의 회화적 사명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곧 그가 늘 마음속에 새기고 있는 동양정신의 핵심인 일원론적 사상과 주객일체론(主客一體論)의 회화적 구현에 있기 때문이다. 이번 근작의 정신적 밑바탕에는 바로 그러한 자신의 회화적 사명과 지향점을 향해 가는 수행자의 마음자세가 미명의 아침이슬처럼 영롱하게 맺혀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동양정신의 핵심은 대상이 나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내 마음 안에 대상이 있는 것이다. 대상이 내 안에 있으니 그것은 둘이 아니어서 결국 바로 내가 그것이고 그것이 나임을 깨닫는 것이다. 이렇게 되어 너와 나라는 부딪힘의 요인이 되는 나라는 관념마저 사라져 어느 것에도 걸림이 없는 자유로운 상태가 되는 것이야말로 바로 동양정신의 본질과의 조우라고 생각해왔던 상황에서 자아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성찰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김근중이 내세워 온 ‘자연적 존재(Natural Being)’라는 개념은 그가 변함없이 지속해 온 화두(話頭)이자 화제(畵題)였다. 그는 이러한 자연적 존재의 자문과 자답을 거듭하는 가운데 존재론적 사유들을 회화적으로 표현하고자 하여 왔다. 이번 동산방화랑에서 발표하는 화조도는 경계없는 시선으로 바라 본 세상에 대한 존재론적 물음일 수 있다. 김근중의 이번 근작들에서 우리의 시선을 압박하는 스틸장면처럼 확대되어 그려진 꽃과 새, 그리고 말풍선의 지시적 기표들과 기의의 불일치성 -아르토(Antonin Artaud)가 말한 “물과 수증기 사이에서 망설이는 파동”처럼- 은 새로운 맥락들을 생성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보는 가는 결국 관객 스스로에게 보여 지는 대상의 지시적 현상과 선험적 경험에서 출발한 의미작용에 의한 반응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김근중의 이러한 회화적 사명이 자아에 대한 순수한 선험의 경지로 안내하는 새로운 회화적 소통의 장을 마련해 줄 것으로 기대해 본다. 그는 그간 깊은 삼매(三昧)의 경지에서 꽃과 새를, 전통과 현대를, 동양화와 서양화의 영역을 경계없이 넘나들어 왔다. 이번 근작들은 그래서 그 사유의 화원으로 우리를 부르는 풍류의 음율이자 열락(悅樂)의 숨결들이다.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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